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역사저널

“제에서부터 발해를 떠 왔다. 종제 부발해 從齊 浮渤海” 지금의 황하 강변 하남성 온현에 있는 ‘패수浿水’가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3)

“제에서부터 발해를 떠 왔다. 종제 부발해 從齊 浮渤海” 지금의 황하 강변 하남성 온현에 있는 ‘패수浿水’가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3)

이원환 | 입력 : 2026/08/12 [15:56]
  • 카카오톡
  • 네이버
  • 인쇄

제에서부터 발해를 떠 왔다. 종제 부발해 從齊 浮渤海지금의 황하 강변 하남성 온현에 있는 패수浿水가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3)

 

1. “제에서부터 발해를 떠 왔다. 종제 부발해 從齊 浮渤海

옛날 제나라는 지금의 산동성에 있다. “제에서부터 발해를 떠 왔다. 從齊 浮渤海국사편찬위원회는 발해만이 아닌 황해를 건너서 한반도로 한나라의 군대가 공격해 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패수가 흐르는 방향을 제외해 놓고 보아도 [사기 조선열전][한서 조선전]의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한나라가 침공한 지역이 도저히 한반도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 통상 우리는 위만이라 부른다) ‘진번조선만이들과 옛날 연나라와 옛날 제나라 지역에서 온 망명자들의 왕이 된 것이다.

稍役屬 真番朝鮮蠻夷(and) ‘故燕 齊 亡命者’, 王之, 都王險

 

이 문장은 옛날 연나라와 옛날 제나라의 주민들이 대거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지금 중국의 주장대로 옛날 연나라는 지금의 북경시와 동쪽 요녕성 일대에 있어서 한반도 평양시까지 망명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옛날 제나라는 지금의 산동성에 있었는데 산동성 주위의 다른 성으로 망명하지 않고 굳이 목숨 걸고 배를 타서 한반도 평양시 인근으로 대거 망명했다는 희한한 설명을 국사편찬위원회가 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의 조선침공의 명분을 보면 옛날 연나라와 옛날 제나라는 조선과 영토가 접해 있어야 한다.

 

한편, [사기][한서]가 조선침공의 명분으로 기록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동이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지역이며 패수가 흐르는 곳이다. 그런데 요동 가까이에 있는 여러 만이’ (조선과 옛날 나라나 옛날 나라 지역에 있으면서 한나라 입장에서는 이민족을 낮춰 부르는 비칭)들이 요동 지역을 도둑질하고, 때로는 만이들이 한나라 천자()를 알현하러 오는 것을 조선이 방해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 요동태수가 요동 지역 바깥의 만이들을 잘 다스리고 통행을 원활하게 하여 한나라와 만이들이 교통하는 조건으로 위만을 한나라 외부에 있는 한나라의 신하로 삼기로 약속했고, 한나라 왕이 이를 허락했다.

그런데 위만의 손자인 우거때에 한나라 주민들조차 조선으로 망명하고, 다른 만이들이 한나라와 교통을 하는 것을 조선의 우거가 방해하였다. 한나라는 사신 섭하를 보내어 외교적으로 해결하고자 조선을 회유 압박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비왕 ’ (비왕 장을 조선의 태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섭하가 살해했다. 이에 격분한 조선이 요동을 침공하여 섭하를 죽여 복수를 하였다. 한나라는 조선이 요동을 침공하였음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요동 땅 주위에 옛날 연나라와 옛날 제나라가 있어야 함이 명백하다. 옛날 제나라를 지금의 산동성으로 비정하면서 조선의 왕험성을 지금의 한반도 평양시로 비정하는 중국의 담기양등 소위 어용학자들을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가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침공할 당시 한나라의 서울은 현재로서는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라고 한다. 서안시에서 산동반도 바닷가 위해시까지 지금 고속도로로 1,426이다. 옛날 나라 사람들이 1,000이상 떨어진 한나라의 공격을 피해서 조선으로 망명한다는 지리 비정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최소한 조선과, 지금의 서안시가 서울인 한나라와, 지금의 산동성에 있는 제나라, 이 세 개의 지역이 서로 세 개의 원이 서로 맞물리는 것처럼 접해 있어야만, 제나라의 주민들이 조선으로 망명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옛날 제나라를 최대한 한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하도록 서쪽으로 당기면, 한나라와 제나라의 북쪽에 조선이 있어야만 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제나라와 한나라의 남쪽에 조선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과 북방민족의 연관성에 대한 기록으로 볼 때 북쪽에 있음이 명백하다.

결국 한나라와 제나라의 북쪽에 국경을 접한 조선은 지금의 황하 북쪽 연안에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2. 지금의 하남성 온현에 있는 패수浿水

. ‘패수浿水요동지역의 동쪽 끝에 있고 한나라와 고조선과의 국경이었다.

 

기원전 100년 경 편찬된 [사기 조선열전]과 기원후 100년 경 완간된 [한서 조선전]에서 패수浿水요동지역의 동쪽 끝에 있고 고조선과의 국경이었다. “한나라가 들어서고 요동은 멀어서 지키기 힘들다고 여겼다.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까지를 국경으로 하여 요동 지역 중 패수 서쪽까지를 옛날 나라 지역에 속하게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동이 지금의 어디이든지 요동에 패수가 흐르고 패수를 한나라 소속 옛날 연나라 지역과 조선지역의 국경으로 했다는 설명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구절을 정면으로는 절대로 소개하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패수를 청천강이나 대동강으로 비정하여 두 강의 북쪽 땅이 요동 땅이 되어 중국의 [역사지도집][한반도 북부가 한나라의 영역인 걸로 표시되어 전 세계에 배포되는 것을 모른체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등 정부의 잘못이 심각하다.

 

. 559년에 편찬된 [()위서 권106 지형지] (이하 줄여서 [북위서 지형지]라 한다) 회주 무덕군 온현에 패수浿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서][삼국지][위서]와 한자가 같기 때문에 편의상 구분하기 위해 북위서라 부른다.

중국의 [24] 중에서 당 왕조 이전에 존재했던 왕조 혹은 국가 중에서 왕조에 의해 그 왕조나 국가의 역사가 새로 발간되거나 수정 보완 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공식적으로는 수정보완의 이름으로 손을 대었다는 기록이 없는 유일한 책이 [북위서]이다. [24] 중 다른 어느 책보다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사기]를 주석(설명)[사기 정의], [사기 색은]740년 경 당 왕조때 발간된 책이다. [한서]에 주석을 달고 수정 보완한 안사고640년 경 당 왕조 태종의 신하이다. [후한서] 역시 남조의 범엽이 편찬했지만 당 고종의 태자 이현이 680년 경 여러 학자들을 이끌고 수정하고 주석을 달았다. [진서]648년에, [수서]656년에 당 왕조가 발간하였다. [구당서]는 당 왕조가 멸망한 후인 510국시대, 945년에 발간 되었다. 945년 발간 [구당서]1060년 발간 [신당서], 1084년 발간 [자치통감]1145년에 발간된 [삼국사기]가 거의 그대로 베꼈다. 특히 고구려와 중국 왕조와의 전쟁기록 관련해서는 [삼국사기]가 앞서 발간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과 대부분의 한자漢字가 같다.

 

[신당서 권220 동이열전]은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에게 조선군왕이라는 칭호를 내림으로써 고구려 중심지의 위치가 고조선의 중심지의 위치와 같은 곳이며 고구려가 고조선임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다만 위만조선의 중심지 왕험성자체를 지명이동시켰는지 여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뿐이다.

 

또한 [신당서 권220 동이열전]은 고구려 보장왕의 광복운동을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편]은 이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삼국사기] 역시 고구려왕을 조선군왕이라 기록하여 고구려가 조선임을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안동도호부로 바뀐 고구려 수도 평양의 위치는 지금의 한반도 평양이 아닌 것은 확실하며, 지금의 요녕성 요하 부근인지조차 불확실하다. 고구려 유민들을 하남과 농우(지역 이름)등으로 이사시켰다는 기록이 있음에 주목하면,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하북성 어디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559년 발간 [북위서 지형지]에서 회주 무덕군 온현은 지금의 황하 북쪽 연안인 하남성 온현이다. 온현의 이름이 바뀌지 않고 전해져 온 것이다.

회주 무덕군 온현에 패수가 있다는 기록에 주석을 단 청나라 때 학자인 양수경과 온정경은 패수浿水로 인정하지 않고 격수湨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559년 편찬후 당나라 때에 주석을 달거나 수정했다는 기록이 없는 [()위서]는 편찬 당시의 모습 그대로 온전히 전해졌을 가능성이 다른 역사책보다는 크다고 볼 수 있다. 북위 정부가 편찬한 역사책에 역사지리에 있어 중요하지 않은 격수를 삽입했을 가능성은 없다.

 

패수浿水에 주석을 다는 것이지 원문에 나오지 않는 격수에 주석을 다는 경우는 없다. 청나라 말기 대혼란기의 학자들이 굳이 패수浿水에 주석을 달아 격수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패수가 지금의 황하강변이라는 기록에 동조한다면 패수의 동쪽이 조선이 되고, 조선을 이어받은 고구려가 황하 강변에 떡하니 도읍을 한 것을 인정해야 하고, 이로써 청나라의 역사를 전부 새로 고쳐 써야 하는 위기에 처할 것임으로 이를 적극 방어하기 위함이다.

 

 

도리어 이 주석으로 패수는 지금의 하남성 온현을 흐르던 강이 명백한 것임이 입증된 것이다.

 

주82) [사기 권115 조선열전][사기 조선열전]으로, [한서 권95 서남이양월조선전][한서 조선전]으로 줄여서 표기한다. [한서 조선전][사기 조선열전]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지명에 해당하는 5제후의 글자가 바뀐 부분을 제외하고는 [사기 조선열전]과 비교하여 몇 글자가 누락되었다. 4군의 이름 진번 임둔 낙랑 현도가 삽입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삽입된 것이 명백하다.

 

주83) [사기 권115 조선열전] 漢興為 其遠 難守復修 遼東故塞至浿水 為界屬燕

주84) [()위서 권106 상 지형지2] (魏書 卷一百六 上 地形志 二上 第五)

懷州 天安二年(467) 太和 十八年(494) 天平 初 復

領郡二 縣八 戶 二萬一千七百四十 口 九萬八千三百一十五

河內郡 漢高帝置領縣四 戶九千九百五 口 四萬二千六百一

野王 二漢晉屬郡治有太行山華岳

沁水 二漢晉屬治沁城。〔七三沁水濟水

河陽 二漢晉屬後罷孝昌中復

軹 後漢晉屬治軹城有軹關

武德郡 天平初 分河內 置

領縣四 戶 一萬一千八百三十五 口 五萬五千七百一十四

平皋 二漢晉屬 河內有 平皋陂平皋城安昌城

溫 二漢晉屬 河內有 溫。〔七四浿水。〔七五

온현 (溫縣)은 전한, 후한, 진나라 때 모두 하내군에 속했다. ()()이 있으며, 패수(浿水)가 흐른다.

懷 二漢晉屬 河內有 長陵城懷城

州 二漢晉屬 河內有 雍城中都城金城

주85)위서(魏書)(북위서)551년부터 559년까지 편찬된 중국 이십사사(二十四史) 중 하나이다. 북제(北齊)의 위수(魏收)가 북위(北魏)와 동위(東魏)의 역사를 기록했다. 130권이다.

주86)[위키백과 이십사사] 이십사사(二十四史)는 중국 역사에서 다음 왕조에서 정사로 인정받은 역사서 24종의 통칭이다. 중화민국에서 원사를 고쳐 쓴 신원사또는 청나라의 역사를 엮은 청사고를 합해 이십오사라 부르기도 한다. 또는 두 책을 모두 합쳐서 이십육사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십사사 가운데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를 통틀어 전사사(前四史)로 부른다.

주87)[신당서 권220] 東夷  高麗 百濟 新羅 日本 流鬼

의봉(儀鳳) 2(서기 677), [당나라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고]()에게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 남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게 했다. 이보다 앞서 당나라 안의 주()들에 임시로 편입되어 있던 고구려 백성들을 모두 사면하여 돌려보냈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겼다.

[그러나 고]장이 말갈(靺鞨)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다가, 일이 실행되기 전에 발각되어 다시 당나라로 소환된 뒤 공주(邛州)로 유배되었다. 당나라는 그 백성들을 하남(河南)과 농우(隴右)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켜 흩어 놓았고, 가난하고 병약한 자들만 안동(安東)에 남겨두었다.

[]장은 영순(永淳) 초년(서기 682)에 유배지에서 죽으니,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고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墓) 무덤 왼쪽에 장사 지내 주었으며 무덤가에 비석을 세워주었다.

고구려의 옛 성들은 차츰 신라로 편입되었고, 남아있던 백성들은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 달아나니, 이로 인해 고씨(高氏)의 군장(君長, 지배자) 대가 모두 끊어지게 되었다.

수공(垂拱) 연간(서기 685~688)[당나라가] 장의 손자인 보원(寶元)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성력(聖曆) 초년(서기 698)에는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여 안동의 옛 부락들을 통치하게 하려 했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못했다.

그 이듬해(서기 699)에 장의 아들인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으니, 그 후에 점차 스스로 나라를 이루었다(고구려가 충성국으로 이름이 바뀌었는지조차 불확실하다.)

원화(元和) 말년(서기 820년경)에 이르러 [그 나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음악인을 바쳤다고 한다.

儀鳳 二年授藏 遼東都督朝鮮郡王還遼東 以安餘民先編僑內州者 皆原 遣徙 安東都護府 於 新城藏與靺鞨謀反未及發召還 放 邛州廝其人于河南隴右弱窶者留安東藏以永淳初死贈衛尉卿葬頡利墓左樹碑其阡舊城 往往 入新羅遺人散奔突厥靺鞨由是 高氏君長皆絕垂拱 中以藏孫 寶元 為 朝鮮郡王

聖曆初進左鷹揚衛大將軍更封忠誠國王使統安東舊部不行

明年以藏 子 德武 為 安東都督後稍 自國至元和末遣使者獻樂工云

주88)[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이 부흥을 꾀하다 ( 67702() )

儀鳯 二年 丁丑歳, 春二月, 以降王爲 遼東州都督, 封 朝鮮王, 遣歸遼東, 安輯餘衆, 東人先在諸州者, 皆 遣與王 俱歸. 仍 移安東都護府 於新城, 以統之. 王至遼東 謀叛, 潜與 靺鞨通.

보장왕이 공주로 옮겨지다 ( 681() )開矅 元年, 召還 卬州.

보장왕이 죽다 ( 682() )

以永淳初 死, 贈 衞尉卿, 詔 送至京師, 葬 頡利墓 左, 樹碑其阡. 散徙其人於 何南·隴右諸州, 貧者留安東城傍舊城, 徃徃沒於新羅. 餘衆散入靺鞨及突厥. 髙氏君長 遂絶.

고보원을 조선군왕에 책봉하다 ( 686() ) 垂拱二年, 以降王孫 寳元 爲 朝鮮郡王.

고보원을 책봉하다 ( 698() )至聖曆初, 進左鷹揚衛大將軍, 更封忠誠國王, 賜統安東舊部, 不行.

고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다 ( 699() )明年 以降王子 德武 爲 安東都督, 後稍 自國.

 

당에 악공을 바치다 ( 818() ) 至元和 十三年, 遣使 入唐, 獻樂工.

주89) 원문 溫 二漢晉屬 河內有 溫。〔七四浿水。〔七五

주석

七四유온(有溫) 온교(온씨 교정본) : 지금 우리가 보는 책에는 '()' 자가 빠져 있다. [태평환우기] 52권 맹주 편을 보면 온성(溫城)은 온현에서 남서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有溫 溫校:「今本 逸 寰宇記 卷五二 孟州溫城 在溫縣西南 三十里。」

七五패수(浿水)

양교(양씨 교정본) : [좌전] 양공 16년 편에 나오는 두예의 주석을 보면 격수(湨水)는 하내군 지현에서 시작된다라고 나와 있다. [수경주] 7권 제수 편에도 격수(湨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또한 의교석상비라는 비석을 보면 '연수와 격수가 함께 뿜어져 나온다'라고 적혀 있다.여기에 쓰인 글자는 (두리번거릴 격)자를 쓰며, (조개 패)자를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책에 적힌 패(浿)자는 격()자를 잘못 쓴 것이다.

온교(온씨 교정본) : 온교 역시 두예의 주석을 똑같이 인용하면서, 이 글자는 격()자로 고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浿水 

楊校:「左傳襄十六年杜注:『湨水出河內軹縣。』 水經 濟水注 卷七 有 湨水』。義橋石像碑湨雙吐。』 字從』,不從 』,浿之誤。」

 

溫校 亦 引 杜注謂當作 」。

주90) 주석에서 양교(楊校)는 양수경(楊守敬, 1839~1915)이 글자를 교정한 의견을 뜻한다. 양수경은 [()위서(魏書) 지형지]를 연구하여 [북위 지형지 찰기(北魏地形志札記)]라는 연구서를 썼다. 력대어지강역도(歷代輿地沿革圖)를 제작하고 수경주소(水經注疏)를 저술했다. 온정경(溫廷敬, 1869~1954)은 문헌학자, 교감학자이다. 온교(溫校)온정경이 문헌을 대조하여() 의견을 낸 것을 말한다. [위서지형지 교록(魏書地形志 校錄)]이라는 책을 썼다.

 

 

 
 
 
 
 
 

 

  • 카카오톡
  • 네이버
  • 인쇄
  • 도배방지 이미지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