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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 영락대통일의 의미 (8부)
조선의 땅을 수복하고, 통치이념인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실현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09/12 [17:39]
나. 예의 북쪽과 접한 옥저 = 해주 = 해(海)
 
예(濊)의 북쪽에 접한 옥저는 해성현(海城縣) 또는 해주(海州)로 불리었다. 중국은 지명인 해주의 海자를 바다로 해석하는 역사왜곡을 수도 없이 저질러왔다. 그리고 중국의 사서 기록에 무수히 나오는 海는 황하, 큰 호수, 넓은 벌판, 운해(雲海)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해주가 과연 어디일까?

(번역) 해성현 : 주와 진나라 때는 조선(현)에 속했으며, 한나라 때 현토군에 속했고, 후에 바뀌어 낙랑군에 속해 동한 때 도위를 설치한 이래로 옥저에 봉해진다. 위나라 때는 모주에 속했으며, 진과 수나라 때는 고명려, 당나라 때 평고옥을 개주에 속했고, 발해로 들어가서는 남해부로 했으며, 요 때 해주남해군을 설치했다. 금 때 등주로 고쳤으며, 원 때는 요양로에 속했고, 명 때 소주위를 설치해 요동도지혼사사에 예속시켰고, 청 순치제 때 해성현을 설치해 요양부에 속하게 했다. 봉천부로 바꾸어 민국 때 요녕성 요심도에 속하게 했다. (주: 20세기 민국 때 해성현이 요녕성으로 지명이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海城县 : 周秦属朝鲜,汉属玄菟,后改属乐浪,东汉置都尉,以封沃沮,魏属牟州,晋及隋属高名骊,唐平高玉,。属盖州,入渤海为南海府,辽置海州南海军。金改澄州,元属辽阳路,明置少州卫,隶辽东都指挥使司,清顺治间置海城县,属辽阳府,寻改属奉天府,民国因之,属辽宁省辽沈道。清置,详海原县条。
 
(번역) 해주 : 본 옥저국의 땅으로 고구리 때 사비성 또는 비사성으로 했는데 혹은 비사성으로 잘못되어 있다. 발해 때 남경산남해부, 도독옥청초삼주라 불렸으며, 요 때 해주 남해군을 설치했고 임명현을 해주의 치소로 했다. 금 때 등주로 바꾸었고, 원 때 주와 현을 모두 폐했다. 명 때 이곳을 지키는 해주를 설치했는데 지금의 요녕성 해성현에서 다스렸다. (이상은 요녕성으로 바뀐 연혁)
동위 때 청주를 해주로 고쳤으며 치소는 용저에 있었는데 (지금의 강소성 동해현 남쪽) 수나라 때 동해군으로 바꾸어 도로 해주로 복귀했고 치소는 구산에 있었다. (즉 지금의 동해현이다) 송나라 때 해주를 동해군이라 말했으며 일찍이 동해로 치소를 옮겼다. (지금의 강소성 동해현 동북이다) 후에 서해주를 구산으로 바꾸었고 다시 해주로 복귀했다가 원 때 해주로를 해녕부로 바꾸었다가 해녕주로 강등했다. 명나라 초기 성의 구산현을 해주로 복귀했다가 청 때 직례.강소성으로, 민국 때 동해현으로 바꾸었다. (이상은 강소성으로 바뀐 연혁으로, ( )는 역사왜곡을 위한 설명이다)
(원문) 海州 : 本沃沮国地,高丽为沙卑城,亦曰卑沙城,或讹为卑奢城,渤海号南京产南海府,都督沃晴椒三州,辽置海州南海军,又置临溟县为州治,金改澄州,元州县皆废,明置海州卫于此,即今辽宁省海城县治。
 东魏改青州为海州。治龙沮,在今江苏东海县南,隋改国东海郡,寻复为海州,治朐山,即今东海县治,宋曰海州东海郡,尝移治东海,在今江苏东海县东北,后改置西海州于朐山,寻复改为海州,元升海州路,改为海宁府,又降为海宁州,明初省朐山县,复曰海州,清直隶江苏省,民国改为东海县。
 
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해성현과 해주에 대한 연혁에서 해성현과 해주가 역사왜곡을 위해 현재 요녕성 요동반도로 지명이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옥저는 고대 동해로 불렸던 발해(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큰 내륙호수) 부근 황하 북부 하남성과 산서성 동남부에 있었는데, 명나라와 중화민국 때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또한 일제가 조작한 비문의 신묘년 기사의 해(海)는 현해탄이 아닌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임이 확실하다. 
 
▲ 낙랑군에 속한 옥저 땅은 산서성 동남부와 황하 북부 하남성의 동부 일대
 
 
다. 한·예(韓穢)의 한(韓)은 어디인가?
 

   수묘인연호에 한·예(韓穢)가 같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한(韓)과 예(穢)는 서로 가까운 지명임이 틀림없다. 한은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쫓겨 한지(韓地)로 달아나 그곳에서 한(韓)을 세우고 자신의 성을 한씨(韓氏)로 바꾸고 40대 선조인 기자(箕子) 이하 모든 자기 조상을 왕으로 추존한다. 이것이 조선왕조에 의해 기자조선 천년의 역사인 것이다. 이 한이 나중에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삼한(三韓)으로 나뉘는 것이다.
 
청주 한씨 대부분은 본향(本鄕)을 충북 청주시 상당(上黨)구로 알고 있으나, 이는 청주 한씨의 중시조되는 분이 한반도로 넘어오면서 정착한 지역을 상당으로 붙인 것뿐으로, 원래 상당은 산서성 동남부에 있었다. 상당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찾아 중요 부분만 번역하기로 한다.
 
(원문) 上党郡 : 战国韩地,秦并天下,置上党郡,其地有今山西之东南部,以其地极高,与天为党,故名。汉治长子,在今山西长子县西,后汉末董卓作乱,治壶关城。在今山西长治县东南,晋治潞。在今山西长治县东南,晋治潞。在今山西潞城县东北,燕慕容备移治安民城。在今山西襄坦县东北,后迁壶关城,卽汉末旧治也,后魏治安民,复迁壶关,北周于郡置潞州,隋置上党县为郡治,卽今山西长治县治,宋时郡废。《铜熨斗齐随笔》:汉书地理志,上党郡,秦置,属并州,案上党于战国时,盖在韩魏之间,西周策犀武败于伊关,周君之魏求救,魏王以上党之急辞之,綦毋恢见魏王曰,秦悉塞外之兵与周之众以攻南阳而两上党绝矣,此时上党,盖属魏也。又韩赵易地,樊馀谓楚王曰。韩兼两上党以临赵,卽赵羊肠以上危,此时上党盖属韩也。曰两上党,意尔时上党必有两地。如楚之东西不羹者,史记韩也家。桓惠王十年,秦击我于太行,我上党郡守以上党郡降赵。十四年,秦拔赵上党,是上党已属赵矣。又曰二十六年秦拔我上党,可见上党之非一地,故有两上党之称,而上党之置郡,亦非始于秦矣

(번역) 상당군 : 전국시대 한의 땅으로 진시황이 천하를 병합하고 상당군을 설치했는데, 산서성 동남부 장자현 서쪽에 있다. 후한 말 동탁이 난을 일으킨 치소 호소성은 장치현 동남이고, 진나라 치소인 로는 산서성 로성현 동북이다. 연나라 모용비가 치소를 안민성으로 옮겼는데 산서성 양탄현 동북이고 후에 호소성으로 옮겼다. (이하생략)
 
산서성 동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에 살던 한맥(韓穢)의 사람들로 하여금 수묘(守墓) 즉 능(陵)을 지키게 하였으니 광개토태왕의 태왕릉(太王陵)도 만주 길림성 집안이 아닌 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산서성 남단 황하변에 있는 영락진(永樂鎭)에 세워졌던 영락궁이 광개토호태왕께서 계셨던 곳이 확실하다 하겠다.  
 
▲ 광개토호태왕을 위한 별궁으로 추정되는 영락궁     © 편집부

 
결언(結言)
 
이상과 같이 비문에 대해 알아보았듯이,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주 무대는 국사교과서에 서술된 것처럼 만주 일대가 아니라 중원의 황하변 부근이었으며, 서쪽으로는 감숙성과 청해성까지 다스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반도에는 그의 신하였던 유주자사 진이 와서 묻혔고, 장수왕이 세운 중원고구려비와 경상도 양산에서 호태왕 井자 문양이 새겨진 토기가 발견되었으니 그 또한 高句麗의 강역이 아니겠는가?
 
즉 광개토호태왕은 동쪽 한반도부터 중국대륙 대부분을 통치했던 위대한 정복군주였다. 백제와 신라, 왜와 후연까지 통치하에 두었으나 멸망시키지 않고 독자적인 체재를 인정해주며 고구려대연방의 일원으로 두었다. 이를 영락대통일(永樂大統一)이라 하는데, 조선의 통치이념인 ‘홍익인간 제세이화’를 실천한 위대한 지도자였던 것이다.
 

광개토태왕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高句麗의 후예 아틸라의 행적으로 보아, 중국대륙에서 서쪽으로 더 나아가 중앙아시아를 지나 유럽동부까지 진출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사료를 아직 발굴하지 못해 그를 단정지울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하겠다. 

 
▲ 광개토태왕 때 조선이 망하면서 열국으로 갈라졌던 나라들이 모두 복속되어 대통일이 이루어졌다.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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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9/12 [17:39]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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