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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역사소설 내용을 교과서로 만든 일본(7/8부)
 
편집부 기사입력  2012/05/24 [17:02]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52년~1912년)은 일본의 제122대 천황(재위:1867년~1912년)이다. 휘는 무쓰히토(睦仁)이며 유소년기의 궁호는 사치노미야(祐宮)이다. 일본의 황권을 강화시켜 일본 제국으로 발전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1894년 청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연달아 승리한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하였다.

1889년(메이지 22년)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일본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의 개혁정책을 연호를 따 메이지 유신이라 부르며 일본의 근대화를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한 군주로 평가된다. 1868년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 일본의 연호는 천황이 새로 즉위할 때만 바뀔 수 있다는 원칙)를 택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재위 기간을 메이지 시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메이지 대제(明治大帝), 메이지 성제(明治聖帝), 무쓰히토 대제(睦仁大帝, Mutsuhito the Great) 등으로도 부른다. 1867년부터 1912년까지 재위했다.

1867년(게이오 2년) 1월 30일에 아버지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면서 1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즉위 초반 그를 추대한 일부 훈신들이 선황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곧 묻혀졌다. 막부의 전횡에 의분을 느낀 일부 개화무사와 개화사상가는 즉위 초반의 그에게 친정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고, 천황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판단한 그는 막부 세력을 제압하고 친정을 할 계획을 세운다.

안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던 19세기 후반의 에도 막부는 도시에서 진행된 상업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쇄국령에 맞선 페리 제독의 내항을 전후로 진행된 개국으로 혼란에 접어들었다. 1867년(게이오 3년)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과 조슈 번(야마구치 현)이 막부 토벌 동맹을 맺기에 이르자 약체화된 막부의 고민은 커졌고, 결국 막부가 붕괴하기 전에 정치권력을 조정에 돌려주겠다고 조정에 제의했다. 조정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약 300여 년에 걸친 에도 막부는 종언을 고했다.
 
▲ 군대를 사열하고 있는 메이지 일왕은 일본군국주의의 상징     © 운영자


메이지 시대의 개막과 일본의 근대화

메이지 천황은 1868년 9월부터 일세일원(一世一元)을 결정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했다. 이어 1869년(메이지 2년)에는 에도(江戶)를 도쿄(東京)로 고치고 도쿄로 옮겨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소유였던 도쿄 성을 궁성으로 정하고, 판적봉환을 허락했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폐번치현을 단행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다른 한편 1870년(메이지 3년)에는 신도를 국교로 정하고, 제정일치를 선포하는 조서를 발표하고 신도의 국교화와 천황의 '신격화'를 추진해 나갔다.

영국과 미국 등의 서구 사절단의 화려한 외모에 매료된 그는 신문물 개방의 뜻을 펼친다. 이때 막부 세력이 독단적으로 개항을 추진하여 반막부세력의 반발을 샀으나, 그는 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는 관주도(官主導)의 개발, 자본력 육성과 정치력, 군사력 강화에 치중하였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실시하여 각 번주가 다스리던 지역을 천황이 직할하도록 바꾸었고, 1872년 서구식으로 학제를 공포하였다. 1873년(메이지 6년)쯤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신정부에 널리 퍼진 정한론을 둘러싸고,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와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 사이에 대립이 벌어지자 메이지 천황은 칙서를 내려 사이고의 조선 파견을 중지해 대립이 퍼지는 걸 막았다. 이에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이고를 포함한 일부 인사가 사직하면서 유력 인사를 잃긴 했지만, 신정부는 이후 국내 개혁에 힘을 기울여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다. 또한 1874년(메이지 7년)부터 이어진 자유민권운동에 맞닥뜨리자 1881년(메이지 14년)에 국회 개설의 칙유를 내려 의회 창설 시기를 명시하는 등 노력으로 운동이 격화하는 걸 막았다.

1890년 일본 제국 귀족원 의회에 참석한 메이지 1882년(메이지 15년)에는 군대를 천황의 군대로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발표하였으며 군비의 증강에 노력했다. 1884년(메이지 17년) 이후에는 머지않은 의회 창설에 대비해 입헌군주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내각제도, 시정촌(市町村)제, 부현제, 군제 등의 제정과 함께 전국에 걸친 관료지배체제를 정비하고 막대한 황실 재산도 마련했다. 1885년에는 내각제를 채택하였다.

1889년(메이지 2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흠정헌법의 성격을 가진 대일본제국 헌법을 마련해 입헌군주국으로 한걸음을 더 내디뎠다. 황족의 예를 서술한 《황실전범》(皇室典範)을 서술, 편찬하였으며 1890년(메이지 23년) 교육칙어를 내려 천황제 국가를 지탱하는 신민의 배양을 도모했다.

'제국헌법'에서 그는 왕의 국가통치의 정치적 대권과 일본 제국의 육군·해군 군 통수권을 명기하였고, 교육칙어에서는 왕이 국민도덕의 중심임을 밝힘으로써 천황제국가를 유지하는 2대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그해 일본 제국 귀족원 의원을 개설하고, 귀족원 의원의 대표를 선출하게 했다. 최초의 의화인 귀족원의 초대 의장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귀족원 의회에 참석하여 수시로 의회 내용을 참관하였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황권 확립

일본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근대 전쟁인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메이지 천황은 대본영에서 직접 전쟁을 살폈다. 또한 외교적으로는 영일 동맹을 체결하고, 군사적·경제적인 성장을 도모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 1905년 대한제국과 을사 보호 조약을 체결하여 사실상의 속국으로 전락시켰다.

그 뒤 그는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두는 것에 만족하려 하였으나 정한론이 강하게 대두됨에 따라 조선 병합 정책을 추진, 1910년(메이지 43년) 8월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만주로 진출하는 등 일본을 제국주의적 식민국가로 팽창시키는 정책을 채용했다. 1911년(메이지 44년) 개항 이래의 목표였던 불평등조약 개정으로 명실공히 열강의 하나로 성장해 나갔다.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의 연이은 승리는 천황에 대한 국민적 숭앙(崇仰)과 존경심을 더욱 절대적인 것으로 공고히 하였다.

메이지 천황은 1912년(메이지 45년) 7월 30일에 지병이던 당뇨병의 악화로 향년 5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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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5/24 [17:02]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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