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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가 중국정부에 저항하는 이유는? (2부)
고구리 형제국인 돌궐의 위구르 통치 역사
 
세르게이 정 기사입력  2013/01/25 [14:16]
흉노(匈奴)의 후예인 돌궐(突厥) 역시 단군의 후예이다. 돌궐은 고구리와 동맹을 맺기도 하였으며, 중국의 5호16국 혼란기 때 광개토태왕과 연합하여 후연(後燕)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또한 <북제서>에 따르면 북제(北齊)의 시조인 고환(高歡)은 흉노의 선우 출신이자 고구리의 고위관직인 대모달을 역임했던 인물로써, 그의 아들 고양(高洋)이 북제를 세우고 북방을 통일할 때 고구리 평성태왕(平成太王=양원태왕)이 군사를 보내 돕는 등 남다른 우애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552년 흉노의 일파이자 유연(柔然)의 복속민족인 돌궐이 흉노의 각 부족들을 통합하고 아흘타이(ahltaiy) 회맹을 거쳐 몽골초원과 화북지방의 패자가 되었다. 참고로 아흘타이(ahltaiy) 회맹이란 몽골의 쿠릴타이(quliltay)의 원조로 신라의 화백회의와 흡사하다. 8명의 수장이 원탁에 앉아 회맹을 가지는 유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돌궐은 고구리와 동맹을 맺어 북방의 패권을 장악하였고 서방으로도 진출하여 이란 북부의 이스파한과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에 이르렀으며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했다고 한다.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한 돌궐을 서돌궐이라 했고, 오르콘(Orkhon)강 유역을 본거지로 몽골 지방을 지배했던 돌궐은 동돌궐이라 했다.
 
서돌궐의 역사를 기술했던 사산조 페르시아(Sasan Persia)의 Ephthalite toumun 14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원본] 552 ترکها بی تردید انعطاف پذیر مغولستان زمانی که او شکست خورده بود و تحت سلطه دو نفر از غرب نگه داشته استفاده می شود که هون نیز ناپدید شده است. برادر ساکنان ساخته شده در اطراف 565 بر اساس ایران و اتحادیه را فتح با در نظر گرفتن موضع است. "
[해석] 552년 투르크계 돌궐(土門카칸)에게 유연(아나괴카칸)이 격파당하면서 몽골리아를 지배하자 유연의 서방을 지켜주던 [Ephthalite hun]도 사라져버렸다. 부민의 동생 이스테미(室點密)가 준가리아(Jungaria)를 중심으로 세운 선궐(腺厥)을 바탕으로 565년 페르시아(사산조)와 연합하여 정복하였기 때문이었다.
 
서쪽으로 달아난 ‘에프탈 훈’과 합친 유연의 일부가 헝가리 지역에서 새로운 몽골계 칸국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며 서방을 공포에 떨게 한 인물이 바로 ‘아바르(Abar)’이다 그는 <아틸라>를 따르던 유목부족이었던 쿠트라구르와 우투르구르라는 훈족들을 패배시킨 다음 포용하여 전력을 가다듬었다. 볼가강에서 다뉴브강을 거쳐 오스트리아 초원까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다음, 565년 왕위를 계승한 군주가 특별하게도 ‘바얀(Bayan) 칸’이라는 몽골계 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  돌궐과 위구르의 세력판도. 고대 중국은 섬서성 하남성 부근에 조그맣게 있던 족속이었다. 티베트 위구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분쟁은 이러한 역사적 이유에 기인한 것이다.

 
이후 630년 동돌궐이 당태종에게 멸망당하자 유민들은 고구리로 유입되었다가 고구리 멸망 후 대진국(발해)에 흡수되었다. 북방의 철륵(鐵勒) 중 하나인 설연타(薛延陀)가 위구르지역에 침공하여 그곳을 지배하였고 셀렝가강 방면까지 영역을 확대했으나, 646년 당나라의 공격을 받아 육도독부(六都督府)·칠자사주(七刺史州)로 나뉘어 지배를 받아 멸망했다. 참고로 철륵이란 수·당 왕조에서 돌궐 이외의 투르크계 여러 부족을 일컫던 말이다.
 
이후 위구르 지역은 당의 기미정책(羈縻政策)가 본격화되자 남은 토속민인 돌궐(위구르)인들은 조금씩 세력을 확장해가고 대진국(발해)와 당나라와 이슬람세계와의 중계교역으로 인해 부유해졌다. 서돌궐이 당에 의해 멸망 후 돌궐제2제국(682~745)으로 다시 부활하자 위구르는 그들에게 항복하여 지배를 받게 되었다.
 
참고로 기미정책의 기(羈)는 말의 굴레를 미(縻)는 쇠고삐를 뜻하므로, 속박하고 얽어매는 견제와 통제의 의미를 가진다. 명목상으로는 군현제를 채택하여 부(府)와 주(州)와 현(縣)을 두고, 외족(外族)의 왕과 추장을 도독·자사·현령 등에 임명하여 자치에 맡기고 보호령으로서 도호부(都護府) 등을 두어 감독하게 하였다. 번창할 때는 기미부주(羈縻府州)가 856개나 되었다고 한다. 북서의 돌궐·위구르, 북동의 거란, 중앙아시아의 여러 오아시스로부터 남서의 티베트와 먀오족[苗族]의 땅까지 이런 식으로 통치하였다. 독립국으로 인정할 수도 없고, 직할령으로 만들 수도 없는 주변 민족들에 대해서 취해진 정책으로, 주변 여러 나라를 지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재훈 선생의 「위구르 유목제국사」에 따르면, 돌궐제2제국이란 동돌궐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682년 몽골고원에 독립 국가를 세워 카파간가한[默綴可汗]과 빌케가한[毗伽可汗] 등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한때 중앙아시아에 원정할 만큼 세력을 떨쳤으나, 다시 동족간의 다툼으로 쇠약해져 744년 철륵의 한 부족인 위구르에게 멸망하였다고 한다.
 
740년 돌궐의 약화를 틈타 바스밀(Basmil)과 카를룩(Qarluq)등이 위구르 영토 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일시 바스밀(Basmil)이 세력을 차지하나 위구르는 다른 여타세력들을 제압하고 몽골고원과 현 신강성, 투르크메니스탄과 타지키스탄 부근을 차지하였다.
 
이후 위구르는 안사의 난(755~765)때 당나라를 도운 것을 기회로 당나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몽골 초원과 카자흐스탄 지역 등에 한정되어 있던 지배영역을 좀 더 확대하게 하기 위해 서방에 대한 활발한 진출과 오아시스 지역의 경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유목제국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참고로 안녹산의 아버지는 이란계 소그드인의 무장이었던 안연언(安延偃)이고, 어머니는 터키족 돌궐의 무녀 아사덕씨(阿史德氏)이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자 어머니가 돌궐족의 장수와 재혼하였다. 안(安)이라는 성씨는 계부의 성이며 자식이 없었던 계부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당시 안녹산의 집안은 이민족으로 당나라 한족들로부터는 잡호(雜胡)로 간주되었다. 그는 6개국의 말을 구사할 줄 알아 젊었을 때 영주(營州)에서 무역 중개인 역할을 하였다.
 
9세기 전반까지 발전을 구가하던 위구르는 830년대 말 키르기스족의 공격을 받아 제국이 붕괴된 이후 몽골초원을 떠나 신강성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렇게 몽골초원을 중심으로 돌궐에서 위구르로 이어지는 고대 투르크 유목민들의 세계는 중앙아시아의 전반적인 사적 전개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고대 투르크 세계의 전개 특히 9세기 중반에 발생한 위구르의 붕괴는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서아시아 지역까지 엄청난 정치, 사회, 문화적 변동을 가져와 현재와 같은 인문지리적 환경을 형성하는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으며, 그리고 위구르와 돌궐이 우리 한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에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현재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 발생하고 있는 민족분쟁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만주족인 청나라 때에는 같은 단군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청나라에 편입되어 지금의 중국 영토가 확정되었으나, 1911년 청나라가 망하고 한족이 중국을 주도하게 되자 현재 위구르인들은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심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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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1/25 [14:16]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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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앞면에 만주 문자와 몽골 문자가 새겨져 있는 이유는? 이상해요 13/04/15 [09:16]
만주족과 몽골족이 같은 민족이라서 그런가?

만주족은 종전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중원을 청나라라 하여 만주족 추장이 황제가 되어 한인을 참여시켜가며 통치하고 몽골,위그르,티벳지역은 만주족 추장이 그곳 수장이 되어 한인 관여없이 통치하였다 합니다.

즉,청나라 황제인 만주족 추장은 청나라도 다스리고 동시에 몽골의 대칸으로서 몽골도 다스린 것이라 합니다.

병자호란때 조선에 처들어온 청태종은 동시에 몽골 대칸으로 몽골병도 조선 침략에 동원하였기에 삼전도비 앞면에는 만주문자와 몽골문자를 좌우에 새기고 뒷면에 한자를 새기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한족들은 만주,몽골,티벳,위구르를 한족땅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5관왕(여진족 추장,청나라 황제,티벳대빵,몽골 대칸,위구르대빵)이었던 부의가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자 몽골,티벳,위구르는 동시에 최고 지도자가 없어진 상황이 된 것이라 합니다. 수정 삭제
김부식이 대륙 신라,백제의 역사를 한반도 남부의 역사로 네다바이한 것인가? 이상해요 13/04/15 [09:23]
위 지도를 보면 백제,신라는 한반도와는 무관한 중국 대륙에 있던 나라임을 알수 있다.
김부식은 왜 백제,신라등 대륙국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끌어왔을까?
혹시,고려 자체가 대륙에 있던 대국이었을까?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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