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족매국행위자를 칭송하는 부여시 (2부)
백제 멸망의 원인은 물론 나당연합군의 침략과 강성함에 있었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웅진 방령 예식진이 웅진성으로 피신해온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바침으로써 백제가 그 구심점을 잃었기 때문이고, 또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당나라 편에 앞장서서 백제의 복국(復國)을 와해시켰기 때문이다.
반역자 예식진은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궁궐의 경비와 호위를 담당하는 정3품 벼슬에 해당하는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에 제수되어 활동하다가 58세에 죽었다. 사서 기록에 별다른 공이 없는 예식진이 당나라에서 이민족으로 정3품 벼슬까지 오른 이유는 그의 묘비명에는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의자왕 체포’라는 엄청나게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부여융은 의자왕이 당나라로 압송될 때 같이 끌려갔다가 당나라로 전향해 사가경이라는 벼슬을 제수 받는다. 그는 당나라 장수 유인궤와 함께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백강으로 가서 왜선 400척을 불태우는 대승을 거두는데 큰 공을 세운다. 백강 전투에서의 대패에다가 백제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흑치상지마저 당나라에게 투항함으로써 700년 역사의 백제는 복국의 꿈을 접고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당나라는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임명해 남은 백성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고 신라와는 화친하게 했다. 부여융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과 함께 665년 2월 신라 문무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나누어 마시는 맹세를 하고 맹세문을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백제의 선왕(의자왕)은 순종과 반역의 이치에 어두워 이웃과의 선린관계를 돈독하게 하지 않고 사돈과도 화목하지 못했다.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도 상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한 행동만 일삼는 동시에 신라를 침략해 편안한 날이 거의 없었다. 이에 천자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의지할 곳을 잃으면 이를 가엽게 여기고 백성들이 고생함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일렀다.
그럼에도 백제는 험한 지형과 거리가 먼 것을 믿고는 천자의 가르침을 무시했기에 황제가 크게 노하여 삼가 죄를 물은 것이다. 깃발이 향하는 곳은 한 번의 싸움으로 크게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그 궁궐을 늪으로 만들어 후대에 경계로 삼고, 또 그 뿌리를 뽑아 후세에게 교훈으로 삼았어야 했다. 그러나 순종하는 자를 품에 안고 배반하는 자를 응징하는 것은 선조 왕들의 아름다운 법도요,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지는 대를 이어주는 것은 옛 성현들의 통상적인 규범이니라.
‘일는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 옛 책에 전해오기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옛 땅을 지키게 하려 하니, 신라와 서로 의논해 길이 우방이 됨과 동시에 지난날의 묵은 감정은 풀고 새로이 좋은 화친을 맺을 것이며, 각각 천자의 명을 받들어 영원히 속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유인원을 보내 친히 권유하고 천자의 뜻을 알리노니, 부디 두 나라는 혼인을 언약하고 맹세의 뜻으로 희생제물을 잡아 그 피를 마시고 시종일관 함께 돈독해져 재앙과 환란도 같이 나누고 걱정하며 은혜로운 뜻을 형제와 같이 할지어다. 황제의 명을 잘 받들 것이며, 맹세한 뒤로는 서로 지조를 지켜야 할 것이다.
만약 맹세를 어기고 딴 마음을 품어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한다면, 천지신명이 굽어보시고 온갖 재앙을 내려 자손을 기르지도 사직을 지키지도 못하게 할 것이며, 제사가 끊어져 후손이 없어지도록 할 것이다. 이에 철판에 이 글을 새겨 금가루를 입혀 종묘에 보관하니 자손만대에 감히 어기지 말지어다. 신이여, 이 말을 들으시고 차려진 음식을 드시고 복을 내려 주소서”라는 내용의 글이다.
이렇듯 부여융은 자기 혼자 잘 살겠다고 조국을 멸망시키고 부왕(의자왕)에게 치욕을 안겨준 당나라와 신라에게 빌붙어 조국의 복국운동을 저지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백강전투에서 당나라가 대승을 거두는데 수훈을 세우고, 백제 복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흑치상지를 회유시킴으로써 그의 조국 백제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만고의 역적이었다. 게다가 조국을 멸망시킨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당나라 장수와 신라 문무왕을 만나 백마의 피로 맹약을 맺는 등 그야말로 민족반역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부여융의 묘지석이 1920년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되었다. 1995년 부여군은 의자왕의 무덤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 결국 낙양시 맹진현 부근에서 의자왕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곳을 확인하는데 성공은 했으나 목관의 흔적과 지석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중국으로부터 의자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의 흙과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을 한국으로 가져와 부여시에 의자왕릉과 부여융 묘를 조성했다.
민족반역자 부여융의 무덤을 왜 부여시가 예산을 들여 조성했는지 모르겠다. 부여융 묘지에 있는 설명문에는 “내용은 부여융의 이름과 자 및 출신지, 무왕과 의자왕이 당으로부터 받은 관작과 품성, 부여융의 품성과 학력 그리고 지혜와 더불어 백제 멸망 후 일어난 부흥운동과 당에서의 활동, 타계한 후 장사한 내용, 생애에 대한 칭송, 大唐故光祿大夫行太常卿使持節 熊津都督帶方郡王扶餘君墓誌란 제액이 다른 묘지명과는 달리 맨 끝부분에 적혀있다.”라고 되어 있다.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에 빌붙어 조국의 복국을 앞장서서 방해한 민족반역자에게 국민의 세금을 들여 묘지를 만들어주고 ‘생애에 대한 칭송’이라는 문구까지 쓴 부여시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당시 관계자가 이완용 같은 친일매국노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몰상식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반민족매국행위를 칭송하는 나라가 어찌 애국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부여시는 당장 부여융의 묘지를 파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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