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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가 위서면 <사기조선열전>도 위서 아닌가? (1부)
<사기조선열전>의 내용과 같은 <북부여기>의 위만 망명 기록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03/01 [15:28]

현재 대한민국의 식민강단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는 위서이므로 그 내용을 하나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은 <사기조선열전>의 기록을 근거로 우리민족의 역사는 이민족인 위만조선(衛滿朝鮮)과 한사군(漢四郡)의 식민지배로부터 시작한다는 일제식민사학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참고로 식민사학계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위만조선을 세운 위만을 <북부여기>에서는 ‘떠돌이 도적떼(流賊)’로 표현하고 있다.
 
과연 그런지 <환단고기 북부여기>와 <사기조선열전>의 내용을 서로 비교해보도록 하겠다.
초등학생에게 아래 두 사서의 내용이 서로 다르냐고 물으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판단은 독자 여러분께서 하시기를....
 
▲ 동북아역사재단과 국사교과서의 위만 망명 내용     ©편집부
 
<환단고기 북부여기>
 
시조 해모수 단군 “31년 임진(B.C.209)년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秦)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연(燕), 제(齊), 조(趙)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上下雲障)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해 감독케 하였다.”
 
“38년 기해(B.C.202)년 연나라의 노관(盧綰)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서 경계선을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灤河)이다.” 

“45년 병오(B.C.19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북부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해모수단군)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했다.”
 
2세 모수리 단군 원년 “정미(B.C 194)년 번조선 왕(=기준)은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위만)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走入海 또는 入于海)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편집자 주)
* 진승은 진나라 말기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농민반란을 주도한 인물.
* 노관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과 죽마고우로 한나라 창업공신이었으나 유방이 죽고 여태후가 권력을 쥐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흉노로 망명하는 인물.
* 위만은 연왕(燕王) 노관의 부장으로 번조선으로 망명하는 인물.
* 패수(浿水)는 당시 연(燕) 땅과 조선의 국경선
* 수유(須臾)는 기자(箕子)의 이름으로 기자가 살던 지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 식민사학계와 재야사학계가 추정한 기준의 도주로. 패수를 식민사학계는 청천강으로 재야사학계는 난하로 보고 있다. 과연 그럴까?


사기(史記) 권 115 열전(列傳) 제 15 조선(朝鮮)
 
조선왕 만(滿=위만)은 옛날 연(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 전성기 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망시킨 뒤 요동의 바깥 변방까지 소속시켰다.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부속시켰다.
 
연왕 노관(盧綰)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갔다. 요새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진의 옛 땅으로 비어 있는 상하(운)장(上下雲障)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蠻夷) 및 옛 연(燕), 제(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王儉)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때가 마침 효혜(孝惠=유방의 아들), 고후(高后=여태후)의 시대로서 천하가 안정되었다.
 
요동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다. 국경 밖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오랑캐의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이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었다. 그 주변의 소읍(小邑)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 朝鮮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 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會孝惠 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即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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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3/01 [15:28]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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