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역사저널

“새 고려사는 예사(穢史)” (1/2부)

역사는 승자의 기록

한눌 한문수 | 기사입력 2026/07/26 [12:25]

“새 고려사는 예사(穢史)” (1/2부)

역사는 승자의 기록

한눌 한문수 | 입력 : 2026/07/2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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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고려사는 1392년 편찬을 시작, 62년만인 1454(단종 2) 간행됐다. 이로부터 566년 지나 문화재청은 2021217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했다. 고려사는 세가(世家) 46, 열전(列傳) 50, () 39, 연표(年表) 2, 목록(目錄) 2권 등 모두 1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서는 전 왕조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왕조에서 전 왕조의 역사서를 기전체로 편찬하는 전통이 있어왔다. 그렇게 편찬된 전대 왕조의 역사서를 正史라 한다.

 

 숱한 난제 속에서 편찬된 고려사를 정사라 하여 내놓았으나, 그 신뢰성에 의문을 떨쳐 버릴 수는 없다. 그 이유는 편찬과정이 심각하게 왜곡되었으며, 참고자료로 써진 고사서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 진위를 모르게 덮어 버렸다는데 있다. ‘흔적도 없다란 말은 불 질러 없앴다라는 뜻으로 함축된다.

 

 대륙에서 본 고조선 하늘의 별자리가 반도의 별자리로 둔갑된 천상열차분야지도처럼 승자의 기록이 정당화되어 인정받는 속성 때문일 것이다. 흔히 인간은 정보를 기억하는 능력과 더불어 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첫 간행 때도 시시비비가 많았다는 기록이 살아있음에도 애써 잊어버리려는 욕구가 천년 세월을 외면하여 망각의 늪으로 빠져 드는 것은 아닌가 안타깝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논리는 그들의 쓸 권리 행사였다. 개국공신들의 막강한 힘 앞에 사관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조선은 고려실록과 고려말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민지(閔漬)의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를 고려사 편찬의 주요 참고자료로 삼았다.

  1392년 개국과 함께 고려사 편찬에 착수한 정도전 등은 1395(태조 5) 이제현의 사략(史略), 이색과 이인복의 금경록(金鏡錄)을 모아 37권의 고려국사(高麗國史)와 진고려국사전(進高麗國史箋),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를 편찬했다.(국조보감 제5) 자료집 성격이었다. 그러나 편찬 자료는 현존하지 않는다.

 

 편찬과정을 살펴보자

 1392년 착수, 1414년 개수, 이후 141992차 개수, 1423년 제3차 개수, 14384차 개수하여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 했다. 그러나 1446년 세종은 지나치게 고려왕조를 깎아내렸다 하여 5차로 개찬했다. 재위 32년 노심초사하여 편찬했다던 고려사는 세종 사후인 1451(문종 원년) 8월에서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완성되었다는 고려사는 3년 후인 1454(단종 2) 검상(檢詳) 이극감(李克堪)이 당상(堂上)에서 고려전사(高麗全史)가 출간되면 사람들이 모두 시비(是非)를 알까 두려워하여 다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만을 인간(印刊)하여 반사(頒賜)하고, 고려전사는 조금 인간하여 다만 내부(內府)에만 간직하였습니다” (단종실록 1013)라는 황당한 이 보고서를 보면, 고려사 내용이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를 보여준 극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는 고려전기의 용어에서 국왕의 기록을 본기(本紀)가 아닌 세가(世家), 帝王에 관련된 용어는 모두 삭제하여 이라고 하였으며, 皇后王后, 皇子王子로 바꾸어 기록하였다. 이처럼 정도전이 황제국의 용어를 제후국 용어로 바꿔놓은 사실을 윤회가 세종에게 보고된다. (6811일 춘정속집 제4)

 

 조선은 고구려, 고려처럼 천자(天子, 大王)나라가 아니라 명의 제후국()을 자처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의 그 찬란했던 경전과 문화서적을 전부 태워버리고, 명 숭상 사대주의 토대를 구축한 장본인이 세종이었다.

 

  “지나치게 고려왕조를 깎아내렸다하여 5차 개찬을 명한 세종은 정도전이 편찬의 주요 참고자료로 삼았다는 고려의 사서들을 왜 없앴을까?. 고려실록은 고려왕조실록(高麗王朝實錄)으로 고려 왕조에서 편찬한 실록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부터 34대 공양왕까지 474년간(918~1392)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였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어 현전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나 1414년 개수 당시 황제국 고려의 위상과 찬란했던 문화와 방대한 역사서, 영토 기록이 사실적으로 담기가 두려웠던 것은 아닌가?.

 

 예를 보자. 1123년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의 창고마다 서책이 가득하여 헤아리기 어렵다고 했다또한 기서(奇書)와 이서(異書) 많으며, 나라는 이중 128()을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해동역사(海東繹史)고려의 임천각(臨川閣)은 회경전(會慶殿)의 서쪽 회동문(會同門) 안에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장서(藏書)가 수만 권이나 된다고 썼다. 1103년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총 361개의 고려 어휘가 보인다.

 

 고려 잔재 말살과 편찬과정에서 오는 논쟁거리를 말끔히 없애고자 이러한 사실(史實) 관계는 무시했다. 거리낌 없이 그리고 서서히 조선조 내내 진행된 고사서 말살은 사대주의 신봉자들과 정권에 아부하는 상하간 부하뇌동이었다.

 

 

또 한 예를 보자. 

 「고려사(高麗史)의 서문에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은 고려태조(太祖)5대 조상인 호경대왕(虎景大王)으로부터 고려 24대왕인 원종(元宗 재위 12591274)에 이르기까지의 사서(史書)로 총 7권이며 세계도(世系圖)를 붙였다고 했다. 6백 년을 되짚어 볼 수 있는 방대한 고려 역사다.

 

 또한 고려 왕실의 가계도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이 왜 조선 후기인 1798(정조 22)에 와서야 편찬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406년 동안 비밀 속에 감추어진 내막이다. 상식적으로 王系에는 지리지명은 물론 문명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마련이다. 4백여 년 동안 절대자들에 의해 이러한 기록들을 감추고 뭉개기 위해 감시 감독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는 선초(鮮初) 강화도와 삼척, 거제도에서 고려의 왕족과 왕씨들을 몰살, 를 밀살시킨 것(태조실록)과도 무관치 않다. 이는 구전으로 나마 후대에 전해질 역사를 차단시키기 위한 전략적 방편으로 보인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를 보자. “천수 태조(왕건)께서 창업을 바탕으로 고구려가 다물국을 세우신 풍습을 계승하사, 온 세상을 평정하시고, 나라의 명성을 크게 떨치었다고 했다. 고려는 다물의 국시를 계승했고, 이씨조선은 이를 철저히 감추었던 나라다. 한문명은 고려 시대에 절정을 맞이했다. 고려는 한문화, 한문명의 최 절정기를 구가했던 초강대국이었다. 선진사회의 문명인 금속활자, 고려자기를 비롯 높은 수준의 천문학이다.

 

 조선이 본 고려는 황음무도한 나라였다. 선진사회도 아니었다. 최소한 그렇게 몰아가 역성의 당위성을 만들었다. 찬란한 문명을 일구었던 단군조선의 다물정신과 고구려를 이어받은 고려를 뭉개어 파렴치한(破廉恥漢)의 나라로 전락시켰다. 고려사 편찬과정에서 단군을 배제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는 918년부터 474년 존속했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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