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역사저널

위만의 쿠데타에 패한 준왕이 간 곳은? (8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6/06/03 [16:17]

위만의 쿠데타에 패한 준왕이 간 곳은? (8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 입력 : 2026/06/0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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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히고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 당시 상황이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사서는 <위략>을 인용한 삼국지위서 동이전의 아래 기록이다

 

(원문-1)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 [] 中國亡命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번역-1)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을 연왕으로 삼으니, 조선과 연은 浿水를 경계로 했다.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연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호복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기준(箕準) 왕에게 항복하였다.

 

위만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藩屏(제후)이 되겠다고 을 설득하였다. 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규를 하사하며, 백 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한나라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을 공격하였다. 은 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해설) 사기조선열전에 “(망명한 위만은) ()나라의 옛 땅으로 비어있던 상하장(上下雲障)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眞番朝鮮蠻夷) 및 옛 연(), ()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王儉)에 도읍을 정했다.”는 간단한 기록이 있는데, 망명자에 불과했던 위만이 어떻게 ()조선에서 왕위에까지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다.

 

북부여기시조 해모수 단군 45(기원전 195, 병오)연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雲障)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는 내용이 비슷한 기록이 있다. 

 

(원문-2)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自號韓王.

魏略曰: 其子 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번역-2)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해()로 들어가 한의 땅(韓地)에 살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위략>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韓氏라는 을 사칭하였다. 에서 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의 후손은 절손되었으나, 지금 한인 중에는 아직도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해설) 후한서동이전에는 처음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은 군사 수천 명을 데리고 해()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해 깨고 자립해 한왕(韓王)이 되었고 준 이후에 멸망해 마한인이 다시 진왕이 되었다.(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라는 기록이 있다.

 

북부여기2세 모수리 단군 원년(기원전 194, 정미)번조선왕(기준)은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일찍이 백성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 모두들 풍요롭고 생활이 넉넉했다. 후에 떠돌이 도적떼(위만)에게 패해 ()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後爲流賊敗亡入于海而不還).”고 언급되어있다. 참고로 수유는 기자 이래 후손들이 살던 지명이다.

 

 위 내용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쿠데타를 일으킨 위만에게 패배한 번조선의 기준 왕이 해()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해 깨고는 한왕(韓王)이 되었고 성도 한씨로 바꿨다는 것이다. 한중일 사학계는 천년의 기자조선이 망하고 위만조선이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언어도단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번조선에서 6명의 기씨가 부단군격인 왕을 한 적은 있으나, 단군조선을 반토막 내는 900년 기자조선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위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기준이 도망간 해()라는 곳이 어디인가에 있는데, 이를 바다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식민사학계는 당시 평양에 있던 기준 왕이 위만에게 패해 달아나 황해를 배를 타고 내려와 지금의 전라도 익산 땅에서 한을 세워 이것이 마한(백제)진한(신라)변한(가야)의 한반도 삼한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재야사학계는 번조선의 왕검성을 하북성과 요녕성의 경계인 난하 부근 창려(昌黎)로 보고 있는데, 거기서 기준 왕이 배를 타고 전북 익산으로 왔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강단사학계의 반도사관을 실날하게 비판해야 하는 재야사학이 자기네도 반도사관으로 도로묵 했다는 사실은 왜 알지를 못하는가!

 

게다가 기준이 도망간 를 바다가 아니라 산동성에 있는 라는 지역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는데 지금까지 학자들 간에 서로 해석이 분분했었다과연 이 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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