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역사저널

왜국이 백제 부흥군을 적극 지원한 이유는? (1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6/04/07 [21:49]

왜국이 백제 부흥군을 적극 지원한 이유는? (1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 입력 : 2026/04/07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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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군사와 연합한 신라 김유신의 5만 군사에게 기습을 당한 데다가, 당나라와 내통한 내부반역자 예식(禰植/禰寔進)이 웅진에서 의자왕을 체포해 투항하는 바람에 660년 졸지에 나라가 갑자기 망하고 말았다.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 등 3명의 왕자, 88명의 대신들과 12,807명의 백성들이 당나라 도성으로 압송되었고, 당나라는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의 5곳에 도독부를 설치했다.

 

백제가 망하자 무왕(夫餘璋)의 조카 복신(福信)은 스스로를 상잠(霜岑)장군이라 부르며 영군(領軍)장군을 자칭한 승려 도침(道琛)과 더불어 주류(周留)성을 근거지로 하여 복국(復國)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당시 왜국의 제명(齊明)여왕에게 의자왕의 비보를 전하면서 30년 전에 왜국에 볼모로 갔던 왕자 부여풍(夫餘豊)을 왕으로 세우려하니 귀국 시켜줄 것을 청했다.

 

                           백제에서 의자왕이 바뀌고 왜국에 있던 부여풍이 귀국했다.


 

왜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이유

  

소식을 접한 제명여왕은 “백제의 위태로움을 돕고 끊어진 사직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제가 궁하여 내게 온 것은 본방(本邦)이 망해 의지할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어서일 것이다. 나도 창을 베게로 삼아 쓸개를 되씹고 있다. 꼭 구원해주겠노라. 장군들을 나누어 여러 길로 나아갈 것이다. 구름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움직여 같이 그 원수들을 참하고 긴박한 고통을 덜어 주겠노라.”라고 말했다.

 

제명여왕은 마치 자기 일처럼 분개하며 본국(本邦)인 백제를 구원해주겠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제명여왕의 이름은 보황녀(寶皇女)이고 2번이나 왜왕에 오른 인물이다.

남편인 서명(舒明)왕의 뒤를 이어 황극(皇極 642~645)여왕이 되었다가 시동생인 효덕(孝德)왕에게 양위했다가, 효덕왕이 죽자 다시 제명(齊明 655~661)여왕에 오른다. 백제를 구원할 전쟁 준비를 하던 중 661년 68세의 나이로 죽자 아들 천지(天智)왕이 그 뒤를 잇는다.

 

서명왕 11년 가을 7월 서명왕은 “금년에 대궁(大宮=백제궁) 및 대사(大寺=백제대사)를 짓도록 하라”고 어명을 내렸고 다음해 10월에 완공해 거처를 백제궁으로 옮겼다가 그로부터 1년 후 그곳에서 죽는다. 궁 북쪽에 빈궁을 설치했는데, 이를 백제의 대빈(大殯)이라 한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제명여왕의 이름 보황녀(寶皇女)란 뜻은 황제의 여식(딸)으로 이름이 보(寶)라는 말이다. 제명여왕의 원래 이름은 부여보(夫餘寶)로 백제 의자왕의 누이였다. 그녀는 남동생이 당나라로 잡혀갔다는 비보를 접하자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즉각 군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이를 위해 선박을 건조하라고 명을 내린다. 우선 수천 명의 왜병을 보내 복신의 군대에 합류시킨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 왕자는 백제에서 파견한 일궁부(日宮府)의 대사로 있으면서 655년 1월 고모를 다시 왕위에 올려놓은 후 측근에서 보좌하던 실질적으로 야마토왜(大和倭) 행정부를 이끌던 인물이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일궁부대사 자리를 아우인 부여용에게 맡기고는 왜병 5천명의 호위를 받으며 본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한다.

 

제명여왕은 68세의 나이로 죽으면서 백제 복국을 유언으로 남기고, 뒤를 이은 아들 천지(天智)왕은 662년 1월 복신에게 화살 10만본, 군복용 면포 1천필, 군복용 견사 1백근, 솜 1천근, 가죽 1천장, 종자용 벼 3천석을 지원한다. 이듬해 3월에는 장수 6명과 27,000명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치게 했고, 5월에는 부여풍이 군선 170척과 군사 17,000명을 이끌고 드디어 백제로 귀국한다.

 

 

백제 부흥군이 와해된 이유는?

  

복신과 승려 도침이 중심이 된 백제부흥군의 군세가 얼마나 강했던지 당나라와 신라군은 연패해 많은 장수들이 처벌을 받을 정도였다. 나중에 다급해진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출병시킨다. 660년 백제가 망할 때는 13만 군사를 동원했지만, 백제의 부흥운동이 활발해져 200성 이상이 부흥군에게 넘어가자 마치 백제가 부활될 것 같기에 이를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반도사관에 중독된 식민사학계에서는 이 40만 대군이 노 젓는 배로 황해바다를 횡단해 한반도 백제 땅으로 들어왔다는 어불성설의 거짓말을 하고 있다. 40만 병력에 후방지원부대까지 합치면 100만이 넘는 인원인데 어떻게 한꺼번에 배를 타고 올 수 있는가? 당시 전함은 승선인원이 최대 100명이 채 안 되니 만 척 이상의 배가 있어야 하고, 비 동력선으로는 절대로 횡단항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렇게 막강했던 백제 부흥군 내부에서 분열이 생긴다. 복신이 승려 도침을 죽이고 그 군사를 합쳐 실권자가 되자, 허울뿐인 왕 부여풍과 차츰 서로를 시기하게 된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실(窟室)에 누워 있다가, 부여풍이 문병하러 들어오면 죽이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아차린 부여풍이 심복들을 데리고 들어가 복신을 반역혐의로 참형하고는 그의 목을 소금물에 절이는 해형(醢刑)에 처한다.

 

이때부터 백제의 부흥군은 급격히 힘이 약해져 마침내 전세가 역전되고 만다.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벼슬을 제수 받은 왕자 부여융이 당나라 장수 유인궤 등과 함께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만난 뒤 함께 주유성으로 추격해 들어갔다.

 

▲ 백강전투에서 대패한 왜백제연합수군     ©고구려역사저널

 

왜국에서는 선박 400척의 건조가 완료되자 27,000명의 왜군을 태우고는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백강으로 향한다. 그러나 왜군은 백강 어귀에서 당나라 군선 170척과 4번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 만다. 전선 400척이 불타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고 해수가 피로 붉어졌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패인은 기상을 감안하지 않고 무리하게 선제공격을 했다가 당나라 수군에게 협공을 당해 순식간에 대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백강전투에서 대패한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망간다. 백제의 왕자 부여충승과 충지 등이 군사와 왜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에 항복했다는 <구당서>의 기록이 있다. 이렇듯 백제 왕자가 왜군을 지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흑치상지는 이런 상황에서도 흩어진 군중을 불러 모아 10일 만에 3만 명을 합류시키고는, 당장 소정방의 수차례 공격을 무너뜨리고 다시 200여성을 탈취했다. 힘으로는 도저히 흑치상지에게 이길 수 없음을 간파한 당나라는 부여풍을 보내 회유책을 쓴다. 복신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던 흑치상지에게 부여융이 다가와 설득하자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투항하고 만다.

 

▲ 흑치상지가 당에 투항하자 백제의 사직이 끝나고 말았다.   © 고구려역사저널


이 때가 663년으로 <일본서기>는 이 해를 백제 멸망의 해로 적으면서 “백제 주유성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 이 때에 국인이 서로 말하길 ‘주유(州柔=周留)가 항복했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즉 백제가 그들의 조상 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668년 고구려까지 멸망하고 대중상과 아들 대조영에 의해 고구려 부흥운동이 진행되던 670년 12월 왜국(倭國)은 해돋이와 가까운 곳이라는 의미의 일본(日本)으로 국호를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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