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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조선열전> 한사군 전쟁의 자초지종 (3-2부)
한사군 전쟁은 승자는 없고 패자만이 있는 전쟁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11/15 [10:45]
아래는 한나라 무제 때 한사군전쟁을 직접 종군한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을 번역한 것으로 해설과 더불어 2부로 나누어 게재한 하편입니다.  
 
(반역자들의 항복) 좌장군이 양군을 합친 뒤 맹렬히 조선을 치니 조선의 상(=장관) 로인과 상 한음, 니계상 삼, 장군 왕겹이 모여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에는 누선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있다. 좌장군 혼자 군사를 합해 전투는 더욱 맹렬해졌다. 맞서 싸우기 두려운데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로인과 한음과 왕겹이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로인은 가는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 여름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그래도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이가 (한나라에 항복함을) 반대하여 다시 군리를 공격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항복한 상 로인의 아들 최를 시켜 백성을 달래고 성이를 죽이게 하였다.
 
(조선5군의 설치) 이로써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으로 했다(以故遂定朝鮮爲四郡). 삼을 봉해 홰청후, 한음은 적저후, 왕겹은 평주후, 장은 기후로 삼았다. 최는 아버지(로인)가 죽었으나 큰 공이 있었으므로 온양후로 삼았다.
 
※ (해설) 한나라의 마지막 총공세에 겁을 집어먹은 조선의 대신들과 장군들이 결탁해서는 한나라에 투항하고 만다. 니계상 삼이 우거 왕을 죽이고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검성은 성이 장군의 분전으로 함락되지 않았다. 우거 왕의 아들 장과 로인의 아들 최가 성이장군을 죽이자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조선이 평정되고 만다. 이들은 우리 역사 최초의 민족반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반역자들의 무리에 우거의 아들인 장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자신의 나라를 망하게 한 대가로 나중에 한나라로부터 제후인 기후에 봉해진다.
 
이러한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이 나중에 중국 사가에 의해 곡필 왜곡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위 <사기>의 기록을 약 180년 후에 나온 <한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르게 적고 있다. “마침내 조선을 멸해 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하였다” 즉 조선을 평정(定)했다는 것이 조선을 멸망(滅)시킨 것으로 바뀌며, 위 자치령 조선오군(홰청·적저·평주·기·온양)이 식민지 한사군(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사마천은 한사군전쟁을 직접 종군한 사람이다. 그런 사마천이 눈으로 직접 보고 적은 <사기>의 내용을 후대에 반고가 <한서>를 쓰면서 한사군이 설치되었다고 임의로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이후 사서들도 모두 따라 적고 있어 마치 유철(한무제)이 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한 것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 중국이 그린 한사군 설치도는 충청도와 강원도까지 포함되어 있다.     © 편집부
  

 (참전 장수의 처형) 좌장군을 불러,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략을 어긋나게 한 죄로 기시하였다. 누선장군은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에 이르렀으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함에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었다가 많은 병사를 잃어버렸으므로 죽이는 것이 마땅하나 속전을 받고 서인으로 삼았다.
 
(사마천의 총평) 태사공은 말한다. 우거는 험고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섭하는 공을 속이다가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누선은 장수의 그릇이 좁아서 난을 당하고 죄에 걸렸다. 번우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을 다투다 공손수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결국 양군이 함께 치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제후가 된 사람이 없었다. (兩軍俱辱 將率莫候矣) <이상> 
 
※ (해설) 당시 군을 지휘했던 육군사령관격인 좌장군 순체와 수군사령관격인 누선장군 양복이 모두 기시라는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한나라가 번조선과의 전쟁에서 참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쟁에 참패하고도 그 땅에 식민지 한사군이 설치되었다고 하는 것은 후세 사가들의 붓장난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사군전쟁을 직접 종군한 사마천이 눈으로 직접 보고 적은 <사기 조선열전>의 마지막 문구는 매우 완곡한 춘추필법으로서 “한사군 전쟁은 치욕을 당한 참패한 전쟁이다”라는 표현이다.
 
원래 전쟁이 끝나고 나면 논공행상을 하는 법이다. 전쟁에 승리한 장졸들의 공을 치하해야만 다음 전쟁에서 승리를 기약할 수 있는데, 상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극형을 받은 장수들만이 있는 이 전쟁은 과연 누구 이기고 누가 진 전쟁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그 전쟁의 결과로 식민지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 한사군 전쟁에 참전했던 한나라 관계자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 특히 전투를 지휘했던 두 장수를 극형에 처한 것을 보면 누가 이긴 전쟁인지 알 수 있다.       © 편집부
 
▲ 기시란 형벌은 참수한 시신을 저잣거리에 전시해 백성들이 보도록 하는 극형이다.   

 
(3) 한사군전쟁 이후의 우리 기록

① <삼성기전 상> 계유년(B.C108) 한나라 무왕 때 군사를 움직여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 했다.
② <북부여기 상>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 13년 계유년(B.C108) 한나라 유철(한무제)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사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투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해설) 위 ①~④ 기록은 한사군전쟁 직후 고두막한의 의병활동에 대한 기록이다. 한나라가 우거왕의 번조선을 멸망시킨 후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하려 했으나, 그 지역주민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고두막한을 도왔다는 기록으로 한나라의 식민지 한사군 설치가 결코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하와 분하가 만나는 곳인 현 하진시에 있는 옛 고리국 땅인 서안평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아 더욱 그렇다. 이후 BC 86년에는 유민들과 힘을 합쳐 한구들을 연파했고, 한나라의 수비 장수까지 사로잡을 정도였으니 한사군은 사실상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③ <북부여기 하> 5세 고두막 단군 계유 원년(B.C108)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조선의 47세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의 후손이라 한다.
을해 3년(B.C106) 단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아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리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④ <북부여기 하> 5세 고두막 단군 22년 갑오(B.C87)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 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⑤ <북부여기 상>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 34년 갑오(B.C87)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람을 시켜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라고 하니 단제께서는 매우 곤란해졌고 마침내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이에 동생인 해부루가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들이 이를 매우 어렵게 여겼다. 이 때 국상인 아불란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잘 열립니다. 도읍을 둘만한 곳입니다”라고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라 하며 또는 동부여라고도 한다.
 
⑥ <북부여기 하> 5세 고두막 단군 23년 을미(B.C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북부여 5세 단군)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漢寇)와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⑦ <삼성기전 상> 을미년(B.C86) 한나라 소왕 때 (고두막한이)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동명이라 나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 
 
(해설) 한사군전쟁 21년 후인 BC86년 고두막한은 한구를 연파하고는 ⑤~⑦과 같이 군사력을 앞세워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을 윽박질러 북부여의 도성을 빼앗고 북부여의 단군 제위마저 찬탈한다. 만일 의병장 출신 고두막한이 한나라의 한사군 설치를 막아내지 못했더라면 아마 고구막한은 군사력의 태반을 잃었을 것이고, 대부여(조선)를 계승한 북부여까지 군사력을 앞세워 밀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나라 군대를 연파하고 그 지역주민들을 모두 규합했기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고, 의병활동이 거의 끝날 무렵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부여란 나라까지 찬탈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식민지 한사군이 제대로 설치될 수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한 무제가 자신의 조국을 배신하고 투항한 5명의 조선 대신들에게 그 지역의 제후로 봉하기는 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낙랑 땅에 있던 낙랑국이 한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바로 옆에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역자인 5명 대신들이 받은 봉지에 낙랑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서>의 기록과 같이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식민지 한사군 설치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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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1/15 [10:4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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