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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비정과 백제의 진실
위풍당당 백제 동성대왕의 역사는 어디로 갔을까?
 
신완순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12/07 [20:01]
 
고려인삼의 원산지가 중국 '요동'이라는 기묘한 주장

몇해 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충청남도 주최로 열린 ‘고려인삼의 역사 문화적 가치 재조명을 위한 국제학술 심포지엄’에 발제자로 나선 웨이쯔강 박사(중국 중산대)는 “역사적으로 고려인삼 원산지가 중국의 요동(遼東)”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웨이 박사는 이어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의 유민들이 대량 남하하여 한반도로 갔는데  그때 고구려성에서 인삼을 한반도로 가져가서 재배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와 고려 왕조를 구분하지 않고 고구려 경내가 원산지인 인삼을 ‘고려삼’ 혹은 ‘신라삼’으로 기재 했으며, 또 ‘요삼(遼參)’으로 부르기도 했다.”며 “중국 남조 양(梁) 때의 도홍경(陶弘景)이 483년 《신농본초경집주》라는 책에서 고려 즉 요동이라고 썼다.”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인삼에 대하여 위에서 웨이 박사가 인용한 책 등에 기술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나라 육우(陸羽)가 편찬한 《다경(茶經)》의 상편에서 말하기를 “인삼 중의 상품은 상당(上黨, 현 중국의 산서성)에서 생산되며, 중품은 백제 신라에서 나며 하품은 고려(고구려)에서 나고 택주, 이주, 유주, 단주 등에서 나는 것은 약의 효과가 없다.”라고 하여 품질의 등급을 떠나 백제와 신라 등에서도 이미 인삼이 생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웨이 박사가 고려인삼을 중국의 동북공정의 논리로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고 웨이 박사가 인용한 책의 뒷부분은 생략한 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설득력이 없으며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 산서성 요주 일대 지도. 상당, 기산, 유사 등이 보인다     ©편집부


필자가 주목하는 지명이 상당(上黨)이다. 기자(箕子)의 후손이라는 우리나라의 한(韓)씨의 본관이 바로 상당이라 불린 충청도 청주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송나라 라필(羅泌)이 찬한 《로사(路史)》와 1734년 교간된 《산서통지 山西通志》에 기록된 기자와 요주(遼州)에 관한 글을 보면 우리 역사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로사>에서 기(箕)에 대하여 말하기를, “기자의 선조인 기백(箕伯)이 다스린 소국이다. 춘추시대에는 오히려 기(箕)를 숭상하는 나라가 있었다. 은나라의 기(圻)는 오늘날의 태원이다. 오늘날 요주 유사현 동남 30리에 옛 기성(箕城)이 요산(遼山)에 있다.”라고 하고 있으며,

《사기》권38 송(宋) 미자세가 편의  송나라 배인(裴駰)이 주석한 집해에서 마융의 말을 인용하여 “기(箕)는 나라 이름이며 자(子)는 작위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산서통지》에서 "요주에는 요양산(遼陽山)과 요산이 있으며, 요주의 유사현에는 기산(箕山)과 기성이 있으며 주나라 때 은나라의 기자가 갔던 곳이며 기백의 후손이 대대로 통치하던 지역이라고 하고 있고 기자의 사당이 있다"고 하여 위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바로 이 지역이 위에서 말한 좋은 인삼이 생산된다는 상당이다. 우리 고대사의 가장 뜨거운 논쟁 중의 하나인 ‘기자가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고 조선으로 갔다.’는 그 조선은 지금의 요녕성이나 한반도의 평양이 아닌 산서성 요주 부근의 기국(箕國)에 가서 은거했으며 이곳을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고 있다. 
 
위나라 기마병을 일거에 쓸어버린 백제 동성대왕

▲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사신  
요동과 요서를 보다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백제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북조 시대의 양나라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양직공도(梁職貢圖)>에는 백제의 사신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사신과 함께 그 나라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백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백제는 옛 래이(萊夷). 마한의 종족이었다. 진(晉)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경략하고 있을 때에 백제 또한 요서 진평현을 두었다.”라고 되어 있으며,

<북사(北史)>에는 “백제는 대방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으며 진나라 때부터 송(宋), 제(齊), 량(粱)나라 시기에 양자강의 좌우에 자리 잡고 있었고 또한 사신을 보내고 번(藩)을 칭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며, “여창(위덕왕)을 ‘사지절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삼고 후에 ‘지절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로 삼았다.”라고 되어 있다. 

백제에 대한 기술된 사서 중에서 <남제서(南齊書)>의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대왕 편에는 “10년(488)에 위(魏)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라고만 되어있다. 이에 대해 <남제서>에는, “이 해에 위나라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의 경계를 공격하여 모대(牟大 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 군사를 습격하여 하여 크게 무찔렀다.”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건무2년(495년)에 동성왕이 사신을 보내 표문에 이르기를 ‘지난 경오년(490년)에 험윤(여기서는 북위를 말함)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이 쳐들어 왔으나, 사법명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역공을 하여 밤에 번개같이 들이치니 허둥대며 죽어가며 도망치는 모습이 마치 바닷물이 들이쳐 쓸어버리는 것 같았으며, 그 기세로 추격하여 적군을 베니 시체가 온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로 이제 나라가 편안해져 사법명과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에게 작위를 주었으니 이것을 정식으로 인정하라는 동성대왕의 표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남제서>는 동성대왕이 제수한 낙랑태수와 성양태수, 조선태수, 광양태수, 대방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등의 일곱 태수를 임명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이는 백제의 동성대왕이 북위의 기마병을 과거 동남아에 몰아닥친 지진해일(쓰나미)처럼 전격적으로 일거에 몰살시켰다고 하는 기사인데, 충청도 전라도에 있던 백제가 어찌 바다 건너 대륙에 있는 군사들과 싸워서 대첩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삭제되거나 또는 후세에 수정된 북위의 '더러운 역사'

또한 백제에 8대 성(姓)씨가 있었다고 북사와 수서에 기록되어 있다.
후한(後漢) 때의 《풍속통의》와 《잠부론》그리고 송나라 때의 《백가성》등을 근거로 1994년 중국의 진명원, 왕종원 등이 편찬하여 북경출판사에서 간행된 《중국성씨사전》에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와 8대 성씨에 관한 기록들이 보이는데 그 성씨들이 남아 있는 지역이 동성대왕이 임명한 일곱 태수의 지역과 겹치며 현 한반도에 백제의 8대 성(姓)이 거의 없는 것과 비교하면 좋은 대조가 된다.

백제와 관련하여 지역을 고찰하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양직공도>에서 언급한 래이는 산동성과 하북성 인근에 있었던 단군조선의 한 갈래를 표현한 것이고, 대방은 산서성 요주 부근의 둔유현 이남 지역이며, 요서는 산서성 요주의 서쪽을 말하는 것이며 동청주는 현 산동성 지역을 나타내고 또한 양자강 유역을 점거하고 있었다 하니 
 
이는 동성대왕의 일곱 태수가 있던 지역과 8대 성씨가 남아 있던 지역과도 일치하며, 현 중국의 하북성, 산서성,  산동성, 강소성과 절강성의 일부 유역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강성했던 백제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이후로 가장 강성하였으며 백제는 동성대왕 이후로 가장 강성하였는데, 이때의 중국의 나라는 남북조 시대로서 사분오열되어 있었으며 이 당시의 가장 중요한 사서인 <위서>와 <남제서>가 실전 또는 삭제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백제에게 대패를 당한 북위라면 당연히 그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함에도 남아 있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북위의 <위서>는 위나라가 망하고 북제(北齊)의 위수(魏收)가 550년대에 114권으로 편찬했으나 당시 사람들이 <위서>를 예사(穢史, 더러운 역사 또는 예맥의 역사)라고 불렀으며, 114권 중에서 29권이 실전되어 수나라 때 다시 위담 등에게 명하여 별도로 편수하게 하였다. 이후 당 태종 연간에 진숙달이 <오대사>를 지었는데 모두 전하지 않아 후대에 <남사>와 <북사>, <통감> 등의 여러 사서를 알 수 있는 부분만을 교정하여 청나라 건륭40년(1775)에 교간된 것이기 때문이다.

남제서 또한 언제 누구에 의해서 삭제된 채로 남아 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고의로 자행된 것임이 분명하다. 무엇이 두려워서 왜 삭제하였을까?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
▲ 중국측이 고의로 삭제한 남제서. 너무도 치욕적인 기록이라 삭제햇을 것이다.     © 편집부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기준에 따라 뒤바뀌는 백제역사

우리가 백두대간을 한반도의 척추라 말하는 것처럼, 중국 사람도 산서성의 태항산맥(太行山脈)을 중국의 척추라고 한다. 모든 사물과 일에는 근간을 이루는 핵심이 있다. 근간을 무엇으로 하는가에 따라서 결과는 판이하게 나타난다.

우리 고대사에 있어서 가장 논란이 되는 기저에 요동과 기자가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 역사의 맥의 근간은 요동의 정의와 위치 비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동을 잘못 비정함으로서 역사의 강역과 판도가 뒤틀리고 어그러지게 되었다. 산서성의 요주가 요동과 요서의 기준이 되며 기자가 간 곳이 바로 이 곳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한, 영원히 요서백제를 찾을 길이 없으며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강역 역시 풀어낼  길이 없다.

요동을 후대의 사가들이 하북성 동쪽으로 또는 현 요하의 동쪽으로 비정하고 있으며, 
기자가 간 지역을 한반도로 우겨넣음으로서 우리 역사의 강역을 축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가 하루 속히 바로잡히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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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2/07 [20:01]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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