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邦의 죽마고우 연왕 노관의 망명 (6부)
중국은 산서성 남부가 주 활동무대였던 기자(箕子)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산동성 조현에 가짜 묘를 만들어놓았다. 또한 산서성 남부 로성(潞城)이 봉지(封地)였던 송나라 시조 미자(微子)의 묘도 발해(대야택) 남부 지금의 산동성 제녕시 미산(微山)현과 하남성 상구(商丘)에 조성해놓았다. 물론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역사 왜곡들은 대륙의 동쪽을 차지하고 있던 고려의 강역을 지우고 대신 송나라의 영토를 뻥튀기하기 위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으면 미자의 묘를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굳이 옮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미자의 봉지였던 로성 현지에서는 미자진에 미자의 묘 유적이 있다고 한다.
기자의 묘 관련 기록인 “양(梁)나라 몽(夢)현 북쪽에 있는 박(亳)성 가운데에 성 탕왕의 무덤이 있고 그 서쪽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와 송나라 왕상(王象)의 『여지승기(舆地胜记)』에 "기자의 무덤은 송성(宋城)현 북쪽 41리 20보 떨어진 옛 몽성(夢城) 안에 있다.”는 문구에서 몽성 남쪽에 있다는 송성을 상구로 인식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기자를 매장할 당시 송성은 미자의 봉지인 산서 동남부 로성(潞城)이지 않은가!
다행인 것은 청나라 강희제 때 발간된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제335권에 "기자의 무덤은 로성현 동쪽 15리 떨어진 미자촌 북쪽에 있다. 미자촌 동쪽에 삼인묘가 있는데 이곳을 기자묘로 말한다.”라는 문구가 아직도 남아있다가 A.I로 인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왜곡에 완전범죄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 하나의 예로 기억될 것이다.
중국이 기자를 통해 왜곡하려고 했던 또 하나의 역사는 실로 엄청난 사건을 조작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바로 동이족의 주 활동무대 즉 우리의 역사강역을 대륙 밖으로 밀어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이 어마무시한 음모에 애꿎은 기자가 차출•동원되었던 것이다. 어떤 음모인지 아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기로 하겠다.
한 고조 劉邦의 죽마고우 노관의 망명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한 한 고조 劉邦은 세상이 안정되자 창업공신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권력욕에 눈이 먼 여후(呂后)의 농간이 크게 작용했다. 劉邦은 얼굴이 새처럼 생겨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속설이 있어서 그런지 의심이 많고 자기보다 뛰어난 부하의 재능을 시기한 나머지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가장 대표적인 숙청 대상은 항우를 물리친 명장 한신(韓信)이었다. 劉邦의 통일에는 군사적으로 한신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력한 경쟁자 항우가 없어졌다 보니 劉邦에게 한신은 이제 자신의 권력을 빼앗을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된 것이다. 결국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한신은 참수되고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토사구팽은 원래 전국시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범려(范蠡)가 월왕 구천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한 말이다. 한신이 이를 인용해 “과연 사람들의 말대로다. ‘빠른 토끼가 죽으면 좋은 (사냥)개는 삶기고, 나는 새가 떨어지면 좋은 활은 넣어두고, 적국이 깨지면 모신은 죽는다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마땅히 삶기겠구나!(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라고 한탄한 말이다.
한신뿐만 아니라 그에 버금가는 전공을 남긴 팽월(彭越)과 경포(黥布)도 예외는 아니었다. 팽월은 고기가 소금에 절여져 그릇에 담겨 제후들에게 돌려졌다. 가장 강력했던 장수 셋을 제거하고 난 후 이제 고조의 칼날은 친구인 연왕 노관을 겨냥하고 있었다. 다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노관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劉邦과 노관은 부친끼리도 절친한데다가 본인들도 한날한시에 태어나 함께 자란 죽마고우(竹馬故友)였기 때문이다. 노관은 劉邦이 거병하기 전부터 매일 함께 지냈으며, 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그의 장군이 되었고 항상 시중을 들어 劉邦은 다른 신하들보다 훨씬 노관을 총애했다. 劉邦은 신하들의 적극 추천으로 노관을 연왕(燕王)으로 임명했다.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劉邦과 노관이 함께 협공하는 과정에서 “노관이 진희와 흉노와 접촉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고조가 그 사실 여부를 확인코자 노관을 소환했으나 노관은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노관은 당시 한 고조 劉邦이 병들어 여후가 정권을 쥐고 창업공신들을 주살하고 있음을 무척 두려워했는데, 이로 인해 고조는 노관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노관을 반역으로 단정 지은 劉邦은 장수를 보내 연 땅을 수 차례 공격해 노관의 부하들을 사로잡고 흉노와의 국경인 장성까지 압박해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노관은 고조가 쾌차하면 사죄하겠다고 했으나, 병이 악화된 劉邦이 4월에 죽고 태자가 즉위해 여태후의 세상이 되자 노관은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흉노에 투항해 살다가 1년 후에 죽었다.
劉邦의 아들 태자 영이 즉위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유약해 모든 실권은 여태후가 쥐고 여씨의 천하가 되었다. 현실적 역사를 존중한 사마천은 『사기』에서 ‘고조 본기’ 다음 ‘혜제 본기’ 대신에 ‘여후 본기’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참고로 원칙과 명분을 중시한 반고가 쓴 『한서』에는 ‘혜제 본기’로 되어 있다. 연왕 노관의 망명 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노관이 다스렸던 연(燕) 땅은 과연 어디였을까? <저작권자 ⓒ 고구려역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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