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조선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동아시아 영웅인 치우의 이미지 변화 가능성 (2부)
‘별일 치우(別一蚩尤)’ 그리고 ‘두두리(豆豆里)’
 
박선식 한국인문과학예술교육원 대표 기사입력  2012/12/03 [15:00]
Ⅱ. 동아시아 상고영웅인 치우의 이미지 변화 가능성

 
치우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4,700여 년 전의 전쟁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원동중의 「삼성기전 하」에는 치우천왕을 정식 명칭이 아닌 세속적 지칭[世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으로서 “치우천왕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사업을 일으켰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환웅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큰 안개를 일으켰으며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크게 놀라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고 불렀다. 치우란 속된 말로 우레와 비를 크게 지어 산과 내를 고쳐 뒤바꾼다는 뜻이다.”는 등의 내용이 보인다.  

  원동중의 그 같은 거론은 치우가 속칭이고 본래는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었음을 명확히 알게 해준다. 그 같은 견해는 언뜻 별로 중대한 사안이 아닌 듯하나 실상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 내 풍속사를 고찰해보면 치우에 관한 풍속이 매우 희소하지만 신라의 두 번째 임금이 차차웅인데 자충(慈充)이 별칭인 점, 그리고 주몽이 광개토태왕릉비나『삼국사기』에 별도로 추모(鄒牟)로 기록된 점,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고구려 대문신왕이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으로 기록된 점, 고구려의 신이한 신통력의 소유자였던 추남(楸南), 가야의 임금으로 용녀(傭女)집단의 거세를 주도했던 좌지왕 등의 인물들의 칭호를 보면, ‘우레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과 연결시킬 수 있는 절륜의 인물들에게 ‘자’ 혹은 ‘좌(자+오의 음운과 유사/‘자오지’)’ ‘치’ ‘추(치+우)’ 등 음운상 유사성을 띄는 이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의 이암은 자신의 소작인 『태백진훈』에서 “위대하구려! 치우는 근본 됨에 보답하였고 치세를 이루었다. 손님들은 자리에 올랐고, 자손들이 뜨락에서 기르는 돼지들과 보리들로 추창(趨蹌)하였다. 가을에 교(郊)에서 씬을 맞이했는데 아홉 맹서로써 나라는 하나가 되었다.”고 치우를 숭앙하는 논조를 드러내어 이를 밝혔다. 이 내용에서 주목할 점 가운데, 치우 스스로가 “가을에 교에서 신을 맞이했는데 아홉 맹서로써 나라는 하나가 되었다.”는 부분이다. 

  가을이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인지는 분명치 못하다. 다만 조선 숙종원년에 북애가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규원사화』를 보면, 한 가정의 주부가 매년 신에게 정성을 드리는 시기가 “매년 10월”이었고 그것은 바로 ‘단조(檀朝) 때의 풍속’이었다는 내용이 참고가 된다. 어떻든 치우 스스로가 가을에 교외에서 신을 맞이하는 행사를 치렀음은 이미 치우 시절에 제사의 의례가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하며, 치우 스스로가 제사를 중시했던 성향임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한편 원동중은 『삼성기전』하에서 계속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쇠락함을 보고 마침내 웅대한 뜻을 품고 여러 차례 천병을 서쪽에 일으켰다. 또 색도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서 회대 사이에 웅거하였고, 헌후(軒侯)가 일어나자 곧바로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고신을 쳐 공을 세우게 하였다.”고 밝혀 중국 역사 기록과는 사뭇 다른 양상의 치우 행적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 숙종원년에 『규원사화』를 지은 북애자는 ‘단군기’에서 단군이 “치우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사당을 세웠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엄려홀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고, 또한 거론된 단군은 몇 대 단군이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내용상 단군은 부여를 시켜 난을 일으킨 알유의 세력을 공격케 한 점으로 보아 단군왕검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적어도 치우에 대한 존숭과 그 행위가 단군왕검 시기에 이루어진 점을 추정해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북애자는 『규원사화』의 ‘태시기’에서 “대개 지금의 사람들이 장인과 장수를 일컫기를 지위(智爲)라고 하는 것은 치우씨(蚩尤氏)를 그릇되이 말한 것이다.”라고 밝혀 눈길을 끈다. 그런데 지위는 오늘날 국어대사전을 통해 확인하면, 대체로 ‘목수(木手)’의 뜻을 지닌 단어이다. 자오지환웅 곧 치우가 병기를 만들고 산업을 일으켰다는 측면을 생각할 때 뛰어난 절륜의 목수의 이미지로 조명될 여지는 충분하다. 물론 천왕의 지위에 있는 분을 한갓 목수로 지칭함은 격하된 예우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민중적 입장에서 옛 영웅을 뛰어난 목수 등의 장인 기술자로 조명한 측면이 그리 불경한 태도는 아니라고도 여겨진다.

  따라서 자오지환웅 곧 치우의 이미지가 한국의 역사 전개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로 변화되거나 왜곡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히 느껴진다.

▲ 치우학술대회에서 발제하고 있는 박선식 박사  


Ⅲ. ‘별일 치우(別一蚩尤)’ 그리고 ‘두두리(豆豆里)’  

  대개 치우를 언급할 때, 그를 동아시아 상고 군사영웅의 이미지로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관자』의 ‘오행’편을 보면, “옛날에 황제가 치우를 얻어 천도(天道)에 밝았고 대상을 얻어 지리를 살폈으며 창룡을 얻어 동방을 다스렸고, 축융을 얻어 남방을 다스렸으며 대봉을 얻어 서방을 다스렸고 후토를 얻어 북방을 다스렸다. 황제가 육상(六相)을 얻어 천하가 다스려졌고 신명이 도래했다.”는 내용이 있다. 치우가 천도에 밝았던 존재로 거론되고 있어 주목하게 되는 대목이다. 물론 여기서 거론되는 치우가 과연 진짜 치우인지는 의혹스럽다. 

  따라서 이 부분의『관자』거론 내용에 안정형(安井衡)이 “이는 대개 다른 한 치우이고 판천의 들녘에서 황제와 싸운 자는 아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한 점은 흥미롭다. 곧 안정형은 익숙하게 알고 있는 황제의 치우격파와 그 결과로 이어진 복속 스토리에서 해당자인 치우가 원래의 치우가 아닌 별도의 ‘다른 한 치우(別一蚩尤)’라고 거론한 셈이다. 이런 안정형의 견해는 결코 보편적 의견으로 수용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그의 의견을 쉽게 일축하기가 어려운 것은 오늘날 한국에서 유통되고 있는「태백일사」속의 ‘치우비’나 치우의 81형제 기사 때문이다. 81명이나 되는 형제 무리의 여러 사람들 가운데 치우비처럼 죽은 이도 있었을 테고, 포로로 잡혀 황제가 삼은 육상의 한 신하로 복무한 자가 없었다고 단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치우가 본래 천도에 밝았던 인물이었고, 그 천도는 시기를 헤아리는 지혜에 해당할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여기서 참고할 점은 고려 후기의 유학자였던 이승휴가 남긴 『제왕운기』에 황제의 주석부분을 보면, 황제가 ‘천부(天符)를 받았다.’는 내용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승휴의 거론이 정당하다면, 그것은 중국 내 문헌에 보이는 ‘다른 한 치우(別一蚩尤)’로 지칭되는 또 다른 치우가 황제에게 귀속하여 천도 곧 천부를 알려주었다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한편 한국 내 역사 비전자료들과는 달리 민간 풍속사의 측면에서 치우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는 의외로 드물다. 그것은 앞서 거론한 것처럼 치우의 본래 명칭이 자오지환웅이고, 치우천왕은 세칭이었다는 『삼성기전 하』의 내용과 연관지을 자료가 드물다는 말이 된다. 더욱이 북애자가 조선조 당시의 사람들이 치우를 ‘지위’로 곡해하여 불렀다는 점을 밝힌 것도 견주어 볼 점이다. 

  그런 차원에서 신라지역에서 존재했던 ‘두두리(豆豆里)’ 신앙은 한 단서로 꼽을 만하다. 두두리는 신라시대 귀신의 무리를 이끌고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고 전해지는 비형랑의 일화로 지칭되는 뛰어난 장인의 신격적 칭호다. 이를태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왕가수(王家藪)’부분을 보면, 경주사람들이 목랑(木郞)을 제사한 곳으로 왕가수가 소개되고 있고, 제사대상인 두두리가 곧 목랑인데, 목랑은 숲의 나무 도깨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형랑 이후로 세상에서는 두두리를 섬기기를 매우 성대하게 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나무 도깨비의 정체성이다. 어째서 나무 도깨비를 그토록 존숭했느냐가 문제이다. 

  이쯤에서 고찰해 볼 점은 치우의 동반 지지세력의 하나였던 ‘이매망량’이다. 특히 망량 세력은 숲의 도깨비였다. 실상 그들이 도깨비였는지 도깨비 같은 신군(神軍)이었는지는 접어두고서라도 치우부대의 한 부분으로 분명히 망량의 세력은 존재했던 점은 설화적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비형랑의 일화에서 두두리는 거론되는가? 단언하긴 곤란하지만, 신라 진평대왕시절에 필요한 토목건축공사의 중대 사업을 담당할 계층이 필요했고, 그들은 절륜의 기량을 갖춘 기술집단이어야 마땅했을 터이다. 

  따라서 엄청난 공사를 담당할 세력은 마치 자오지환웅처럼 “우레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고 할 만큼의 대단함을 드러내야 했고, 그러한 기대감에 부응할 세력은 마땅히 치우를 따르던 이매망량과 같은 숲 도깨비의 기량을 갖추어야 했을 터이다. 따라서 치우나 자오지의 이름이 아닌 모든 것을 뚝딱 ‘두두려’ 해결하여, 마침내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는 결과를 이룩한 것은 아닐까. 

  두두리의 신앙은 다시 일본에 다다라(多多羅) 신앙으로 변화됐다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 백제 무령왕릉의 무덤에서 수습된 대부인(왕비)의 팔찌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팔찌의 안쪽에 ‘다리(多利)’가 만들었다는 한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두두리의 신앙을 백제에 무리하게 접목시킬 의도는 없으나, 다리(多利)라는 장인이름을 통해 그 역시 ‘두두리는 사람’이란 뜻의 이름을 지닌 장인이었다고도 추정해 볼 여지를 느끼게 된다. 

  조심스럽지만 두두리의 신앙은 희미한 치우의 전통과 그를 추종한 망량의 숲도깨비 이미지를 적절히 융합하여 신라 기술장인 집단 속에 자리한 측면을 읽어낼 단서라 할 만하다. 그러한 두두리 신앙이 놀랍게 고려조에도 이어져 무신란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의민이 한 때 두두리 신앙에 심취하였고, 마침내 무신정변의 중심인물로 나선 것은 두두리 신앙이 군사영웅적 이미지를 덧입고 있었을 개연성을 뚜렷하게 엿볼 수 있다.
 

곧 (3부)에 이어집니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2/12/03 [15:00]  최종편집: ⓒ greatcorea.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