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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한사군 400년 역사의 허구 (1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만이 망명한 패수와 기준의 도주로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09/25 [09:57]
 
본 글은 지난 5월 25일(토) 종로구민회관에서 열린 다움 삼태극 카페(http://cafe.daum.net/mookto) 학술대회에서 발제되었던 내용을 시리즈로 나누어 연속으로 게재합니다.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은 우리 역사 최대의 치욕이라 할 수 있는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서 400년 이상 존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단군조선의 뒤를 이은 천년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위만조선이 BC 108년 한나라 무제에게 망해 그 땅에 낙랑·현토·임둔·진번이라는 식민지 한사군이 설치되었고, 400년 이상 지속되다가 고구려 미천왕 때야 소멸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한사군 이론은 일제에 의해  집대성되어 조선민족의 역사는 이민족에 의한 식민지배의 역사로 시작되므로 지금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로까지 발전되고 강조된다. 그렇게 조작된 식민지배의 역사가 아직도 국사교과서에 실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되고 있는 현실이다. 
 
과연 그런지 먼저 식민지 한사군의 종주국인 한나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BC 206년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무제 때 전성기를 이루는 등 214년간 지속되다가, AD 8년 재상이던 왕망에게 망해 신나라가 들어서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전한 또는 서한이라 한다. 이후 신나라는 15년간 지속되다가 23년 왕망이 유방의 후예인 유수에게 죽임을 당해 멸망한다.
 
25년 유수가 황제로 추대되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후한 또는 동한이라 한다. 후한은 이후 175년간 존재했으나 잦은 왕위교체와 외척·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혼란하고 나라의 힘이 없었던 시기였다. 후한은 220년 황건적의 난으로 망하고 위·오·촉 삼국으로 나눠져 서로 싸우다가, 280년 서진에 의해 잠시 통일되었다가 304년부터 5호16국이 난립하는 사분오열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과연 이런 상태에서 한나라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400년 이상 굳건하게 존재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특히 종주국 한나라가 220년 본토에서 멸망해버린 상태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가 약 100년이나 더 존재했고, 또 한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위·오·촉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느라 식민지를 돌볼 겨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세게 식민지 한사군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로 보인다. 

▲ 중국의 서한 때 한사군 지도     © 편집부
 
▲ 중국의 한사군 지도와 차이가 없는 우리의 한사군 지도  


가. 한사군전쟁 후 설치된 한사군
 

1. 한사군전쟁의 자초지종
     
한사군전쟁에 대한 기록은 우리 기록이 거의 없으므로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을 참조할 수밖에 없다. <사기 조선열전>은 ① 한사군전쟁 직전의 역사적 배경 ② 한사군전쟁의 자초지종 ③ 한사군전쟁 후의 논공행상과 처벌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기록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 <북부여기>의 기록을 비교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참고로 원문은 생략하고 간단한 주석과 함께 번역문만 게재한다.
 
(1) 한사군전쟁 이전의 역사적 배경 
 
(번역)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의 전성기 때부터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킨 뒤 요동의 바깥 변방까지 소속시켰다. 한나라가 일어났으나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부속시켰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부장인 위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남쪽 이족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갔다.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땅이었으나 지금은 비어 있는 상하 운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조선의 남쪽 이족 및 옛 연과 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왕이 되었으며,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때가 한나라 2대 효혜 황제와 그 모후인 고후(=여태후)의 시대로서 천하가 안정되었다. 
 
요동태수는 위만을 바깥 신하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다. 국경 밖 남쪽 이족을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남쪽 이족의 여러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기에 천자(=한무제)도 이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었다. 그 주변의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이상) 
 
▲  도적인 위만을 고조선의 계승자로 표기한 동북아역사재단 홈피의 설명은 동북공정을 도와주고 있다

   (해설) 상기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은 <북부여기>에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말하는 사학계의 주장이 잘못이라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시조 해모수단군 “31년 임진년(BC209) 진승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연과 제 그리고 조나라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해 감독케 하였다”
 
“38년 기해년(BC202) 연나라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서 경계선을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이다” “45년 병오년(BC195)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해모수 단군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해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했다”
      
2세 모수리 단군 “원년 정미(BC194) 번조선 왕 기준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인 위만에게 패망한 뒤 海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 두 기록에서 공통으로 말하고 있는 상하의 운장, 조선, 패수가 어디인지 알아보려면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에 속한 낙랑군에 대한 아래 기록을 참조하면 되는데, 운장에 있는 낙랑군에 조선현과 패수현 등 25개현이 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낙랑군의 위치를 알면 상·하 운장이 어디인지 저절로 알 수 있다. 낙랑군이 어디인지는 패수현의 위치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뒤에 상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참고로 중국은 역사왜곡을 위해 낙랑군에 속한 조선현을 단군이 다스리던 나라 조선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기에 그 오역에 주의를 기하는 바이다. 현토군에 속한 고구려(高句驪)현을 나라 고구리(高句麗)로 고의적으로 오역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 식민사학과 재야사학의 잘못된 위만의 망명로 및 기준의 도주로      © 편집부
    
     
이어지는 <사기 조선열전>에는 한나라와 우거가 벌인 한사군전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시말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북부여기>에서의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과 고구리의 전신인 북부여 사이에 일어난 공방에 대한 기록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이 기록에 우리 고대사의 중요한 지명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북부여와 번조선의 경계에 있는 서압록, 고구려현, 해성, 살수, 좌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즉 중국 기록을 통해 한사군전쟁이 일어난 위치를 알면 북부여와 고구리가 과연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기록에 나오는 고진은 고주몽의 증조부로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 원년 신유년(BC120)에 고구려라는 지방의 제후로 봉해진다. 고진의 손자 불리지가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유화부인을 만나 정을 통해 고주몽이 임인년(BC58) 5월 5일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고구려현이 나중에 한사군으로 둔갑하는 현토군에 속한 현이 되는 것이다. 그곳이 과연 어디일까? 
 
<북부여 >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조의 기록
* 신유 원년(BC120)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득이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로 삼았다.
* 계해 3년(BC118) 우거의 도둑떼가 대거 침략하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 리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 갑자 4년(BC117)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 달이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 병인 6년(BC115) 단제께서 몸소 오천 정예군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수에 이르니 구려하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 정묘 7년(BC114) 목책을 좌원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녀에 두어 뜻하지 않는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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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9/25 [09:57]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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