燕人 위만의 망명을 받아준 번조선왕 箕準 (7부)
연왕(燕王)은 고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왕족에게 하사했던 칭호 중 하나였다. 한 고조 유방이 자신의 죽마고우 노관(盧綰)을 연왕에 봉했고, 훗날 명나라 영락제가 되는 주체(朱棣)의 왕자 때 칭호도 연왕이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당시 주체가 받은 봉지 북경을 연경(燕京)이라고도 부르는데, 노관 당시 연 땅은 다른 곳이었다.
삼국시대 요동에서 4대에 걸쳐 50년간(189~238) 독자세력을 구축했던 공손연(公孫淵)이 한때 연왕을 자칭했다가 나중에 사마의에게 패해 멸했고, 16국시대에는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과 아들 모용준이 차례로 연왕을 자칭하기도 했다. 스스로 조선왕(朝鮮王)이라 칭했던 모용황은 337년 10월에 나라를 세워 연왕에 올랐는데 역사적으로 전연(前燕)이라 부른다.
노관, 공손연, 모용황이 다스렸던 연 땅은 북경(北京)이 아니라 다른 곳이다. 이는 동천왕 때 고구려를 침공해 환도성을 함락시킨 위나라 장수 무구검(毋丘 儉)의 활동 무대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에겐 관구검의 기공비로 잘 알려져 있으나 무구검이라고 해야 옳다.
235년 위나라는 산서성 남부 문희현이 고향인 무구검을 유주(幽州)자사로 보내면서 도요(度遼)장군을 추가해주었고 이듬해 무구검이 연왕 공손연을 토벌하려 했으나 패했다. 237년 무구검이 사마의와 연합해 다시 진군해 공손연을 멸했다. 그 공으로 무구검은 안읍후(安邑候)에 봉해져 식읍 3,900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무구검이 위나라에게 새롭게 편입된 지역 제후로 봉해진 안읍(安邑)이 바로 연왕을 자칭했던 공손연의 치소(治所)였고 그곳이 대대로 연(燕) 땅이었다. 연경이 지금의 북경이라는 것은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이다.
“안읍현은 하나라 우의 도읍이고, 전국시대 위나라의 도읍이다. 한나라 때 안읍현을 설치했는데, 지금의 하현 안읍현의 땅이다. 후위 때 안읍을 나누어 남안·읍북·안읍의 3현으로 나누었고, 다시 북안읍을 하현이라 했는데 지금의 산서성 하현 북쪽이다. 청나라 때 산서성 해주에 속했고, 민국 때 운성으로 치소를 옮겼다.” (원문) 安邑县 : 夏禹所都,春秋时魏绛自魏徙此,战国为魏都,汉置县,今夏县安邑县之地,后魏分安邑为南安、邑北、安邑三县,旋改北安邑为夏县,故城在今山西夏县北,即后魏分置之县也,清属山西解州,民国移治运城,寻复故,属山西河东道,县境有盐池,为山西省惟一产盐之区,左传谓郇瑕氏之地,沃饶而近盐,即指此地而言,池水不流,凝成固粒,朝取夕复,终无灭损,其利甚溥。 (안읍에 대해서는 https://www.greatcorea.kr/179 참조
번조선에서 왕이 된 기자 후손 6명
은나라 왕족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온 지 약 800년의 세월이 흘러, 36세 후손 기후(箕詡)가 당시 수한이 다스리던 번조선 땅 수유(須臾)에서 살고 있었다. 전국시대 말기에 연나라가 번조선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자행하자, 기후가 오천의 병사를 데리고 가서 수한 왕을 도와 연나라를 격퇴시켰다. (수유에 대해서는 https://www.greatcorea.kr/288 참조)
그러던 중 46세 보을 단군 19년(B.C.323)에 번조선왕 수한이 후사 없이 죽자 기후가 군령을 대행했다. 이때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쳐들어오려고 하니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스스로 번조선왕이라 칭하고는 상국인 대부여(조선) 단군에게 사후 윤허를 받았다. 기자의 후손 기후가 정식으로 번조선의 왕이 되었던 것이다.
정식으로 번조선 왕에 오른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箕煜)이 즉위하고, 기욱이 죽자 B.C.230년에 아들 기석(箕釋)이 즉위하고, 기석이 죽자 B.C.191년에 아들 기윤(箕潤)이 즉위하고, 기윤이 죽자 B.C.172년에 아들 기비(箕丕)가 즉위한다. 기비는 해모수가 대부여를 무너뜨리고 북부여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기비가 죽자 아들 기준(箕準)이 즉위하게 된다.
망명객 위만에게 패하는 번조선 기준 왕
연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그의 부장 위만도 패수를 건너 (번)조선으로 망명했다. <북부여기>에는 “시조 해모수 단군 병오 45년(B.C.195) 연왕 노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부장 위만이 북부여에 망명을 요구했으나 해모수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연왕 노관이 [漢을]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자 위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해 [요동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비어있는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옛 연·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는 왕이 되었으며, 왕검에 도읍을 정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다음 해인 B.C. 196년에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과연 무엇일까? <저작권자 ⓒ 고구려역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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