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왕실의 직계조상은 백제왕족 (4부)
<일본서기>에 의하면, 25세 무열왕이 재위 8년 만에 후사 없이 갑자기 죽자 조정에서는 14세 중애(仲哀)왕의 5대손인 왜언(倭彦)왕을 다음 보위로 추대하기 위해 영접사와 호위무사들을 보냈는데, 멀리서 오는 일행을 본 왜언왕은 자신을 잡으러 오는 병사들로 오인해 지레 겁을 먹고는 산속으로 숨어버려 찾지를 못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다시 57세인 남대적(男大迹)왕을 추대했으나 몇 번을 사양하다가 끝내 즉위했는데 이가 계체(繼體게이타이)왕이다. <일본서기>에 “남대적왕은 응신왕의 5세손이며 언주인왕(彦主人王)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11세 수인(垂仁)왕의 7세손인 진원(振媛)이다.
왕이 어릴 때 부왕(언주인왕)이 세상을 떠나자 모친인 진원이 친정인 고향(高向)으로 돌아가 양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왜 왕실에서 방계혈통이었던 계체왕은 성골(聖骨)인 24세 인현(仁賢)왕의 3녀 수백향(手白香다시라카) 황녀를 정실왕후로 맞아들인다.
이에 대해 일본 고대왕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서는 26대 계체왕 때 왜 왕실의 성씨가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카모토 다로오(板本太郞) 등 일본학자들은 응신(應神)왕의 뒤를 이어 왜왕이 된 16세 인덕(仁德)왕의 혈통이 25대 무열왕 때까지 이어지다가 그 계보가 끊겨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왜 그런 말들을 할까?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에 새겨진 의미는?
계체왕은 도대체 과연 어떠한 인물일까? 지금부터 왜 왕가의 혈통이 바뀌었다는 계체왕이 누구인지에 대해 인물화상경을 통해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 하시모토(橋本)시에 있는 스다하찌만(隅田八幡)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일본 국보 제2호 ‘인물화상경’에는 9인의 인물상과 48자의 명문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 명문은 한·일 고대사의 비밀을 명백하게 밝혀주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의 하나로 그 내용과 일본학계의 통설인 후꾸야마(福山)교수의 판독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 八月 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紫沙加宮時, 斯痲念長壽 遺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해독) “계해년(503) 팔월 십일 대왕(백제 무녕왕)해에 오시사카(意紫沙加)궁에 있는 오오도(男弟,南大迹=계체왕) 왕에게 사마(斯痲=무녕왕)가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2인을 시켜 양질의 백동 200간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노라.”
후꾸야마 교수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계체왕의 휘(이름)인 남대적(南大迹)는 놀랍게도 남동생이란 뜻인 남제(男弟)의 훈인 ‘오오도’와 같은 발음이라고 하면서, 일본학계에서도 남제왕은 26대 계체왕이 확실하다고 했다. 기타 사서에 ‘오오도’와 발음이 비슷한 ‘오호도’의 여러 한자표기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남동생(오오도)을 고의로 지우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후꾸야마교수는 계미년을 A.D 503년으로 단정했다. 그러나 거울을 남동생에게 하사한 사마대왕이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사마(斯痲)는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 무녕왕릉의 지석에 있는 사마(斯痲)와 같은 이름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이 거울은 무녕대왕이 즉위 다음해인 계미년(A.D 503년)에 남동생인 계체왕에게 하사한 일종의 신임장이었던 것이다.
무녕왕은 자신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간지기년(干支紀年)을 사용했다는 것이 무녕왕릉의 지석과 인물화상경에 동시에 나타났다. 당시 거울(鏡)이나 칼(刀)을 하사함은 오늘날의 임명장이나 신임장과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거울이 만들어진 503년으로부터 4년 후인 507년 남제왕의 신상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수백향은 백제 무녕왕의 딸인가?
25대 무열왕이 후사 없이 죽자 호족들에 의해 계체왕이 추대되고, 이미 정실부인과 자식들을 둔 상태였지만 계체왕은 21세 웅략(雄略유랴쿠)왕의 손녀인 동시에 24세 인현(仁賢닌켄)의 3녀이며 무열(武烈부레쓰)왕의 누이인 수백향(手白香)을 왕후로 맞아들인다. 당시 왜 왕실에서 방계혈통이었던 계체왕은 성골인 수백향을 정실왕후로 맞아들임으로써 일종의 정략결혼을 한 셈이다. 현 왕실과의 융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일종의 데릴사위 형태로라도 혈통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백향 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흠명(欽明긴메이)이 27세 안한(安閑 2년 재위)과 28세 선화(宣化 4년 재위) 두 이복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받았으며, 마찬가지로 흠명왕은 이복형인 선화왕의 딸 석희(石姬이시히메)를 왕후로 삼아 민달(敏達비다쓰)왕을 얻었다. 선화왕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으나 모후와 함께 순장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다음 보위에 오르기로 되어 있던 흠명왕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백제왕실의 혈통인 계체왕과 당시 왜 왕실의 성골인 수백향 왕후 사이에 태어난 흠명(긴메이)왕의 혈통이 만세일계(萬世一係)의 전통을 세워가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2001년 아끼히도 현 일왕은 “옛 칸무(桓武: 781~806)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라고 발언했는데, 아끼히도 일왕은 일왕가의 핵심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재야사학자 문정창 선생은 <상게서>에서 수백향을 백제 무녕왕의 딸로 추정해 계체왕이 무녕왕의 사위이고 흠명왕이 외손자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① 이미 기혼자였던 계체가 왕이 된 후 조강지처는 그대로 비로 놓아둔 상태에서, 어린 수백향을 정실왕후로 맞이했다는 것은 수백향이 백제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 ② 수백향이 낳은 태자(흠명)의 이름이 천국배개광정(天國排開廣庭) 즉 ‘천국(상국)이 밀쳐주다'라는 뜻이 되므로 태자가 백제 왕실의 외손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물론 문정창 선생의 주장은 사료적 근거는 없으나 정황적으로 일리가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나이도 그리 많지 않고 8년의 재위기간 뿐인 무열왕이 갑자기 죽은 이유는 포악하여 신하들이 반정을 일으켜 계체왕을 추대한 것으로 보이는데, 만일 그렇다면 어찌 폐주의 누이를 새롭게 추대한 왕의 왕후로 들이고 수백향 왕후 소생인 흠명을 어린 적자(嫡子而幼年)로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신찬성씨록> 등과 같은 기록들로 볼 때 문정창 선생이 주장한 계체왕의 출자가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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