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태왕이 백제 개로왕을 처형한 이유 (6부)
백제 개로왕 이전의 왕위계승에 대해 살펴보면, 광개토태왕에게 항복했던 아신(阿莘)왕이 재위 14년(405)에 죽자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전지(腆支)태자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는데 아내는 인덕(仁德)왜왕의 딸인 팔수(八須)부인이라고 한다. 전지왕이 재위 16년(420)에 죽자 팔수부인이 낳은 아들 구이신(九尒辛)이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8년(427)에 죽는다.
<삼국사기>에는 뒤를 이어 즉위한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맏아들 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비유왕이 재위 29년(455)에 죽자 맏아들 경사(慶司)가 보위를 이어받는데 이가 바로 개로(蓋鹵)왕이다.”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고구리사초략>에는 “비유는 전지가 제 며느리와 통해 낳은 아들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유학자가 대부분이었을 삼국사기 찬자들이 차마 사실대로 못 쓴 것 같아 보인다.
아울러 <고구리사초략>에는 “경사(개로왕)는 비유가 상좌평 해수의 처와 관계해 낳은 아들이다. 비유의 처는 아들을 낳지 못해 경사를 데려다가 길렀다. 비유는 다른 신하들의 처와도 상통해 아들 여은과 여기를 보았는데, 모두가 귀여움을 받더니 후계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이에 비유의 처가 비유를 죽이고 경사를 다음 왕으로 세웠다.”고 설명되어 있다. 비유왕후는 의붓아들 경사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남편을 죽일 정도였으니, 경사와 왕위를 다투던 이복동생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음은 자명하다 하겠다.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이 죽은 다음에 아들 문주(文周)가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들이라 함은 오기로 보인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개로왕이 왕위를 계승하자 문주가 보좌해 상좌평의 지위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어 문주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여진다. 만약 문주가 아들이었다면 태자로 봉했지 상좌평이라는 벼슬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일본서기>에도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로왕을 이어 즉위한 문주왕이 재위 4년(477) 만에 해구에게 시해를 당해 죽어 13세의 아들 삼근(三斤)이 즉위했고, 그 삼근왕 마저 재위 3년(479) 만에 갑자기 죽자 문주의 동생인 곤지의 둘째아들 모대(牟大 일본서기의 末多)가 즉위했고, 동성왕이 재위 23년(501)에 죽자 그 둘째아들인 무녕왕이 즉위했다는 것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통이다.
고구리 장수태왕이 백제 개로왕을 처형한 이유
455년에 비유왕의 아들 개로왕이 즉위한 이후 15년 동안 <삼국사기>와 <고구리사초략>에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는 태평성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461년 개로왕은 아우 곤지를 왜국으로 보내면서 임신한 부인을 동행케 한다. 그 부인이 왜로 가는 도중에 섬에서 사내아이를 낳자, 곤지는 산모와 갓난아이를 백제로 돌려보냈다고 하는데, 이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무녕왕이라는 것이다.
<고구리사초략>에도 고구리 장수태왕이 첩자 도림을 464년에 백제로 보내 그 허와 실을 염탐하게 했고, 백제에서 장수 재증걸루가 466년에 고구리로 투항해왔다는 짤막한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이 재증걸루가 바로 9년 후 475년에 백제로 쳐들어가 개로왕을 체포해 옛 군주의 목을 친 장본인이다.
아신왕이 호태왕에게 항복한 이후 70년이 넘도록 백제가 고구리를 선제공격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개로왕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469년 기유 8월에 백제가 대방(帶方)을 쳤다가 패해 물러났고, 10월에는 쌍현성을 고치고 청목령에 큰 울짱을 설치하고는 한산에 있는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했다. 이를 보고받은 장수태왕은 동정만 살피라고 명했다고 한다. (대방의 위치는 https://www.greatcorea.kr/192 참조)
그랬던 장수태왕이 6년 후인 475년에는 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붙잡아 그의 목을 베어 버린다. 왜 그랬을까? 개로왕이 처형당했을 때 백제는 나라가 완전히 망한 거나 마찬가지 상태였다가, 그런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되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때 비운에 죽어간 개로왕이 바로 무녕왕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우리 역사상 일국의 왕이 전쟁터에서 전사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동부여 대소왕, 고구리 고국원왕, 그리고 백제에서는 책계왕, 개로왕, 성왕 등이 있다. 이들 중 적에게 생포되어 치욕을 당하고 목이 잘린 비운의 왕이 바로 백제 개로왕과 성왕이다.
왜 개로왕은 그런 치욕을 당하면서 죽어갔을까?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18년(472)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리를 칠 병력지원을 요청하면서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잘 지냈었는데 그 조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간의 우호를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으므로, 저의 선조(근초고왕)께서 군사를 정비해 번개같이 가 기회를 노려 공격해 화살과 돌이 잠시 부딪히는 동안에 쇠의 머리를 베어 효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는 내용의 국서를 보낸다. 그 국서에는 군사를 보내주면 딸을 후궁으로 보내고 자제를 마구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다는 등 굴욕적인 내용도 들어있었다.
광개토태왕은 조부 고국원왕의 전사를 국치로 알고 그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했었다. 그러나 막상 호태왕에게 백제 아신왕의 목숨을 거둘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는 동족의 대단합을 위해 아신왕의 항복과 인질을 받고는 용서하는 등 큰 은혜를 베풀었다. 그로부터 약 70 후 개로왕이 그런 은공도 모르고 감히 고구리에 대든 것이었다. 게다가 외교문서에 ‘쇠(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어 효수했다’는 허위사실까지 유포한 것이었다.
개로왕이 벌인 대규모 토목공사
장수태왕은 백제를 공격하기 몇 해 전에 도림이라는 승려를 세작(간첩)으로 파견해 백제의 허와 실을 살펴보고 백제의 국력을 미리 소모시키는 전략을 추진하라 했다. 바둑이 국수급인 도림은 바둑으로 개로왕과 아주 친해지자 개로왕에게 성곽과 궁궐을 수축하고 능묘를 정비하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라고 건의한다. 그럴듯한 건의라 개로왕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삼국사기>에 ”개로왕은 모든 국민을 동원해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곧 그 안에다 굉장하고 화려한 궁전을 지었다. 또 큰 돌을 욱리하(郁里河)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부왕을 장사하고, 백성의 집들이 자주 강물에 무너진다하여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까지 이르렀다. 이로써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궁곤하여 나라의 위태함이 알을 포개 놓은 것보다 더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기록에서 ‘흙을 구워 성을 쌓고’와 ‘백성의 집들이 자주 강물에 무너져 하수를 따라 제방을 쌓았다.’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제방을 쌓은 하수는 어느 강이고 그 위치는 과연 어디였을까? 반도사관을 무조건 추종하는 식민강단사학계는 하수는 지금의 한강이며 당시 백제의 도읍 한성은 하남시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하수가 지금의 한강이라는 사실을 입증할만한 자료가 하나도 없음에도 말이다.
<삼국사기>에는 하수에 쌓은 제방이 숭산(崇山)의 北에서 사성(蛇城)의 東에 이른다고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다. 식민사학계는 숭산을 서울의 동쪽 하남시에 있는 검단산이라 하고 사성을 풍납토성이 있는 곳이라고 비정하고 있는데, 겨우 13km정도 밖에 안 되는 소규모 토목공사를 했다고 백제라는 나라가 위태로워질 정도로 재정파탄이 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위 <삼국사기> 기록은 현재의 한강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개로왕이 제방을 쌓은 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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