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역사저널

미천태왕이 정벌한 남소성은 어디인가? (2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6/07/19 [09:52]

미천태왕이 정벌한 남소성은 어디인가? (2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 입력 : 2026/07/1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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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9월 미천태왕이 친히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한 현토(玄菟)는 당시 고구리의 땅이었고, 현토에 주둔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남소성을 공격해 빼앗았다고 <고구리사초·>에 기록되어 있다. 미천태왕이 친정해 남소태수 경창의 목을 친 것으로 보아 당시 경창이 서진을 추종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을 <삼국사기>에서는 “3(302) 가을 9,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해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했다.”라고 간단하게 기록하는 바람에 한··일 삼국 사학계가 이 기록을 근거로 이 당시까지 한사군의 하나인 현토군이 한반도에서 400년간 계속 존재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 일제 식민사학에 의해 조작된 400년 한반도 한사군   © 고구려역사저널

 

<고구리사초·>에 기록된 남소성의 연혁

 

먼저 남소성의 연혁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원왕 15(345) 겨울 10월 연왕 모용황이 모용각을 시켜 공격해 와서 남소(南蘇)를 빼앗아 파수병을 두고 돌아갔다.”라는 짧은 기록만이 있을 뿐이나, 문맥으로 보아 남소성은 당시 고구리의 땅이었던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고구리사초·>에는 남소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많은 기록들이 있다.

 

* “대무신제 9(36) 병신 12, 구다 왕 후린이 개마가 멸망했음을 듣고는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섬니의 아들인 후린은 연나부를 락문에게 넘겨주었지만, 속으로는 뒤집을 생각이 있었다. 소쾌가 죽자 구문을 돕고는 서하와 남구를 정벌하기로 약속했었으나, 이 일이 발각되어 나라가 통째로 고구리에게 거두어졌고 그 도읍도 남소(南蘇)의 차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고구리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이 모두 열리게 되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후린이 다스리던 구다국의 도읍이 고구리의 남소 땅에 흡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신명선제 14(86) 을유 5월 남소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태조황제 4(115) 을묘 2, 서하(西河)남구(南口)하성(河城)안평(安平)장령(長岺)토성(菟城)둔유(屯有)평곽(平郭)고현(高顯)하양(河陽)남소(南蘇) 등의 성을 고쳐 쌓아 서쪽과 남쪽을 대비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역시 남소는 고구리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언급된 11개 성 하나하나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① <중국백과사전>에서의 서하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서하군은 고대의 위치가 한 곳이 아니다.
①춘추 때 북부 하남성의 동쪽인 준현과 골현의 땅,
②진·한 때 섬서성 진섬협곡의 양안 중 서쪽에 설치,
③당태종 때 산서성 중남부 개체와 평요현 일대였다가 폐하고, 742년 서하군으로 고쳤다가 758년 분주로 복원됐다.
(원문) 西河郡古代所指不一。①春秋卫西境沿黄河,称西河,即今浚县、滑县等地。②魏取秦今陕西黄河沿岸地,置西河郡,则以晋陕间黄河为准,西岸为西河。③汉时西河郡是汉代名郡,西汉初由上郡析出,地在今黄河晋陕峡谷两岸。④贞观元年省介州,以介休、平遥二县来属,文水还并州。十七年以废吕州之灵石来属。④天宝元年改为西河郡,乾元元年复为汾州。 
 

② 남구는 상곡군에 속한 거용관의 남쪽 입구의 땅의 고지명이다(南口之地当居庸关南之口, 故名, 后魏曰下口, 北齐曰夏口, 元时始称南口, 有城)”라는 설명과

<한서지리지>“(유주의) 상곡군에 속한 거용현에 관문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남구는 상곡군에 속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上谷郡 상곡군) 秦置莽曰朔调属幽州(속 유주)户三万六千八口十一万七千七百六十二县十五沮阳莽曰沮阴泉上莽曰塞泉莽曰树武军都温馀水东至路南入沽居庸有关(관문이 있는 거용현)雊瞀夷舆莽曰朔调亭西部都尉治莽曰博康昌平莽曰长昌广宁莽曰广康涿鹿(탁록)莽曰抪陆且居阳乐水出东南入沽莽曰久居莽曰穀武女祁东部都尉治莽曰祁下落莽曰下忠

 

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이름으로 보아 황하 주변에 있는 성으로 보인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안평군에 대한 설명은 산서성 동남부에 있는 심수현 동북 60(安平郡: 后魏置后废故治在今山西沁水县东北六十里)”라고 되어 있으며, 아래 산상대제 14년 기록에서 보듯이 안평성은 남소성의 서쪽에 있는 성이다.

장령에 대해서는 장령현은 당나라 때 발해군의 장령부의 땅이다(长岭县: 唐时渤海长岭府地)”이라는 설명으로 보아 당시 유주의 발해군이 있던 산서성 동남부로 보인다.

토성은 현토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는 <환우기>에서 언급한 寰宇记菟氏城在尉氏县西北四十里의 토씨성(菟氏城)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토씨성은 황하 남부 개봉시 남쪽에 있는 위씨현이라 하므로 아닌 것 같아 보인다.

 

둔유는 낙랑군에 속한 현 이름이고 현재 산서성 동남부에 있는 둔유(屯留)현이 확실하다.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속 유주)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둔유)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평곽과 고현과 서안평은 <한서지리지>에 유주의 요동군에 속한 현들로 기록되어 있다.

(辽东郡 요동군) 秦置属幽州(속 유주)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고현)安市(안시현)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평곽현)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현)莽曰北安平莽曰文亭番汗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하양성에 대한 아래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은 하양에 남성, 북성, 중단성의 3성을 쌓았는데, 현재 황하북부 하남성 초작시 맹현(맹주시)이다.”라고 한다.

 

(河阳三城 하양삼성) 在今河南孟县元魏北齐之际于河阳筑南城北城中潬城三城唐置河阳三城使以附近各县租赋入之视为重地李光弼保此以御史叫明旋改置节度使宋以后废,《河南通志北城后魏太和中筑齐使潘乐镇于此今孟县是也又使高永乐守南城以备西魏今孟津是也中潬城东魏元象元年筑今夹滩是也

 

▲ 태조황제 4년(115) 유주에 쌓은 11개성의 위치는 모두 산서성 남부


* “산상대제 14(210) 경인 3, 공손강이 서안평에 쳐들어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하양성(河陽城)은 물가에 있어 지키기 어려워, 남소성(南蘇城)의 서쪽에 있는 안평성(安平城)의 북쪽에 새로이 신성(新城)을 쌓아 공손강을 꼼짝 못하게 했다.”라는 기록에서 안평성은 남소성의 서쪽에 있고 안평성의 북쪽에 신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동양대제 12(238) 무오, 위나라의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 함께 연()을 멸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주희에게 명해 5천병을 이끌고 남소(南蘇)로 출병하고 관망하여 성원하라 했다. 8월에 공손연을 멸하였더니,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방자해졌다. 상이 대노하여 사마의와의 교통을 끊었다.”라는 기록에서 남소성은 당시 고구리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소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남소성(南蘇城)은 일명 동요하(東遼河)라 불린 남소수가 흐르는 곳에 있는 성이다. 남소수는 아래 <한서지리지>에 유주의 현토군에 속한 고구려현을 흐르는 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고구리의 땅이었던 남소성은 현토군에 속한 성으로, 관구검의 침공 때 잠시 잃었다가 서로 뺏고 빼앗겼던 격전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번역) 현토군 : 한나라 무제 4년에 설치했다. 고구려현을 왕망이 하구려현이라 불렀다.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45,006, 인구는 221,845, 고구려현, 상은대현, 서개마현의 3개현이 있다. 고구려현의 요산은 요수가 나오는 곳이고 서남쪽으로 요대까지 흘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역시 남소수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요새 밖으로 흘러간다. 상은대현은 왕망이 하은이라 했다. 서개마는 왕망이 현토정이라 했다. 마자수(압록수)는 서북으로 염난수에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2개 군을 지나고 2,100리이다.

 

(원문) 玄菟郡 : 武帝元封四年开高句骊(고구려)莽曰下句骊属幽州户四万五千六口二十二万一千八百四十五县三高句骊辽山辽水所出西南至辽队入大辽水又有南苏水(남소수)西北经塞外上殷台(상은대)莽曰下殷西盖马(서개마)马訾水西北入盐难水西南至西安平入海过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 산서성 남부와 하남성에 있던 낙랑·현토군의 이동


남소성은 유주에 속한 현토군 지역을 흐르는 강에서 지명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남소성의 대략적인 위치는 유주 즉 산서성 남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해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남소성에 대한 설명을 아래에 인용하는데, 지금의 요녕성 흥경현이라는 설명은 왜곡된 설명이다.

 

(번역) 남소성 : 요녕성 흥경현 경계에 있다(역사왜곡).

고구려현이 치소이다. 진나라 영화 원년(345) 연왕 모용황이 고구려현을 공격해 빼앗았다가 돌아왔다. 당나라 건봉 2(667) 설인귀가 고구리를 깨고 남소·목저·창암의 여러 성을 빼앗았다. 현경(고종) 중에는 남소주를 설치했다가 후에 폐했다. <청일통지>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소주의 안복군을 고구리 남소주라 했다. 소주는 즉 지금의 금주이다. <한서지리지>를 살펴보면 고구려현에 남소수가 있고, 고구리가 강 이름에서 가져와 성을 설치했다. 신성 동남 지금의 흥경의 경계에 있고, 금주에 없다.

 

(원문) 南苏城 : 在辽宁省兴京县界高句骊置晋永和元年燕王皝使慕容属攻高句骊拔南苏置戍而还唐乾封二年薛仁贵破高丽拔其南苏木底苍岩诸城显庆中置南苏州后废,《清一统志按辽志以苏州安复军为高丽南苏州苏州即今金州也今考汉志高句骊县有南苏水高丽置城盖因此为水名在新城东南今兴京界不在金州

 

또한 <통감주>신성 서남쪽에 방산이 있고, 동북쪽으로 남소성·목저성 등과 접한다(通鉴注新城西南傍山东北接南苏木底等城)”라는 기록에서 남소성은 신성(新城)의 동북쪽에 접하는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으면 저절로 남소성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연재에 신성(新城)과 남소성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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