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동천왕 때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신도현이다.지금의 황하 강변 하남성 온현에 있는 ‘패수浿水’가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2)고구려 동천왕 때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신도현이다.지금의 황하 강변 하남성 온현에 있는 ‘패수浿水’가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2) ※ 이 글은 현재 쓰고 있는 책의 중요부분 중의 하나이다. 7월 18일 토요일 구리시 강연에서 사용된 프리젠테이션의 원고이기도 하다. 복잡한 부분이 많이 있어 여기에 전재하여 게시한다.
한편, [삼국지 권 47 오서 오주전]에서는 고구려 동천왕의 수도는 안평으로 나온다.(주219) 고구려 동천왕이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으로 수도인 환도성이 훼손되자 평양으로 종묘사직을 옮겼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동천왕편]에 나온다. (주220) [삼국지 오주전]의 안평이 [삼국사기 동천왕편]의 평양성임이 분명하다. 안평은 [진서 지리지]상의 기주 안평국이거나, 박릉군 안평현이다. 그러므로 평양성은 [진서 지리지]상의 기주 안평국이거나, 박릉군 안평현인 것이다.
평양 남포 덕흥리 고분에 묻힌 ‘유주자사 진’의 고향이 기주 안평국 신도현임에 주목하자. 안평국의 수도가 신도현이다. 즉 ‘유주자사 진’은 고구려 평양 사람으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신도현에서 태어났고, 그의 무덤은 지금의 한반도 평양시 인근 남포 덕흥리에 있다. 고구려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요녕성일대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거대 제국이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덕흥리 묵서]에서 거리의 기준이 낙양임에 주목하자. [덕흥리 묵서]에 의하면 유주는 13군郡 75개의 부와 현으로 구성된다. 유주의 치소는 광계현으로 당시 연국의 치소이기도 하다. 광계현은 낙양에서 2300리 떨어져 있다.(주221)
십리를 4㎞로 계산하면 920㎞이다. 낙양에서 920㎞ 떨어진 도시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이다. 낙양에서 당산까지 세갈래 고속도로가 각 921, 925, 935㎞이다.
고구려의 수도가 낙양이 아닌데 왜 낙양을 기준으로 유주의 치소까지 거리를 표기했을까? 혹시 고구려의 수도가 낙양이 아닐까?
중국은 고대로부터 너무 역사를 이해하기 힘들게 기록하고 있어 조작의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하여 정권을 지속했음이 중요한 의미를 줄 수 있다. 북위와 고구려가 사실상 같은 민족 같은 연방 국가라면 낙양을 고구려의 수도로 생각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북위는 탁발선비이며 전연과 후연, 즉 연나라는 모용선비이다. 선비는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였음은 여러 역사책에 나온다. 모용선비의 사실상의 시조 모용외와 모용황은 ‘조선공’이라는 작위를 사용했다. 한편 공손씨의 연나라는 요동군 양평현이 치소였다. 공손연의 연나라는 위나라 사마중달에 의해 멸망했다. 모용선비의 연나라가 공손연의 연나라를 계승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같은 ‘연燕’ 글자를 사용한다.
덕흥리 고분 발굴의 의의는 매우 크다. 먼저 일제 강점기가 아닌 1976년에 북한 단독 발굴되어서 조작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둘째로 유주자사 진이 영락 18년에 고분에 묻혔다고 함으로 광개토왕 비에 나오는 연호 ‘영락’이 증명되었다. 실제 광개토왕비의 진위여부 논란으로 고구려왕들이 연호를 사용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지금도 심하다. [삼국사기]에 모든 고구려 왕의 연호는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덕흥리 고분]에 나오는 13개 군국의 이름은 [진서 권14 지리지 상, 권15 지리지 하]와 일치하지 않는다. (계속) 주221) 〈前室 西壁 上端〉 此十三郡 屬 幽州 部縣 七十五. 州治廣薊 今治 燕國 去 洛陽 二千三百里 都尉 一部 幷 十三郡 [덕흥리 고분 묵서] 주220)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기다 ( 247년 02월(음) )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동천왕편] 주219) (233년) 嘉禾 二年 春正月,詔曰 (중략) 是歲,權向合肥新城,遣將軍全琮征六安,皆不克還。〔四〕 〔四〕 吳書曰:初,張彌、許晏等俱到襄平,官屬從者四百許人。淵欲圖彌、晏,先分其人眾,置遼東諸縣,以中使秦旦、張群、杜德、黃疆等及吏兵六十人,置玄菟郡。玄菟郡在遼東北,相去二百里,太守王贊領戶二百,兼重可三四百人。旦等皆舍於民家,仰其飲食。積四十許日,旦與疆等議曰:「吾人遠辱國命,自棄於此,與死亡何異?今觀此郡,形勢甚弱。若一旦同心,焚燒城郭,殺其長吏,為國報恥,然後伏死,足以無恨。孰與偷生苟活長為囚虜乎?」疆等然之。於是陰相約結,當用八月十九日夜發。其日中時,為部中張松所告,贊便會士眾閉城門。旦、群、德、疆等皆踰城得走。時群病疽創著膝,不及輩旅,德常扶接與俱,崎嶇山谷。行六七百里,創益困,不復能前,臥草中,相守悲泣。群曰:「吾不幸創甚,死亡無日,卿諸人宜速進道,冀有所達。空相守,俱死於窮谷之中,何益也?」德曰:「萬里流離,死生共之,不忍相委。」於是推旦、疆使前,德獨留守群,捕菜果食之。旦、疆別數日,得達句驪(王宮),因宣詔於句驪王宮及其主簿,詔言有賜為遼東所攻奪。宮等大喜,即受詔,命使人隨旦還迎群、德。其年,宮遣皂衣二十五人送旦等還,奉表稱臣,貢貂皮千枚,鶡雞皮十具。旦等見權,悲喜不能自勝。權義之,皆拜校尉。閒一年,遣使者謝宏、中書陳恂拜宮為單于,加賜衣物珍寶。恂等到安平口,先遣校尉陳奉前見宮,而宮受魏幽州刺史諷旨,令以吳使自效。奉聞之,倒還。宮遣主簿笮咨、帶固等出安平,與宏相見。宏即縛得三十餘人質之,宮於是謝罪,上馬數百匹。宏乃遣咨、固奉詔書賜物與宮。是時宏船小,載馬八十匹而還。[삼국지 권47 오서 2 오주전] http://www.guoxue123.com/shibu/0101/00sgzf/04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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