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씨’는 ‘기자조선’의 후예. 1973년 중국 천진시에서 발굴된 ‘선우황 비’.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 璜 字 伯謙 其先祖 出 于殷 箕子之苗裔~). 중산국 북평현과 평주 북평군 조선현(4)‘선우씨’는 ‘기자조선’의 후예. 1973년 중국 천진시에서 발굴된 ‘선우황 비’.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 璜 字 伯謙 其先祖 出 于殷 箕子之苗裔~). 중산국 북평현과 평주 북평군 조선현(4)
1973년 5월 지금의 천진시 무청현에서 출토된 비석이 827자가 새겨진 후한 시대의 비석임이 확인되었다. 기원후 125년에 죽은 ‘선우황’이라는 사람의 묘비가 출토되면서 ‘선우국’이 실제 존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선우국鮮于國’의 ‘선鮮’은 ‘조선朝鮮’의 ‘선鮮’이라는 사실이 일반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석 상단에는 ‘한나라 고(옛날) 안문태수 선우황비(漢 故 雁門太守 鮮于璜 碑)’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에 대하여 ‘경향신문 이기환 기자’가 보도했다. 어느 분인지는 몰라도 누군가의 후원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같이 중국내 동이족 유적을 추적하여 직접 답사하면서 시리즈로 연재한 기사중의 일부이다. 원문 그대로 전재했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9) 중원에 꽃 핀 동이족의 나라. 2008.05.02. 17:38. 경향신문.
[이형구 교수는 당장 홍콩으로 날아갔다. 전체 비문을 탁본한 자료를 입수하기 위함이었다. 수소문 끝에 전체탁본을 구할 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탁본의 첫 줄을 읽으니 과연 ‘기자(箕子)’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 璜 字 伯謙 其先祖 出 于殷 箕子之苗裔~)” (장주본 탁본 첫머리) 결국 중산국 심장부에서 확인된 중산왕릉 묘의 발굴 성과와 북경시와 천진시 사이 무청현에서 발견된 ‘선우황비’는 은(상)과 선우·중산국, 기자조선의 삼각함수를 풀 결정적인 열쇠가 된 것이다. 즉 ‘선우=은(상)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역사를 복원할 때 문헌은 움직일 수 없는 귀한 자료다. 하지만 명문이라고 하는 금석학 자료와는 결코 견줄 수 없다. 문헌은 전해 내려오면서 조작이나 왜곡, 오류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지만 명문(금석문)은 당대에 당대인들이 직접 쓴 기록이기 때문이다.]
[선우황비는 높이 2.45m, 폭 81㎝, 두께 12㎝나 되는 엄청난 크기였다. 비석의 주인공인 선우황은 AD 107~113년 사이 지금의 산서성 대현(代縣) 부근을 관할하는 안문(雁門) 태수가 되었고, 125년 81살을 일기로 죽는다. 비석은 그가 죽은 지 40년 뒤(165년)에 손자가 세운 것이다.]
[사서(역사책)에 따르면 선우국은 춘추시대 때인 BC 660년 무렵 북방 오랑캐인 백적(白狄)으로부터, BC 530년부터는 강대국이었던 진(晉)의 침략을 계속 받았어요. 중산국으로 복국(復國)한 이후인 BC 406년에는 위(魏)의 침략을 받아 20여년간 식민지가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선우 중산의 역사가 왜곡되지 않았을까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오랑캐 백적이 선우를 침략한 이후 선우의 족명이 백적의 별종으로 잘못 알려졌고, 원래 주나라의 봉국으로 희씨 성을 하사받은 위나라의 식민지가 됨에 따라 희성(姬姓)으로 변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춘추전국시대판 ‘창씨개명’인가. 언뜻 그런 느낌도 들었다. 중산국의 본거지인 하북성 평산시 삼급현에서 중산왕릉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1978년 무렵 대만에도 전해졌다. 당시 국립대만대에서 유학 중이던 이형구의 눈이 빛났다. 이미 중산국이 은(상)의 후예가 세운 나라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그였다. “역사서에 기록된 중산국=은(상)의 후예라는 대목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차였지. 당시 기자조선에 대해 천착하고 있었던 때였잖아요.” 이미 선우가 (은)상의 후예, 즉 다름 아닌 기자의 후예임을 시사하는 자료 하나 하나에 눈길을 주고 있던 때였다.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 열국 작성 급 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 及 存滅 선異)’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는 일명 중산이라 한다. 회남자는 우(虞)는 혹 우(于)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 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 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하북성 평산으로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 (子孫 因合 ‘鮮于’ 爲氏)”( 대만 역사학자 진반(천판陳槃)) 기막힌 일이다. 선우국이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딴 것이라니. 그런 와중에 중산국 발굴보고서를 입수한 것이었다. 우선 중산왕릉이 중산왕의 묘곽, 즉 석곽묘의 형태로 발견된 점이 눈에 띄었다. 석곽에 판축봉분의 형태로 조성된 묘제.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검토해왔던 발해문명권의 전형적인 묘제가 아닌가. 또한 왕릉의 ‘중(中)’자형 대묘와 조주분(鳥柱盆·새 모양의 기둥을 박은 그릇), 그리고 옥기문화 등은 은(상)문화와 놀라운 일치를 보였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젊은 고고학도는 1년 뒤 깜짝 놀랄 소식을 접한다.] (계속) <저작권자 ⓒ 고구려역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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