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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의 대가로 한나라 제후가 된 반역자들 (4부)
식민지 한사군으로 둔갑한 자치령 조선5군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11/29 [10:31]
 
자신들의 두목(우거)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한 반역자들은 그 대가로 번조선의 땅을 나누어 봉지로 받고 한 무제의 제후가 된다.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이로써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으로 했다. 삼을 봉해 홰청후, 한음은 적저후, 왕겹은 평주후, 우거의 아들 장은 기후로 삼았다. 최는 아비(로인)가 죽었으나 큰 공이 있으므로 온양후로 삼았다.(以故遂定朝鮮爲四郡 封參爲澅淸候 陰爲荻苴候 唊爲平州候 長降爲幾候 最以父死頗有功爲溫陽候)”라고 기록했다.
 
위 <사기>의 기록에는 눈을 씻고 봐도 식민지 한사군의 대명사인 낙랑군이 보이지 않는다. 낙랑군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180년 이후에 나온 반고의 <한서>로 다음과 같이 다르게 기록했다. “마침내 조선을 멸해 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했다(遂滅朝鮮爲樂浪玄免臨屯眞番)” 즉 조선을 평정(定)했다는 것이 조선을 멸망(滅)시킨 것으로 바뀌며, 위 자치령 조선오군(홰청·적저·평주·기·온양)이 식민지 한사군(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5군의 제후들의 이름까지 모두 삭제해버렸다.
 
홰청, 적저, 평주, 기, 온양 즉 나중에 한사군으로 조작되는 조선오군의 땅이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봉지는 위만과 우거가 통치하던 번조선의 영토였다. 식민사학계는 이곳을 한반도 북부라고 말하고 있으며, 재야사학에서는 그러한 이론을 반도사관이라며 맹비난하면서 하북성 동부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런지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 지금까지 제각각인 한사군 위치 비교도     © 편집부
▲ 현재의 강단사학계와도 다른 이병도의 죽기 전 한사군도.     © 편집부

중국의 오나라 사람 위소가 <사기>에 붙인 주는 다음과 같다.
왕겹을 봉한 평주는 양부에 속한다,
장을 봉한 기는 하동에 속한다.
한음을 봉한 적저는 발해에 속한다,
삼을 봉한 홰청은 제에 속한다,
최를 봉한 온양은 제에 속한다.
 
1) 평주(平州)는 어디인가?
 
먼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평주를 검색하면 “진나라 때 유주에서 갈라지고 창려에 치소가 있었고, 전연 때는 양평에, 후연 초기에는 용성 후기에는 평곽에, 전진 때는 화룡에, 후위 때는 비여에, 수·당나라 때는 북평군이라 말했으며, 원나라 때는 영평부로 바꾸고 노룡에 치소를 두었다 (晋分幽州置 治昌黎, 前燕置 治襄平, 后燕置 初治龙城 后治平郭, 前秦置 治和龙, 后魏置 治肥如, 隋置唐因之亦曰北平郡, 元改为兴平府 治卢龙)”라고 나타난다.
 
유주, 양평, 비여, 북평군, 노룡 등의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평주는 유주의 요서군 일대 즉 산서성 남부 운성시의 서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북평군은 요서군에서 떨어져 나간 행정구역으로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이고, 양평은 요서군의 동쪽인 요동군에 속한 현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유주)。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노룡)。莽曰令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絫。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2) 장을 봉한 기(幾)가 속한 하동(河東)은 어디인가?
 
하동은 말 그대로 황하의 동쪽으로 산서성 남부를 말하는 것이다.
 
3) 한음을 봉한 적저(荻苴)가 속한 발해(渤海)는 어디인가?
 
 
발해는 산동성과 하북성과 요녕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재 중국의 내해가 아니라, 고대의 발해는 하남성과 산동성 경계에 있던 크기 가로 100리 x 세로 300리의 큰 내륙호수인 대야택을 말하는 것으로 고대 중국에서는 동해라고도 불렀다. 참고로 발해는 1920년대에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 되었고, 일제식민사학은 이러한 발해를 동만주에 있는 경박호라고 하면서 대조영의 나라를 만주 일대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또한 발해는 유주에 속한 발해군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래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발해군은 발해의 북쪽에 있는 산서성 동남부와 황하 북부 하남성의 동부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勃海郡 발해군) 高帝置。莽曰迎河。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二十五万六千三百七十七,口九十万五千一百一十九。县二十六:浮阳,莽曰浮城。阳信,东光,有胡苏亭。阜城,莽曰吾城。千童,重合,南皮,莽曰迎河亭。定,侯国。章武(장무),有盐官。莽曰桓章。中邑,莽曰检阴,高成,都尉治也。高乐,莽曰为乡。参户,侯国。成平,虖池河,民曰徒骇河。莽曰泽亭。柳,侯国。临乐,侯国。莽曰乐亭。东平舒,重平,安次,脩市,侯国。莽曰居宁。文安,景成,侯国。束州,建成,章乡,侯国。蒲领。侯国。
 
▲ 발해는 하남성과 산동성 경계에 있는 대야택     © 편집부
▲ 우거의 땅은 산서남부와 북부 하남성 일대 즉 유주.     © 편집부
 
 
4) 최를 봉한 온양(溫陽)이 속한 제(齊) 땅은 어디?
 
제에 속한 온양은 황하북쪽에 있는 지금의 하남성 초작시에 있는 온현의 북쪽이다. 원래 양(陽)이란 글자는 북쪽이란 뜻이 있다. 온현은 왕옥산에서 발원한 패수가 제원시를 지나 황하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5) 삼을 봉한 홰청(澅淸)이 속한 제(齊) 땅은 어디?
 
흔히 제나라는 산동성 임치에 도읍을 둔 큰 나라였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 역시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된 것으로, 실제는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었던 자그마한 도시국가로 봐야 한다. 제나라의 도읍이 있었던 곳은 강태공의 고향인 위휘현이고, 주 무왕의 군사(軍師)였던 강태공은 사방 백리의 땅을 봉지로 받고 제나라의 시조가 된다.
 
강태공의 고향을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번역) “강태공의 고향은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 서북 12km에 있다. 강태공은 B.C 1210년 음력 8월 초삼일 위휘현 태공천진 여촌에서 태어났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강태공의 서거는 주 강왕 6년 10월 20일로 139세였다. 장례는 위휘현 태공촌에서 치렀다. 지금의 태공촌 경내에는 강태공묘, 강태공 사당, 강태공여망표 등이 있다.”
(원문) “姜太公故里,位于河南省新乡卫辉市西北十二公里处。公元前1210年农历八月初三,姜太公诞生于卫辉太公泉镇吕村。据《竹书纪年》上说,姜太公仙逝于“周康王六年”十月二十日。终年一百三十九岁。葬于卫辉太公泉。至今太公泉境内还保留着许多姜太公的历史遗迹,其中较为著名的有:姜太公墓、姜太公祠、姜太公庙、姜太公吕望表等。”
 
▲ 제나라가 있던 하남성 위휘현에 있는 강태공의 묘     © 편집부
▲ 산동성 임치에 조성한 가짜 강태공 묘.     © 편집부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주 무왕의 아들인 성왕(成王)이 아직 어릴 때 주위에서 반기를 들자 성왕은 강태공에게 “동쪽 동해(東海)로부터 서쪽 황하(黃河)까지 남쪽 목릉(穆陵)으로부터 북쪽의 무태(无棣)까지 이 모든 지역의 제후들은 각자의 소신대로 반란군을 정벌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다. 주나라의 동서남북이 어디인지 보이는 대목인데, 여기서의 동해가 바로 발해(대야택)인 것이다. <사기>에는 “강태공은 동해(東海) 출신”이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강태공의 고향 위휘현은 발해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는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고 말해 제나라의 종주국인 주나라도 그 영토가 천리를 넘지 못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주나라의 도읍은 하남성 낙양이었다. 어떻게 하남성 동쪽 끝인 대야택 너머에 있는 산동성이 제나라의 영토가 될 수 있으리오! 산동성은 바로 조선의 땅이었으며, 산서성 남부 역시 당시 백이·숙제의 나라로 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고죽국이 있던 곳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따르면, “(위만은) 점점 전쟁을 벌여 진번조선·만이와 옛 연·제를 복속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제나라 땅도 정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무제가 우거를 반역한 신하들에게 제후의 봉지로 주었던 이유는 그곳이 애초부터 한나라의 땅이 아니었고, 도읍인 장안에서 거리가 멀어 직접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거늘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식민지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중에 어불성설인 것이다.
 
▲ 황화변에 있던 작은 연·제·노를 지명이동시켜 동이족의 역사강역을 대륙 밖으로 밀어냈다.     © 편집부
▲ 원래 황하변에 있었던 한사군이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 됐다.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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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1/29 [10:31]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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