고구려역사저널

기자의 활동무대는 한반도 평양 아닌 산서성 남부 (2부)

기자의 봉지, 기자산과 기자동굴, 기자묘, 기자사당 등 유적 많아

성헌식 컬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6/04/02 [21:14]

기자의 활동무대는 한반도 평양 아닌 산서성 남부 (2부)

기자의 봉지, 기자산과 기자동굴, 기자묘, 기자사당 등 유적 많아

성헌식 컬럼니스트 | 입력 : 2026/04/02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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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箕子)의 이름은 서여(胥餘)라고 하며, 은나라 왕족 미자(微子)과 비간(比干)과 함께 3()이라 불린다. 기자는 조카 은 주왕(紂王)에게 간언하다 옥에 갇히고, 은나라 멸망 후 주 무왕이 기자를 불러다가 "하늘의 도에 대해 물었더니 이에 기자가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자 감동한 주 무왕이 기자를 신하로 삼으려 했으나, 기자는 은나라 왕족이라는 이유로 주 무왕의 신하 되기를 거부하고는 조선으로 망명해버린다. 그러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한다.

 

주 무왕의 제후가 된 기자는 5천 명의 무리와 함께 조선에 와서 왕이 되어 평양에 도읍하여 기자의 후손들은 900년이 넘도록 조선을 통치했으며 마지막 기준(箕準) 왕 때 위만에게 나라를 잃는다는 것이 소위 기자조선이라는 것이다. <심국유사>都平壤城이라는 문구가 있어 아직도 기자조선과 그 도읍지가 한반도 평양이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기자가 주 무왕에게 봉지(封地)로 받았다는 조선 땅은 과연 어디였을까?

 

▲ 주 무왕이 기자를 봉했다는 조선의 정체는?  기자조선이 과연 있었을까?    ©고구려역사저널

▲ 중국이 제멋대로 그린 기자이동로. 여기까지 올 수도 없고 올 필요도 없었다.  © 고구려역사저널

 

기자가 봉지로 받았다고 치더라도 그 조선은 나라 조선이 아니라, <한서지리지유주의 낙랑군에 속하는 25개 현 중 머리 현인 조선(朝鮮)현으로 보아야 한다이는 周武王灭殷封箕子于朝鲜이라는 문구가 <사기주본기>가 아니라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실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맹자의 공손추장구 상에 ··주의 전성기에도 땅이 천 리를 넘는 자가 있지 않았다(公孫丑章句夏后殷周之盛 地未有過千里者也,”라는 문구가 있듯이주 무왕이 훨씬 큰 나라 조선의 왕으로 기자를 봉할 수도 없거니와만일 조선의 왕에 봉했더라면 이는 송미자세가에 기록될 작은 일이 아니라 주본기에 기록할 큰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역사왜곡의 천재 중국에서는 기자의 봉지를 조선이라 하면서 이를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산서성 중부 태곡(太谷)현 또는

남부 능천(陵川)현을 꼽으면서 두 후보지 중에서

태곡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하고 있어 한국과 이질감이 무척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기자의 봉지는 산서성 남부 능천현이 옳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그곳이 예전에 조선 땅이었고, 조선의 옥저 땅이기도 하고

나중에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약 900년 후 상당으로 오게 되는 번조선 기준 왕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기자의 봉지 조선현을 능천현 부근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능천현 동쪽에 기자의 유적인 기자산(箕子山)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바둑 기자(棋子)산으로 개명되었지만, 청나라 강희제 때 제작 지도에도 분명 기자산(箕子山)이라고 되어있다. 중국도 기자가 이 箕子산에 있는 箕子洞(동굴)에서 은둔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 강희제 때 제작 지도에 하남성과의 경계 태행산 위에 있는 기자산       ©

 

 먼저 기자가 살았다는 기자산(箕子山)과 기자동굴(箕子洞)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기자산) 능천현 남동쪽 20km 지점에 3개 향의 경계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며 태행산맥 남쪽 자락에 속한다. 주봉은 해발 1,488m이며, 면적은 약 25로 삼림 피복률이 95%를 넘는다. 여름철 평균 기온은 22~24이다. 민간​​전설에 따르면 기자가 이곳에 피신했다고 하며, 관련 기록은 산서지광서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유일의 천연 바둑판 모양 암석 지형 분포 지역이다. 산은 자연적으로 흑백의 바둑판무늬 돌로 덮여 있으며, ‘기자동굴에는 바둑판 모양의 암석과 청나라 강희제 시대의 석비가 남아 있다. 2007년 이곳을 세계 바둑의 발상지로 확정했다.”

 

(원문) 箕子山Qizishan又称棋子山谋棋山位于陵川县城东南20公里处冶头古郊与侯庄三乡交界属太行山脉南段主峰海拔1488面积约25平方公里森林覆盖率达95%以上盛夏平均气温22-24℃。1997年设为省级森林公园2014年升级为国家级森林公园是我国现存唯一天然棋石地貌分布区]

 山体天然分布黑白棋石箕子洞留存棋盘状岩石痕迹及清康熙年间石碑民间流传箕子避居传说现存清光绪山西通志相关记载1998年建造边长21米的象天枰巨型棋盘景观2020年入选中国华侨国际文化交流基地杨晓国研究员提出围棋起源说2007年经专家论证确认为世界围棋发源地

 

위 역사연혁의 내용은, 기자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중국 정부가 근자에 箕子산에서 棋子산으로 개명하고 이곳을 바둑의 발상지로 둔갑시켰다. <박물지>와 <설문> 등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요(堯)·순(舜) 임금이 어리석은 아들들을 깨우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箕子에 의한 중국 棋子(기자)의 발상지라 하니? 억지로 역사왜곡을 해놓다보니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 기자산 위에 있는 기자동굴의 箕子 명패가 뚜렷하다.                    © 고구려역사저널


(기자동굴) 산서성 능천현 기자산 남서쪽 기슭에 있다. 고대 상나라 시대의 초가 정자와 원형의 태극 연못을 지나면 위하 강변을 따라 깊이 약 10미터, 높이 약 4미터의 자연석굴이 나타난다. 굴 내부 바위에는 바둑판의 선과 바둑알 자국이 자연적으로 남아 있고, 굴 천장의 바위 무늬는 기자가 전략을 짜다가 미처 끝내지 못한 바둑판이라고 전해지는데, 세월의 풍화에도 불구하고 그 무늬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굴은 상나라 시대 기자가 천문학, 점술, 바둑을 공부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자촌의 "썩은 도끼자루" 전설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굴 입구에는 기자와 신선들이 바둑을 두는 모습이 묘사된 조각상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기자 동굴은 상나라 바둑의 시조인 기자가 천문학을 추론하고 점을 치고 여가시간에 바둑을 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원문) 箕子洞位于山西省陵川县棋子山西南山坡下走过古朴的商代草亭穿过圆形太极水池沿卫河水流经的路径前行可见该天然石洞洞深约104洞内岩石存有天然围棋棋盘线条痕迹及棋子凹痕洞顶岩石上的天然图案传说为箕子推演棋局所留的未完棋局经岁月侵蚀仍保持清晰纹路该洞传为商代箕子推演天文占卦卜筮及研棋之所与苇水村"烂柯"传说直接关联洞口塑有箕子与仙人谋棋雕像洞外壁刻有中国棋院院长陈祖德题字洞内清泉四季流淌属棋子山旅游度假区核心自然景观

1998年洞旁建成象天枰棋圣聂卫平曾在此揭幕对弈2007年起连续举办山西晋城棋子山国际围棋文化节经中国先秦史学会论证确认该地为围棋重要发源地棋子山现设棋源山庄等设施形成以围棋文化为核心的景观体系洞内天然棋谱图案被列为围棋发源地核心物证

 

왜 이 부근이 기자의 봉지 조선현인지 여부와

한반도 평양에 잠들어 있다고 알려진 기자의 진짜 무덤이 부근에 있다고 하는데,

다음 연재에 설명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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