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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로 재조명되어야 할 동북아의 패자 대진(발해)
대진국(발해)은 고구리를 그대로 계승한 우리민족의 국가
 
신완순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04/26 [10:25]

우리의 대표적인 주거 문화 중의 하나인 온돌이 잃어버렸던 우리의 역사도 찾아주고 있다.
수년 전 국내 매스컴에서 소개된 바에 의하면, 만주 지역에서 발굴된 발해의 성과 유사한 대규모 성터가 현 러시아 연해주의 최북단 지역에서 발굴됨으로써 그동안 논란이 돼 온 발해의 영토가 우리의 주장대로 러시아 동북 지역까지 펼쳐졌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성벽 높이 6m, 길이 1,645m에 달하는 러시아 연해주 최북단의 대규모 성곽지에서 굴뚝과 아궁이 등 대형 온돌시설이 발굴되었다. 특히 관심을 모으는 건 쪽구들로서 건물 좌우 벽을 따라 놓였다 꺾여 대형 굴뚝으로 빠지는 전형적인 발해의 온돌 구조이며 이는 고구려 때 온돌과 흡사해 발해 사람들이 연해주 지역에서도 이민족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고구려의 생활양식을 고수하며 살아왔으며 띠 손잡이 달린 호를 비롯해 토기와 기와조각 등 발굴된 여러 점의 유물도 고구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러시아 연해주 최북단에서 발해 성터 발굴

연해주에서 대규모 발해 성터가 발굴됨에 따라 기존에 발해의 동북쪽 경계를 흥개호 남동쪽으로 축소하는 경향을 보여 온 러시아와 중국 등 주변국들의 학자들에게 발해의 영토가 러시아 연해주 최북단까지였다는 결정적 근거를 찾은 것은 큰 의미가 있다. 2005년부터 연해주 지역에서 이러한 발해의 유적지를 발굴하게 된 것은 바로 온돌이라는 우리의 전통적 주거 문화의 형태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 러시아 연해주 최북단까지 통치하였던 발해는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과거 우리는 국사시간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당나라의 연합군과 더불어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한 뒤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점을 경계로 하여 통일신라와 발해가 있었다고 배웠다. 지금도 이러한 역사인식은 중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우리의 역사인식을 발해를 통하여 새롭게 조명해보자.
<통고(通考)> 등에서는 699년 대조영이 진국(震國, 振國)을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조대기(朝代記)에 이르기를 개화 27년(AD 668)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이 되니 이때에 진국장군(振國將軍) 대중상(大仲象)이 서압록하(西鴨錄河)를 지키다가 변고의 소식을 듣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開原)을 지나갈 때 이 소문을 듣고 대중상을 따르겠다고 원하는 자가 8000명이었다. 이에 같이 합류하여 동쪽으로 가서 동모산(東麰山)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고 성벽을 견고하게 지키고 스스로 보전에 힘을 쓰며 나라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였다.”라 하여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중상이 고구려를 이어 후고구려를 세웠다고 하였다.

▲   고구리가 망하자 장수 대중상이 바로 후고구리를 세웟고, 태자 대종영이 국호를 대진으로 바꿨다

또한 “중광 32년(AD 699) 5월 대중상께서 돌아가시니 묘호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諡號)를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라 하고 나라의 이름을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으며 고구려의 옛 강역에 웅거하면서 땅을 넓히니 6000 리였다. 천통 21년(719년) 봄 대안전에서 돌아가시니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였고 시호를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라 하였다.”라고 하여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후고구려에 이어 대조영에 의해 대진으로 이어졌으며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 건국 699년에서 668년으로 앞당겨야

* 발해의 건국 시기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699년이 아닌 고구려의 멸망 시기 즉 668년 대중상의 후고구려로 잡아야 하며 31년을 앞당겨야 할 것이다.

* 발해가 아닌 대진이 거란에게 망할 때까지 황제라 하고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1980년 발굴된 정효공주묘비에서 잘 알 수 있다.

* 국사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압록강을 경계로 되어있는 대진의 서쪽 강역도 마땅히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위에 대조영의 구토회복 과정에서 인용된 ‘고구려의 옛 강역에 웅거하면서 땅을 넓히니 6000 리였다’는 내용과 ‘말갈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거란장수 이진영(李盡榮)과 더불어 손을 잡고 군사를 연합하여 천문령(天門嶺)에서 당나라 장수 이해고(李楷固)를 크게 격파하였다.’는 기사에서 천문령의 위치를 통해 대진의 강역을 추론할 수 있다.

천문령(天門嶺)의 위치에 대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현재 압록강 이북의 어느 지점 정도로 생각하고 있고,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오늘날 북경 북쪽의 승덕현 서쪽 지방에 있다고 하고 있으나 천문령은 현 중국의 산서성 태원부의 서북 60 리에 있었던 지명이다.

고구려의 강역은 많이 축소되고 왜곡되어 있긴 하지만, 남북조 시대의 북주(北周)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周書)>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고구려의 땅은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요수(遼水)를 건너 2000 리이며 남쪽으로 백제와 접해있고 북쪽으로 천 리를 가면 말갈과 인접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대사기속편(大事記續編)>과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그리고 <통전(通典)>과 <통지(通志)> 그리고 <문헌통고>에는 “고구려는 수나라 때에 이르러 동서 6천 리였으며 살수(薩水)에서 30 리를 가면 평양성이 있다.(至隋東西六千里薩水去平壤城三十里)”고 하고 있다.

압록강 경계 서쪽 강역도 재고돼야

이러한 고구려의 강역을 대조영이 회복하는 과정의 전투가 바로 천문령 전투이기 때문에 천문령이 고구려 말기의 강역인 산서성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 전성기의 발해 지도 - 이 지도는 축소된 신라와 대진의 강역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광종(光宗) 원년(732년)에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자사 위준(韋俊)을 죽이고 산동성의 등주(登州)와 래주(萊州)를 취하여 성읍(城邑)으로 삼자 당나라 현종이 분노하여 군사를 보내 쳐들어왔지만 이로움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광종 2년(733년) 수비장군 연충린(淵忠麟)이 말갈과 더불어 요서(遼西)∙대산(帶山)의 남쪽에서 당나라 오랑캐를 크게 쳐부수었으며, 당은 신라와 더불어 밀약을 하고 동남쪽의 여러 고을을 급습하여 천정군(泉井郡)에 이르자 임금께서 조서를 내려 보기(步騎) 2만 명을 보내 그들을 격파하였는데 이때에 큰 눈이 내려 신라와 당나라 군사 중에 얼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하였다.

앞선 지도에는 천정군이 원산만 아래에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정군의 위치를 그곳에 비정한 것은 도대체 당나라에 현대의 전투기나 공수부대가 없을진대 어떻게 동해안에 나타나 발해와 싸울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다.

<삼국사기. 잡지>에는 “정천군(井泉郡)은 본래 고구려 천정군(泉井郡)이었는데, 문무왕 21년(681)에 빼앗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치고 탄항관문(炭項關門)을 쌓았다. 지금(고려)의 용주(湧州)이다. 영현이 셋이다.” 라고 되어 있다.

기존 사학계의 이론으로는 고구려는 이미 668년에 망했고 발해는 699년에 건국되었다.
681년이면 도대체 누구와 싸워서 그 땅을 빼앗았는지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또한 그렇게 빼앗은 땅을 50년이 지난 뒤 당나라와 연합을 하여 발해를 공격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는 무리하게 지명의 비정을 한반도로 몰아넣다 보니 웃지 못 할 일이 발생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진의 당나라나 신라의 전투지역을 중심으로 본 대진의 강역과 대흥 45년(781년)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당(唐)나라 군사에 항거를 하자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돕도록 하였다.”고 하여 50 여 년간 중국의 산동성∙ 하남성∙하북성 일부 지역에 제(齊)나라를 세우고 통치를 할 수 있도록 도운 세력이 바로 대진이며 이 제나라를 도울 수 있는 지역에 대진이 위치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발해의 서쪽 강역은 이 일대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인안(仁安) 17년(737년)에 송막(松漠)에 12성을 쌓고, 또 요서(遼西)에 6성을 쌓으니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이 되었으며 폭원이 9천 리나 되었으며 이때에 당나라와 왜 그리고 신라가 더불어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으며 천하가 대진(大震)을 일컬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하였다.

해동성국이라 불리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진국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발해사람 셋이면 범 한 마리를 당해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진 사람들은 용맹하고 임금과 백성은 화평하고 즐거워하였으며 역사를 논하고 의를 즐기었으며 오곡이 풍년이 들고 나라 안이 평안하였으며 ‘대진6덕의 노래’가 있어 이것을 아름답게 노래하였다.

또한 안민현(安民縣)에 감로(甘露)가 내려 서압록하(西鴨綠河) 위쪽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738년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를 가르쳤으며 환단의 옛 역사를 강론하였다. 문사에게 명하여 국사 125권을 편수하게 하였으며 문치(文治)는 예와 악을 진흥시키고 무위(武威)는 여러 오랑캐들을 복속시켰다. 태백현묘의 도(太白玄妙之道)가 백성들에게 감화되었으며 홍익인간의 교화가 만방에 미치게 되었다.

▲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KBS 대하역사드라마 '대조영'    


"발해사람 셋이면 범 한 마리 당해낸다"

발해 아니 나라의 이름마저 잃어버린 나라 대진.
대진은 중국의 변방도 아니며 속국은 더더욱 아니다.

후대의 우리의 식자들이 당나라의 문물이 융성하여 정관의 치니 개원의 치니 하면서 칭송을 하면서도 정작 해동성국의 명성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고구려에게 무릎을 꿇은 당태종의 시대가 어떻게 정관의 치가 되며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어지러운 세상이 어떻게 개원의 치가 될 수 있겠는가?

대진이 당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니라는 것은
당나라가 무력으로 대진과 싸워 이긴 적도 없으며, ‘장차 대조영을 책봉 하려고 할 때에 거란과 돌궐이 해마다 변경을 쳐 들어와서 사신이 가지 못하였다’고 한 <신당서>의 기록은 당나라가 발해에 대한 영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대진은 고구려를 이은 천손민족의 후예로서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하였으며
9000 리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명실상부한 해동성국이었다.
따라서 우리 민족사의 당당한 부분으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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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4/26 [10:2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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