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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요서의 위치를 밝혀준 백이·숙제 두 무덤 (3부)
유주의 위치를 찾게 해준 요서군의 고죽성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10/11 [13:45]
 
지난 (1부)와 (2부)에서는 1976년 북한 땅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무덤의 주인공은 광개토태왕 때 유주자사를 지낸 신하였고, 그가 다스렸던 유주는 중국대륙 한복판인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한 지명비정을 확실하게 해주는 기록 중 하나가 바로 아래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유주(幽州)에 속한 요서군(遼西郡)에 속한 14개현 중 하나인 고죽성(孤竹城)이 있는 영지(令支)현인 것이다. 즉 이 고죽성의 위치가 밝혀지면 요서군의 위치가 밝혀지고, 아울러 유주가 어느 지역인지도 밝혀진다 하겠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번역) 진나라 때 설치되었고, 작은 하천이 48개가 있는데 총 3,046 리이다.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72,654호이고 인구는 352,325명, 14개현이 있다. 해양, 신안평, 유성, 영지, 비여, 임유현 등이다. 마수산은 유성현 서남에 있고, 영지현에 고죽성이 있다. 현수가 비여 동쪽에서 유수로 들어가고 유수는 남쪽에서 해양현으로 들어간다. 당취수(압록수)는 도하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도대체 위 지명들은 어디에 있는 지명들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로 국한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교과서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교과서 내용은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허구의 식민사학의 엉터리 이론일 뿐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일제식민사학의 허구를 지적해온 재야사학계도 학자에 따라 지금까지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를 자신의 판단대로 임의로 비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두 이론 공히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수년 전에 한 유적의 발견으로 명백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그 유적은 고사리를 캐먹다 죽은 것으로 유명한 고죽국의 두 왕자 백이·숙제의 무덤인 것이다.
 
백이·숙제는 사마천이 쓴 <사기 열전>에 맨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물론 시대적으로 앞서는 인물이라 그럴 수도 있으나, 열전에 가장 먼저 기술된 이유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상이 바로 백이·숙제와 같이 도덕적으로 깨끗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백이·숙제의 기록으로부터 많은 역사적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다. 특히 중국과 일제가 지워버리고 말살한 옛 조선과 고구리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를 유추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사서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그 영토가 어디였는지 그 기록이 전부 지워졌으나, 백이·숙제는 <사기 열전>에 맨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라 그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다. 
 

▲ 청절지사로 <사기 열전>에 맨 처음 등장하는 고죽국의 두 왕자 백이와 숙제 
  
▲ 2008년 필자에 의해 산서성 서남단 황하굴곡지점에서 발견된 백이.숙제의 두 무덤     ©편집부


    
백이와 숙제는 누구인가?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로 백이(伯夷)가 장남이고, 숙제(叔齊)가 셋째 아들이었다. 고죽국의 왕인 고죽군(孤竹君)은 셋째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고죽군이 세상을 떠나자 숙제는 “비록 부왕께서 저를 후사로 정하셨더라도 형님이 살아계시는데 제가 어찌 그 자리를 잇겠습니까? 형님께서 뒤를 이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맏형인 백이에게 양위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네가 왕위를 잇는 것이 부왕의 뜻이다. 내가 이어받을 이유가 없다.”하고는 고죽국을 떠나버렸다. 숙제도 끝까지 왕위에 오를 것을 거부하고는 역시 떠나버렸다. 그래서 결국 왕위는 둘째 아들에게 돌아갔다.
 
고국을 떠나 동해변에 살다 세월이 흘러 늙어버린 그들은 주(周)나라 서백창(西伯昌)이 노인을 잘 대접한다는 말을 듣고 몸을 의탁하기 위해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막상 주나라에 도착해보니 이미 서백은 죽었고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 서백을 문왕(文王)으로 추존하고는 그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殷)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동쪽으로 진군하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무왕의 수레로 달려가 말고삐를 잡고는 “아비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쟁터로 떠나시니 그것을 어찌 효(孝)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하의 몸으로 군주를 죽이려하니 그것을 어찌 인(仁)이라 하겠나이까?”라고 간언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무왕의 신하들이 그들의 목을 치려하자 곁에 있던 강태공이 “그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니 살려주어라”하면서 구명해주어 백이와 숙제는 무사히 그 자리를 빠져나오게 되었다.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모두가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겼으나 오직 백이·숙제만이 무왕의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저버린 일을 용서하지 않았다. “주나라를 섬기는 것은 수치로다. 의(義)를 지키어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을 수 없노라.” 이렇게 결심하고는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며 살게 되었는데, 머지않아 그들은 굶어 죽게 되었다. 그 때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리는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로 연명했노라 (登彼西山兮菜其薇矣)
폭력으로 폭력을 대한 것을 무왕은 모른다 (以暴易暴兮不知其非矣)
신농·순·우·성왕의 길을 잃은 우린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神農.虞.夏忽焉沒兮我安適歸矣)
아, 우리의 목숨은 이제 끝나가노라. (于嗟徂兮命之衰矣)
 
<사기>를 쓴 사마천은 사람으로써의 인(仁)과 의(義)를 지킨 백이·숙제가 굶어죽는 비극과 극악했던 도척이라는 자가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비교하며 “과연 천도(天道)란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고 자책하고 있다. 
 
▲ 조가(하남성 기현)에 있던 은나라를 공격한 주 무왕의 진군로     © 편집부
  
              
고죽국은 어떤 나라인가?
 
중국에서는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말하고 있으나, 그게 아니라 고죽국은 엄연히 조선의 제후국이었다. 그 근거로는 행촌 이암선생이 쓴 <단군세기>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22세 색불루 단군 때인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이에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기록되어 있고,
 
또한 36세 매륵 단군 때인 "B.C 653년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를 연(燕)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알리니 제나라가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어 고죽국과 연나라와 제나라는 매우 가깝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죽국은 조선의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위 <단군세기>의 기록은 <사기>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언급이 되어 있어 <단군세기> 기록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제나라 환공 23년에 북방의 만족(蠻族)인 산융(山戎)이 연나라를 침공하게 되자 연나라는 곧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고 그것을 응낙한 환공은 연나라에 출병하여 멀리 만족을 고죽(孤竹) 땅까지 몰아내고는 군사를 돌렸다.” 여기서의 만족과 산융은 바로 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사기>의 기록에 제나라 환공은 여러 나라들의 회맹(會盟)을 주도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미 남으로 소능(召陵)까지 원정하여 웅산(熊山)을 보았고, 북으로는 산융(山戎)과 이지(離枝)와 고죽(孤竹)까지 토벌했다. 서쪽으로는 대하(大夏)를 토벌코자 사막을 넘어간 일도 있었다.” 즉 제나라의 북쪽 경계가 고죽이란 말이다. 제나라가 남쪽까지 원정한 소능은 지금의 하남성 정주 밑에 있는 탑하(漯河)시이며, 북쪽인 고죽은 지금의 산서성 남부 운성(運城)시의 서쪽인 영제(永濟)시이다. 따라서 제나라는 황하변 하남성 주변에 있던 나라였던 것이다. 이런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중국의 주장은 명백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주 무왕의 쿠데타를 막으려했던 백이·숙제는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자 천륜을 저버린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지 않겠다하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결국은 굶어죽었다.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지키려했던 그들이 굶어죽은 수양산에 대한 기록이 사서에 많이 남아있다. 그 기록으로부터 우리는 진시황이 쌓은 장성의 위치를 유추해낼 수 있으며, 따라서 조선과 고구리의 강역이 어디까지였는지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 조선이 고죽군과 함께 점령한 빈·기는 섬서성 서쪽, 제 환공이 말한 남쪽 소릉은 하남성 탑하시, 북쪽 고죽은 산서성 서남단에 있지 않고서는 위 기록이 나올 수 없다.     

 

 곧 (4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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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0/11 [13:4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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