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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몽의 高句麗 건국지는 어디인가? (3-1부)
졸본은 산서성 중부 태원시, 국내성은 평요고성, 평양성은 임분시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06/10 [18:24]

(비문) 唯昔 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生 而有聖德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鄒牟王爲我連?浮龜 應聲卽爲連?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번역] 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기초를 세웠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으니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거마를 타고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에 다다랐다. 왕이 나루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잇고 거북이들을 뜨게 하라."하였다. 그 소리에 응하여 곧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들이 물위에 떴다.
그런 뒤 물을 건너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 성산(城山) 위에다 도읍을 세웠다. 세상의 지위를 싫어하시니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 보내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이 홀본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세자 유류왕에게 고명(顧命)하여 도로써 나라를 흥성하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대주류왕이 기업(基業)을 이어받았다.
 
  (해설) 위대한 대제국 고구리의 건국지인 졸본(卒本)이 어디인지 알려면 졸본 이후에 천도했던 다른 도읍이 어디인지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2대 유리명왕이 도읍(졸본)에서 제사를 지내던 중 제물용 돼지가 달아나자 뒤쫓아 국내 위나암(國內尉那巖)에서 붙잡았는데 “그곳의 땅이 비옥하여 산물이 풍부하고 지세가 험해 병란의 걱정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즉 高句麗의 광개토태왕의 도읍지였던 국내성(國內城)은 어디일까?
 
(1) <신당서 열전 145-동이열전>의 고구리
 
  (원문) 高丽,本扶馀别种也。地东跨海距新罗,南亦跨海距百济,西北度辽水与营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谓长安城,汉乐浪郡也,去京师五千里 而赢随山屈缭为郛, 南涯浿水,王筑宫其左。又有国内城、汉城,号别都。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与之合。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한서지리지: 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번역) 고구리는 본 부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땅 동으로 바다 건너 신라가 있고 남으로 바다 건너 백제가 있다. 서북에서(으로) 요수를 건너면 영주와 접하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 그 나라 임금은 평양성 또는 장안성이라 일컫는 곳에 기거하며 한나라 낙랑군 땅이었다. 경사(=장안)로 부터 오천리(?)를 가면 산을 따라 굴곡지게 휘감으며 성곽을 이루고 남쪽 끝에는 패수가 있다. 왕은 그 좌측에 궁궐을 축성하였다. 또한 국내성, 한성이 있는데 또 다른 도읍이라고도 한다.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으로 안시성으로 흐른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요새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이상
 
  (해설) 위 기록을 압축해서 간단히 지리비정을 하면 마자수라고도 불리는 압록수 동쪽에 국내성과 평양성이 있고, 서남쪽으로 안시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즉 압록수변에 국내성, 평양성, 안시성, 서안평이 모두 위치해야 지리비정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식민사학은 압록수를 현 압록강, 국내성을 집안, 평양성을 평양, 서안평을 압록강 하구 단동으로 비정했다. 그런데 국내성(집안)은 압록의 북에 있으며, 평양성(평양)은 압록강이 아닌 대동강변에 있고 안시성은 서만주 요하 강변으로 비정하였으므로 이 지리비정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  <신당서>의 기록을 현 산서성 분하에 대입시키면 정확하게 일치한다.
   <신당서>에 언급되어 있는 압록수는 산서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분하(汾河)이며, 국내성은 평요(平遙), 평양성은 임분(臨分), 안시성은 신강현, 서안평은 황하와 분하가 만나는 하진시로 비정되어진다. 기록의 바다(海)는 황하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대청광여도>에 태원 서쪽에 용산이 있다. <삼성기전>에 환웅이 내려오신 흑수와 백산 사이도 이곳이며, 분하의 시원지인 산서천지가 고대 우리 민족이 말하던 천지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卒本)은 국내성으로 보이는 평요고성(平遙古城)에서 가까운 현 산서성의 성도(省都) 태원(太原)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에 “40세에 왕이 죽으니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태원 서쪽에 용산이라는 산이 있기 때문이다.
 
  태원 서쪽에 루번고성(婁煩古城)이 있는데 이곳이 졸본성 또는 <태백일사>에 언급된 고주몽이 천도한 도읍인 눌현성(訥見城)이 아닌가 싶다. 현 산서성의 성도(省都)인 태원은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로 배달국의 신시(神市)와 조선과 북부여의 도읍지와도 큰 관련이 있을 것으로 확실시된다.
 
중국 인터넷자료에 따르면 루번고성의 축성시기는 BC 400~306년이고 고성의 형상은 장방형으로, 동서 길이가 약 1,000m 남북 약 600m로 사방둘레 3,400m로 총면적이 약 60만㎡이다. 이 크기는 현 자금성의 83% 수준이고 우리 경복궁보다는 1.7배로 월등 크기 때문에, 큰 나라의 국가급 도성이지 작은 제후국의 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루번고성 앞에 있는 활을 맨 석상은 고주몽일 가능성이 높다.
▲   루번고성의 모습 
▲  루번은 대대로 중국의 땅이 아닌 우리 동이족의 영토였다.
 
(2) 高句麗 초기의 다물
 

  추모대제는 년호를 ‘옛 땅을 되찾는다’는 뜻인 다물(多勿)로 하여 활발한 정복전쟁을 펼쳐 행인국과 북옥저를 없앴다. 그리고 이후 高句麗 태왕들은 추모대제의 다물 정신을 이어받아 고토였던 광활한 조선의 옛 강역의 회복을 국가기치로 내걸었다.
 
  2대 유리명제를 거쳐 3대 대무신제로 오면서 옛 강역을 상당부분 되찾는다. 유리명제는 부분노를 시켜 선비(鮮卑)를 복속시켜 속군(屬郡)으로 만들었으며, 한나라 현토군에 속한 고구려현을 빼앗는다.
 
  대무신제의 대표적인 치적은 <고구려사초.략>에는 대무신제의 치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 모본왕 2년(49년) 기사로 나와 있는 “한나라의 북평, 상곡, 태원, 어양을 습격하였다.”는 기록이고, 개마를 토벌하고 동부여와 낙랑국을 멸망시키고 동쪽의 옥저와 낙랑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다. 
 
<삼국사기>에 “대조대왕 3년(55년)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병(漢兵)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구체적인 지명이 생략되어 있으나 이 요성 10성의 지명에 대해서는 <태백일사>가 정확히 밝혀주고 있다.
안시(安市)는 개평 동북 70리,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 석성은 건안의 서쪽 30리,
요동(遼東)은 창려의 남쪽,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 건흥은 난하의 서쪽,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
요택(遼澤)은 황하 북안 왼쪽
 
▲ 안시성과 요서군을 상징하는 백이.숙제의 무덤 발견으로 요서 10성의 위치가 정확히 밝혀졌다.  

<고구려사초.략>에는 대무신제 28년(65년) 개마, 구려 .... 서안평 등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이 위 요서 10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추가로 쌓은 성인지는 알 수 없다. 서안평(西安平)은 한나라와 高句麗가 국경을 이루는 중요한 군사요충지로 사서에 서로 뺏기고 빼앗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8대 신대제 때는 “한나라 대군(10만)과 싸워 말 한 필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명림답부의 좌원대첩이 있었으며, 고국천제 때에는 “베어버린 적군의 머리가 산더미같이 쌓였다”라는 좌원친전이 있었다. 좌원은 번조선의 정권을 강탈한 위만의 손자 우거와 당시 북부여가 접전을 벌이던 국경지대이다. 당시 우거의 도읍은 패수가있는 하남성 제원(濟源)시이기에 좌원은 산서성 남부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알 길이 없다.
  
  <고구리사초.략> 13대 서천대제 5년(274년) 기록에 “진(晋)이 유주(幽州)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平州)로 삼았다. 일설에 범양, 상곡, 북평과 요서를 말하고, 또 일설에는 창려, 요동, 대방, 낙랑, 현토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진의 땅이 아니었다. 교위, 태수, 참군을 가짜로 만들었으니 역시 웃을 일 아니겠는가?”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진(晋)나라는 실제 영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高句麗 영토 일부의 행정구역 개편과 관리를 임명했다는 역사왜곡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하겠다. 쉽게 얘기하면 대한민국에서 이북5도 도지사를 임명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위 기록에 언급된 유주, 평주(주)와 북평, 상곡, 태원, 어양, 요서, 요동, 범양, 낙랑, 현토(군)와 안시, 개마, 구려, 서안평, 창려, 대방(현) 등은 과연 어디일까? 

▲ 본문에 나오는 지명이 거의 이 지도 안에 들어있다.
  
  高句麗에는 이렇듯 화려한 과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천태왕 19년(246)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도성인 환도산성이 함락 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고, 봉상왕 5년(296)에는 모용부의 모용외가 서천제의 무덤을 파헤치다 돌아간 적도 있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高句麗는 미천대왕의 중흥기를 맞이하다, 고국원왕 때 전연의 모용황이 쳐들어와 미천대왕의 릉을 파헤쳐져 시신을 가져가고 태후와 황후가 사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기도 한다. 고국원제는 41년(371)에 백제의 영웅 근초고/근구수왕에게 평양성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비극을 맞기도 한다.
 
  근초고왕에게 산서성 남부인 요서(遼西)군과 진평(晋平)군을 잃고 북으로 밀려난 高句麗는 소수림제와 고국양제의 중흥기를 거쳐 드디어 민족의 대영웅 광개토대제가 나타나기에 이르는 것이다. 광개토대제가 즉위하자마자 처음 치르는 전투가 비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유명한 관미성(關彌城) 전투이다. 백제 진사왕은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사냥터에서 듣고 놀라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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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6/10 [18:2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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