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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론과 똑같은 한국사학계의 한사군 이론 (2부)
한반도의 3/4을 차지한 한사군이 그려진 중국지도에 분개하는가?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10/16 [18:07]
 
1. <인터넷 백과사전>에서의 한사군에 대한 설명
 
아래 <인터넷 백과사전>의 설명도 대한민국의 국사교과서와 마찬가지이며,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이론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사실이다. 
 
“약 1년에 걸친 전쟁 끝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BC 108년 고조선의 옛 땅에 낙랑(樂浪)·진번(眞蕃)·임둔(臨屯)의 3군(郡)을 설치했고, 이어 BC 107년에는 20여 년 전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던 예맥의 땅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했다. 그리하여 4군을 유주(幽州) 관할 아래 둠으로써 오랜 야욕이던 동방경략을 완성했다. 한나라는 4군의 산하에 많은 현(縣)을 두고 중앙정부에서 군의 태수(太守)·현령(縣令)을 직접 파견해 다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토착세력이 한나라 군현에 대한 저항을 격렬하게 했다. 이에 한은BC 82년에 4군 가운데 진번과 임둔의 2군을 폐하고, 진번의 속현들은 낙랑군에 합치고 임둔의 속현들은 현도군에 속하여 관할하도록 했다. 따라서 수현(首縣)인 조선현(朝鮮縣)을 비롯해 패수(浿水)·점제(黏蟬)·수성(遂成) 등 11개현으로 출발했던 낙랑군은 진번군의 속현 15개를 추가로 관할하게 되어 외형상 군세(郡勢)가 크게 증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낙랑·현도 2군에 귀속된 진번·임둔의 속현 전체에 대한 지배는 이미 군현의 통폐합 당시에도 어려웠다.
 
즉 통합된 다수의 속현에 한의 관리가 파견되지 못하고 토착세력의 수장이 지방관리로 임명되어 군현의 업무를 대행했다. 군현이 통폐합된 이후에도 군현 지배에 대한 토착세력의 반발은 계속되었으며, 특히 예맥 땅 현도군에서의 저항이 심했다. 결국 BC 75년에는 임둔의 속현들을 넘겨받았던 현도군이 고구려족의 반발에 밀려 군의 치소인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압록강 중류지역에서 서북 방면으로 옮겼다.
 
현도군은 옛 임둔군의 속현에 대한 관할권을 낙랑군에 넘기고 스스로도 고구려·상은대(上殷臺)·서개마(西蓋馬) 3개현의 45,006 호와 인구 22만 명을 거느리는 보통 규모의 군으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현도군의 치소였던 옛 고구려현의 자리는 예맥계의 중심세력으로 새롭게 부상하던 고구려의 중심부가 되었다.
 
한편 옛 진번군의 15현을 넘겨받았던 낙랑군은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가 어느 정도 가능한 대방(帶方)·열구(列口) 등 7개현만으로 낙랑 남부도위(南部都尉)를 구성했다. 현도군의 축소로 옛 임둔군의 속현마저 군의 관할로 넘겨지자 낙랑군은 지배력 행사가 가능한 동이(東夷) 등 7개현만을 다스리는 낙랑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나머지 8현은 방기했다.
 
2차에 걸친 군현의 통폐합으로 고조선 옛 땅에서의 중국 군현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는데, 고조선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낙랑군의 세력은 오히려 증대되었다. 당시 2개의 도위를 거느린 낙랑군은 25개의 현에 62,812 호, 인구 406,748 명의 큰 군이었으며, 주변 토착세력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구려·예(濊)·한(韓) 등 토착세력의 성장과 반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고구려족의 저항에 밀려 치소를 서북 방면으로 옮겼던 현도군은 고구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푸순[撫順] 방면으로 치소를 옮김으로써, 본래의 기능이었던 예맥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중국이 양한(兩漢) 교체기의 혼란에 빠져 이전과 같은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못하게 되자 낙랑군과 현도군의 세력은 현저하게 위축되어갔다. 

▲ 한반도의 3/4을 차지한 서한의 한사군이 그려진 중국지도에 분개하는 한국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후한(後漢)의 광무제가 25년에 즉위해 지방 세력을 평정해갔는데, 이 당시에 낙랑군에서는 토착민인 왕조(王調)가 주도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세력은 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왕조를 대장군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라고 부르며 후한의 지배를 거부했다. 지방 세력의 평정을 끝낸 후한 정부가 30년에 왕준(王遵)을 태수에 임명하고 군사를 주어 반란의 진압을 명하자, 낙랑의 한인 속관들은 사태의 추이를 감지하고 왕조를 죽여 반란을 진압했다. 이로써 낙랑군은 비록 반란을 진압했으나 세력은 크게 약화되어 동부도위가 폐지되고 남부도위는 유명무실해졌다.
 
자립한 동부도위 산하의 7현 거수(渠帥)들은 낙랑에 의한 현후(縣侯)의 임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매개로 낙랑과의 교역을 계속함으로써 자체의 성장과 발전을 꾀했다. 7개현의 자립으로 말미암아 낙랑군은 18개 성(城), 61,492호에 인구 257,050 명의 규모로 위축되었다. 낙랑군 주변의 고구려·옥저·동예·백제 등의 성장은 낙랑군의 약화를 재촉해, 후한 말기인 2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남부도위에 속했던 둔유현 이남의 옛 진번 7현의 토착민이 한·예 땅으로 대량 이주해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후한말의 혼란을 틈타 요동의 지배자가 된 공손씨(公孫氏)가 현도군뿐만 아니라 낙랑군도 자신의 지배 아래 두게 되었다. 또 낙랑군 둔유현 이남의 땅에 새로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고 흩어졌던 주민을 다시 끌어 모으는 등 동방 경영에 힘을 기울여 낙랑군을 비롯한 중국 군현세력은 일시적이나마 세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공손씨의 멸망 후 낙랑군과 대방군은 위(魏)나라의 군현이 되어 지원을 받으며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던 동예를 정벌하여 복속시키고 백제와는 통혼관계를 맺는 등 주변세력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후한의 군현축소정책, 공손씨·위·서진(西晉)으로 이어지는 군현 지배세력의 계속된 교체로 한나라와 같은 중국 중앙정부에서의 지방관리 파견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낙랑·대방 등에서 군현관리가 점차 토착인들로 대체되었고, 결국 중국 군현으로서의 성격과 기능을 점차 잃어갔다.

더욱이 후한 때부터 본격화된 고구려와 백제 등의 국가성장은 낙랑군·대방군 지배하의 토착민들을 동요시켜, 고구려와 백제로 이주하게 함으로써 군현의 힘을 갈수록 약화시켰다. 서진에 이르러 낙랑군은 6개의 통현(統縣), 3,700호의 명목상 군에 불과하게 되었다. 4세기에 들어 북중국이 5호16국 시대라는 대혼란기에 빠져들면서 서진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고구려는 낙랑·대방에 대한 공략을 보다 적극적으로 했다.
마침내 313년에는 낙랑군이, 314년에는 대방군이 차례로 고구려에 멸망당함으로써 한반도 내의 중국 군현은 소멸되었다. 요동사람 장통(張統)의 지휘 아래 저항하던 2군의 민호 1,000여 가(家)는 요서의 모용씨에게 투항했고, 남은 민호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가거나 백제·신라 등으로 옮겨갔다. 한편 고구려에 의해 푸순 방면으로 쫓겨간 현도군은 요동군에 속했던 3개현을 넘겨받고 속현을 7개로 늘리고 군민(郡民)의 수를 증대시켰다.
 
이같이 군세를 회복한 현도군은 중서부 만주의 부여와의 연계를 강화해 요동군과 함께 요동 방면으로 고구려의 세력 확대를 막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세력 확대에 따라 현도군은 계속 위축되었다. 서진시대에 이르러 현도군은 고구려·망평·고현 등 3개현에 3,200호를 거느린 소군(小郡)에 불과하게 되었다. 서진 멸망 후 현도군은 선비족 모용씨의 왕조 전연(前燕)에 속했다가 고구려 광개토왕의 요동 경략 때 고구려의 영역에 편입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소멸되었다.” (이상)  
 
▲ 고구려가 있을 때의 위나라의 낙랑군과 대방군 중국지도를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는 한국인들

     
  위 백과사전의 설명은 그야말로 역사소설 같은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한사군이 2개 군으로 통합된 후 “한의 관리가 파견되지 못하고 토착세력의 수장이 지방관리로 임명되어 군현의 업무를 대행했다”면서 한나라가 식민지를 토착인에게 위탁관리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설명과 “현도군이 옮겨가고 옛 치소였던 고구려현의 자리가 고구려의 중심부가 되었다”는 말과 “2차에 걸친 군현의 통폐합으로 중국 군현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는데, 고조선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오히려 낙랑군의 세력은 증대되었다”는 이야기가 과연 성립될 수 있는지? 정말로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또한 “유명무실해진 한사군 자리에 공손씨가 나타나 대방군까지 설치해 낙랑군을 비롯한 중국 군현세력이 일시적이나마 세력을 회복했다”와 “공손씨 멸망 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위(魏)나라의 지원을 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면서도 “지배세력의 계속된 교체로 중국 중앙정부에서의 지방관리 파견이 사실상 불가능해 중국 군현으로서의 성격과 기능을 점차 잃어갔다”는 설명을 믿어야 하는 건지????
 
간단히 종합하자면 한사군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설사 존재했더라도 중국 본국의 힘이 강했을 때 잠시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다보니 군이 통폐합되어 토착인에게 위탁관리를 했고, 그 세력이 강했다가 약했다가 고무줄 같이 탄력적이라는 등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설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런지 역사적 기록을 하나하나 더듬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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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0/16 [18:07]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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