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箕子)는 산서성 로성현 미자(微子)진에 묻혔다. (4부)
기자 이름 수유는 기씨 집성촌 지명 (1부) 기자의 활동무대는 한반도 평양 아닌 산서성 남부 (2부) 기자(箕子)의 진짜 무덤은 어디 있을까? (3부) (참조) 기자의 봉지는 평양이 아니라 산서성 경내 (참조) 箕子 관련 역사는 중국제 A.I가 국산보다 훨씬 총명
필자는 바이두(百度)백과 A.I의 설명을 접하는 순간 로성현에 있는 묘비 없이 허름한 무덤은 의관총(衣冠塚)이 아니라 기자의 진짜 무덤임을 직감했다. 그 이유는 로성현 일대가 주 무왕이 은 주왕의 이복형 미자를 송(宋)에 봉한 봉지(封地)였고, 무덤의 주인공이 누군지 여부는 현지 주민들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은삼인(殷三仁)이란 주지육림의 방탕과 포락지형의 폭정을 일삼는 주왕(紂王)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왕실의 기자(箕子), 비간(比干), 미자(微子), 의 세 종친을 일컫는 말이다. 이 삼인을 모시는 삼인사(三仁祀)라는 사당이 로성에 있다는 의미는 이곳이 기자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로성현 기자묘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무덤을 직접 보았다는 주민이 올린 답사기를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인용-1) 산서성 로성시 미자진 자북촌(潞城市微子镇子北村)에는 약 400평 면적에 6~7m 높이의 흙 언덕이 있는데, 이곳은 지역 주민들에게 ‘기자묘(箕子墓)’‘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고대 유적지에는 하나의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기원전 11세기 상나라 말기에 살았던 기자의 본명은 서여(胥餘)로 은 주왕의 숙부이자 비간(比干)의 형이었습니다. 그는 주 무왕으로부터 기방(箕方)에 봉해졌기에, 이 지명의 명칭이 유래하게 된 것입니다. (중략)
기자의 장지(葬地)에 관해서는 사서 기록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일설에는 산동성 조현, 다른 설로는 북한 평양의 을밀대 아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기자의 무덤이 왜 로성시 미자진에 있는 걸까요? 그건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다만 미자국과 기자 봉지가 가까웠기에 서로 교류와 왕래가 빈번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미자진이 은 주왕의 이복형인 미자의 봉지이고, 이 '미자국'이 있던 곳에서 기자의 봉지는 약 3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추측합니다. 기자가 죽은 후, 지역 주민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을지도 모릅니다.
2011년 11월, 저는 문물관광국 친구들과 함께 이 고대 유적지를 방문했습니다. 몇 차례 조사를 거친 후 무덤을 찾았지만, 잡초와 시든 풀로 뒤덮인 거대한 흙더미뿐이었고, 나무에 앉아 있던 까마귀들이 갑자기 날아오르며 황량한 분위기를 더했습니다. 이곳이 과연 저 유명한 기자의 무덤일까?
현재 무덤은 통로, 석상, 심지어 비석조차 없는 소박한 모습이지만, 기자의 차분하고 겸손하면서도 매력 넘치는 인격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기자릉 존재의 진정한 가치는 무덤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자비로운 인덕 정신에 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상)
(원문) 箕子陵探访箕子陵 dated 2024.06.10 在山西省潞城市微子镇子北村,一个占地约二亩、高约两三丈的土堆被当地民众称为“箕子墓”,这个古老的遗迹承载着一段历史故事。箕子,公元前十一世纪的商朝末年人,名胥馀,是纣王的叔父,同时也是比干的兄长。他曾被封于箕方,即现今的太谷和榆社一带,故以地名得号。
周武王伐纣时,微子选择归顺以保全家族,而箕子则采取了不同的策略。他没有直接进谏,而是选择隐居在山西省陵川县的棋子山,据说在那里钻研围棋,通过琴曲《箕子操》表达内心的情感。当周朝取代商朝后,箕子带领不愿臣服的人迁移至朝鲜,建立了“箕氏侯国”,并得到了周朝的认可,这段历史在《史记》中有记载。
关于箕子的葬地,史书记载有争议,有的说在山东曹县,有的则称在朝鲜平壤的乙密台下。而微子镇为何会有箕子墓,可能是由于微子国与箕子封地相邻,他们之间有过交往。尽管墓地简陋,无墓道、石像,甚至无墓碑,但其背后是箕子淡定如尘、低调的人格魅力,他的精神如同一块无法磨灭的丰碑,深深影响着后世。
2011年11月,我随文物旅游局的朋友探访了这个古迹,尽管环境凄凉,但箕子墓的存在提醒我们,真正的价值不在于墓葬的规模,而在于他所代表的仁德精神。
(번역-2) 한국인의 조상인 기자의 가묘 그렇다면 기자는 실제로 어디에 묻힌 걸까요? 현재 산동성 조현 밀밭에 기자묘가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봉지 조선에서 주 무왕에게 문안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북박(北亳)을 지나 미자와 함께 조상 묘를 참배 중 고된 여정과 정신적인 피폐로 세상을 떠났고, 미자는 숙부 기자를 박(亳) 서쪽, 상탕(商湯)의 무덤 맞은편에 묻었는데 그곳은 불과 10km 떨어져 있었습니다.
실제로 기자릉의 소재지는 기록상 논란이 많으며, 중국 내에서도 최소 아래 세 곳의 기자릉 소재지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현재로는 산동성 조현의 기자릉 만이 비교적 풍부한 사료를 보유하고 있어 가장 유력하다고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한 산동성 거야시 조현(曹縣)이고, 두 번째는 하남성 상구(商丘)시 양원구에 있고, 세 번째는 산서성 로성시 미자진 자북촌(潞城市微子镇子北村)입니다.
대부분의 문헌들은 기자의 무덤이 옛 몽성(蒙城)이 현재의 상구시에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자의 무덤 위치에 대해서는 산동성 조현이나 산서성 로성현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주류 역사 문헌에서는 오늘날 상구시에 해당하는 옛 도시 몽현의 고성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자의 정확한 매장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성인을 기리고 존경하는 마음, 그리고 기자가 대표하는 전통적인 중국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자와 그가 구현한 문화 정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대 송나라 땅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용 끝)
위 답사기를 쓴 사람들은 분명 로성현 미자촌에 기자묘가 있다고 증언했다. 이후 최근에 그 무덤에 묘비도 새로 세웠고 무덤의 봉분도 원래보다 약간 더 크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까지 구할 수는 없었으나 A.I에게 무덤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몇 장의 그림 중 가장 유사할 걸로 예측되는 무덤이다.
이 말은 로성에 기자묘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물증이 아니겠는지? 그런데 여러 사서의 기록으로 볼 때도 산동성 조현과 하남성 상구에 있다는 기자묘는 가짜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는지 다음 연재에서 밝히겠습니다. 많이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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