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후손 기준이 산서 동남부로 들어간 이유 (10부)
위만에게 패한 기준(箕準)의 행적에 대해 <삼국유사> 제1 기이(紀異)편의 마한(馬韓)조에는 “<위지>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이 궁인과 좌우를 데리고 해를 건너 남쪽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마한(馬韓)이라고 했다.(魏志云 魏滿擊朝鮮, 朝鮮王凖率宫人左右 越海而南至韓地 開國號馬韓.)”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위지>의 ‘走入海(해로 들어갔다)가 越海(바다를 건너)로 바뀌고 南쪽으로 갔다는 구체적인 방향까지 추가되어 있다. 이는 왕검성(평양)에서 해(황해)를 건너 남쪽 마한(익산)으로 갔다는 조선왕조의 반도사관과 그대로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에서 각색한 사서이다. 이는 단군조선 대신 고조선(古朝鮮)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새로운 조선이 탄생했으니 단군의 조선에 옛 古자를 붙여 고조선이라 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1206년생이니 고려 때 사람으로 집필 당시에는 새 조선이 없었으므로 고조선이라는 용어 자체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기준이 한의 땅으로 가서 마한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반면에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위만에게 패한 조선왕 준이 海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가, 준의 후손이 끊기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해 진왕(辰王)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지 동이열전>에서는 “준왕이 그의 신하들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해로 들어가 한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이후 위략(魏略)을 인용해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에 남아있던 자들도 그대로 韓氏를 자칭하였다. 준은 해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해가 과연 바다일까? 그리고 조선은 나라일까?
위만에게 패한 기준 왕이 들어간 海는 황해가 아니라 당시 해성(海城)으로 불리던 곳으로, 주나라와 진나라 때 조선(현)에 속했고, 한나라 때는 현토군에 속했다가 후에 낙랑군에 속했다. 동한 때 도위를 설치해 옥저에 봉했다고 한다.(周秦属朝鲜,汉属玄菟,后改属乐浪,东汉置都尉,以封沃沮) (예•옥저의 위치는 https://www.greatcorea.kr/127 참조)
이곳은 바로 기자의 봉지였던 낙랑군 조선현 부근이고, 이후 기씨의 집성촌인 수유(須臾)가 있던 곳이다. 기자의 36세손으로 번조선의 왕이 된 기후(箕詡) 이래 42세손 기준 왕 때까지는 (번조선의) 왕검성에 있다가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들어간 한지가 바로 청주 한씨의 상징인 상당(上黨)군으로 지금의 산서성 장자(長子)현 일대이다.
한준은 시조 기자를 문성대왕으로 모시고 이하 35세 조상까지 모두를 왕으로 추존했다. 번조선의 왕을 지낸 36세 기후부터 41세 기준까지의 6명은 실제 왕(부단군)이었다. 이것이 훗날 조선왕조에 의해 허구의 900년 기자조선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준의 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후한서>에 의하면, 한왕 준 이후에 손이 끊겨 마한이 다시 진왕(辰王)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청주 한씨 대종회에 의하면, 마한(馬韓) 원왕(元王)에게는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의 아들 셋이 있었는데, 나라가 쇠하자 우평은 고구려로 가서 북원 선우씨(北原鮮于氏)가 되고, 우량은 신라로 가서 상당 한씨(上黨韓氏) 즉 청주 한씨가 되었고, 우성은 백제(百濟)로 가서 덕양 기씨(德陽奇氏)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기자 이후 기씨 집안의 활동무대가 산서 남부 또는 하내군 지역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역사를 조작했던 것이다. 900년 기자조선은 허구로 없었으며 - 번조선에서 6명의 기씨가 148년간 왕(부단군)을 한 것이 전부였으며, - 그 지역 또한 한반도가 아니라 바로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 일대였던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로성(潞城)의 기자묘(箕子墓)와 능천현(陵川縣)에 있는 기자산(箕子山)인 것이다.
10부작 ‘기자의 활동무대는 어디인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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