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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의 고대국가 야마토(大和)왜를 연 응신(應神오오진)왕의 5세손으로 당시 왜 왕실에서 방계혈통에 속했던 계체왕은 성골인 수백향(手白香다시라카) 왕녀를 왕후로 맞아들여 흠명(欽明긴메이)을 낳고, 그 혈통이 만세일계(萬世一係)의 전통을 세워가며 지금의 일본왕실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시 왜 왕실의 성씨가 바뀌었다고 하는 계체왜왕이 바로 백제 무녕대왕의 남동생이 되는데, 이를 입증하는 증거가 바로 일본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에 있는 스다하찌만(隅田八幡) 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일본 국보 제2호 인물화상경이다. 그렇다면 계체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일본서기>에는 “남대적(=계체)왕은 언주인왕(彦主人王)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11세 수인(垂仁)왕의 7세손 인 진원(振媛)이다. 왕이 어릴 때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모친인 진원이 친정인 고향(高向)으로 돌아가 양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언주인왕하고 백제 무녕대왕의 부왕과는 어떠한 혈연관계가 있을까?
무령대왕의 출생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의 설명이다. 455년에 즉위한 21대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처형당한 475년에 아들 문주왕이 뒤를 잇고, 477년에 문주왕이 죽자 장자 삼근왕이 13세에 즉위했다가 일찍 죽는다. 이후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479년에 즉위했다가 재위 23년에 죽자 그의 둘째 아들인 25대 무령왕이 501년에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웅략 5년(461) 여름 4월 백제의 가수리군(加須利君=개로왕)은 (중략) 아우 군군(軍君=곤지)에게 ‘너는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니 군군은 ‘상군(上君=개로왕)의 명에 어긋날 수는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군의 부인을 저에게 주신 연후에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며 ‘내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월이 되었다. 만일 도중에 출산하게 되면 어디에 있든지 부디 배를 태워 속히 나라로 돌려보내도록 해라’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헤어져 (일본)조정에 보냈다. 6월 임신한 부인은 과연 가수리군의 말대로 축자의 각라도(築紫各羅嶋)에서 출산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도군(島君)이라 했고, 군군은 배 1척을 마련해 어머니와 같이 백제로 돌려보내니 이가 무녕(武寧)대왕이다. 백제인은 이 섬을 국주도(國主島)라고 했다. 여름 7월 군군이 도성에 들어왔을 때 이미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위 <일본서기>의 내용에 의하면 문주와 곤지는 개로왕의 아우이고 무녕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다. 게다가 무녕왕의 이름은 섬에서 태어났다하여 도군(島君)이라고 불렀는데, 島의 일본어 발음이 시마(しま)이다. 무녕왕의 휘인 사마(斯麻)의 일본어 발음 역시 시마(しま)로 발음된다.
또한 공주에 있는 왕릉 지석에 무녕왕은 523년 62세의 나이에 붕어했다고 새겨져있어 무녕왕은 461년생으로 위 <일본서기>의 연대와 정확하게 일치해 무녕왕의 출생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삼국사기>보다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무열(武烈)왕조에 “4년(502) 백제의 말다(末多=동성)왕이 무도해 백성들에게 포학한 짓을 함에 나라사람들이 제거하고 島王을 세우니 이를 무녕왕이라 한다. (백제신찬에 전하기를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왕으로 곤지왕자의 아들로 즉 말다왕의 이복형이다. (중략) 지금 생각하니 시마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말다왕은 곤지왕의 아들인데 이복형이라 함은 미상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무녕왕이 곤지왕의 아들로 동성왕의 이복형일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서기> 웅략(雄略)왕조에 “23년(479)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삼근)왕이 죽었다. 천황이 곤지의 5명 아들 중 2자인 말다(동성왕)가 유년(幼年)임에도 불구하고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로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밀하게 타이르고는 백제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무기를 주고 축자국 군사 500인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가 동성왕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동성왕이 왕위에 오를 때 일왕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정도로 유년의 나이라 했으므로 15세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즉위 후 23년간 재위에 있다가 502년에 죽었으므로 약 37세가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이 죽었을 당시 무녕왕의 나이가 41세였으므로 무녕왕의 나이가 동성왕보다 많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무녕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오기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위 <일본서기> 웅략왕 5년 기록에 무녕왕이 일본으로 가다가 섬에서 태어났을 때 이미 곤지에게 5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했으며, 웅략왕 23년 기록에는 동성왕이 곤지의 5명 아들 중 2째이므로 동성왕의 나이가 무녕왕보다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말다(동성왕)가 유년(幼年)임에도 총명하므로 궁궐로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제의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그야말로 앞뒤가 전혀 안 맞는 이상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어느 기록이 맞는 것일까?
<일본서기> 웅략왕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20년(475) 겨울 고구려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중략) 백제기에서 전하기를 고구려 대군이 와서 왕성이 함락되었고, 국왕 및 대후와 왕자 등 모두가 적의 손에 죽었다. 21년 봄 3월 천황은 구마나리(久麻那利=웅진)를 문주왕에게 주어 나라를 다시 일으키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개로왕의 왕후와 왕자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주왕이 즉위 4년 만에 해구에게 시해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보위에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즉위한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또한 삼근왕 마저 즉위 3년 만에 갑자기 죽었을 때 왕위계승 서열에 있어 훨씬 우위에 있던 개로왕의 사마왕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치고 당시 일본에 있었던 곤지의 2자 말다(동성왕)가 왕자신분이 아니었음에도 다음 보위를 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다음 연재에서 <고구리사초략>을 인용해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백제를 망국의 길로 이끈 개로왕이 벌인 대토목공사에 대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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