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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 우거와의 한사군전쟁에서 참패한 한무제 (4부)
<사기 조선열전> 지리멸멸 패전만 거듭하는 한나라 군대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12/12 [11:45]
 
위만은 조선의 일부였던 번조선 기준 왕의 정권을 탈취한 도적이었으나, 대한민국 사학계는 위만을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중국 기록에는 그런 강도 위만에 대해 생몰미상이고 그의 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위년도만 나온다. 위만(卫满, B.C194~B.C161 재위), 아들 위몽(卫蒙, B.C161~B.C129 재위), 손자 위우거(卫右渠, B.C129~ B.C108 재위)
 
그러나 우리 <북부여기>에 따르면 위만은 B.C 195년에 번조선으로 망명하고, 3세 고해사 단군조에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 몸소 기병과 보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려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고, 4세 고우루 단군 원년(B.C120) 신유년에 손자 우거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할 때 20살 정도로 본다면 약 90살가량 오래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보니 위만의 아들에 대한 기록이 없고 손자 우거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위만은 스스로 번조선의 왕이 되기는 했으나 원래 번조선의 상국이었던 북부여와는 적대관계로 바뀌고 오히려 핏줄이 같은 한족인 한나라에 친화적이었다. 위만은 이족(夷族)들이 한나라의 변방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의 군장들이 한나라를 찾아가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나라의 외신(外臣=제후)이 됐다. 이를 배경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한 위만은 주변 지역을 복속시켜 사방 수천 리를 세력권에 넣게 되었다.
위만의 손자 우거가 왕위에 오르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적대관계였던 북부여에 대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공세를 폈다. <북부여기>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조에 따르면 “계해 3년(B.C118) 우거의 도둑떼가 대거 침략하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해 해성 이북 50리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고, 이듬해인 갑자년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달이 걸려도 이기지 못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우거의 세력이 상당히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우거의 번조선이 이처럼 강력해지자 한나라에서 망명하는 백성들이 대단히 많아지게 됐다. 게다가 기고만장해진 우거는 한나라 무제를 알현하지도 않을뿐더러, 진번(眞番) 주변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한 무제를 알현하는 것조차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했다. 즉, 한나라에 예속되지 않는 완전한 독자정권임을 스스로 천명한 것이었다.
 
▲ 중국이 그린 위만조선(위 지도)과 일치하는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위만조선 지도.     © 편집부
 
 
B.C 109년 우거의 이러한 독자행보에 괘씸함과 분로를 느낀 한나라 무제는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 우거의 이러한 행동을 꾸짖으면서 또한 달래려 했으나, 우거는 끝내 한 무제의 명령조차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조정에 실패한 섭하는 한나라로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浿水)에서 울화통이 치밀었는지 마부를 시켜 환송 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여 버린다.
 
섭하는 국경인 패수를 건너 요새로 도망친 뒤 한 무제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했고, 한 무제는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섭하에게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라는 벼슬을 내리고 그곳을 지키게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번조선의 우거가 군사를 보내 섭하가 지키고 있던 곳을 기습 공격해 섭하를 죽여 버린다. 우거가 이에는 이 칼에는 칼로 즉각 보복한 것이었다. “한나라, 하나도 안 무서우니 한번 붙어보자”며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한 무제는 대노하며 죄수들을 모집해 번조선을 공격하게 했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게 했다. 또한 좌장군 순체(荀彘)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요동으로 출격시켜 우거를 토벌토록 했다. 드디어 한나라와 번조선 사이의 전쟁 일명 ‘한사군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우거 역시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한나라 군대의 공격에 대응했다. 한나라 좌장군 순체의 부장인 졸정다(卒正多)가 요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으로 출정했으나 싸움에 크게 패했다. 군사는 흩어지고 졸정다도 도망쳐 왔으므로 군법에 따라 참형(斬刑)에 처했다. 초전부터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고 만 것이다. 선봉장이 참형까지 당한 것으로 보아 보통 참패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 패수를 청천강으로 보고 그린 강단사학계의 한사군전쟁도. 일부 재야사학에서는 왕검성을 하북성 창려로 보고 있다.
▲ 패수의 현재 모습. 위만이 망명하며 건너고, 한사군전쟁의 주 무대이며 국경이었던 패수는 과연 어디일까?    

한나라의 누선장군 양복은 7천 명의 제(齊) 땅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다. 우거는 왕검성을 지키고 있다가 양복이 이끄는 군사가 적음을 알고는 바로 성에서 나와 공격하자 누선장군의 군사들은 크게 패해 흩어져 도망치기 바빴다. 누선장군은 많은 군사를 잃고 10여 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이 패전으로 양복은 종전 후 기시(棄市)라는 극형을 언도받으나 벌금을 내고 서인(庶人)으로 강등 당한다. 좌장군 순체도 조선의 패수서군(浿水西軍)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 없었다. (주: 패수서군=패수상군 즉, 패수는 상류인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
 
한나라 무제는 두 장군의 전세가 결코 유리하지 않아 승산이 없다고 여겼다. 사자 위산(衛山)을 보내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게 했다. 우거는 한 무제의 사자를 보고 머리 숙여 사과하며 "항복하기를 원했으나 두 장군이 신을 속여 죽일까 두려웠습니다.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므로 항복을 청합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거는 태자에게 한나라에 들어가 무제께 사죄하며 말 5천 필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또한 군량미까지 내어 주었다.
 
병장기를 휴대한 무리 만여 명이 막 국경인 패수(浿水)를 건너려고 할 때 사자 위산과 좌장군 순체는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부왕이 이미 항복했으니 병사들에게 무기를 버리라 명하시오"라고 말했다. 태자 또한 사자와 좌장군이 앞서 섭하가 했던 것처럼 자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해 끝내 국경인 패수를 건너지 않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우거가 기병 5천을 포함한 1만 군사를 중무장시키고 군량미까지 휴대하고 태자로 하여금 한나라로 들어가게 한 것은 아마 위장항복일 가능성이 높다. 진짜로 항복하려 했다면 군량미까지 지참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고, 한나라 측에서 무장해제를 요구했을 때 거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거는 자기 조부 위만이 번조선의 기준 왕에게 “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오니 왕성으로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는 거짓보고를 올려 방심하게 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것처럼 한나라 무제를 기습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 패수를 청천강으로 본 현 대한민국 강단사학계의 한사군 위치도가 과연 옳을까?     ©편집부

 
사자 위산이 돌아와 한 무제에게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보고하니 그러한 우거의 속내를 알 턱이 없는 한 무제는 우거와의 휴전과 선린우호 관계회복에 찬물을 끼얹었다 해 위산을 참수해 버린다. 한 무제는 수하 장수들이 연패를 당하자 전쟁을 일으킨 것을 크게 후회하며 우거와의 휴전을 간절히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거와의 휴전협상이 결렬되자 한나라 좌장군이 패수상군(浿水上軍)을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고, 누선장군 또한 합세해 성 남쪽에 웅거했다. 끝내 우거가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돼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좌장군은 본시 시중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았는데 연(燕)과 대(代)의 군사를 거느렸으므로 굳세었다.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해졌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해(海=황하, 해 지방)로 출정했으나 이미 여러 번 싸움에서 패하고 군사를 잃었다.
 
<사기 조선열전>에 “앞서 우거와의 싸움에서 이미 크게 패했고, 도망한 군사들은 온갖 고통과 치욕을 맛보아 병사들 모두 두려워했고 장수들은 속으로 부끄러워했다(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戰 困辱亡卒 卒皆恐將心慙).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공격하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참패도 보통 참패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그야말로 한나라 군사들은 오합지졸이요 지리멸멸 그 자체였다.
 
 
한사군전쟁의 후반부는 곧 (5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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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2/12 [11:4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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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이병도후손이군 나그네 15/09/22 [14:29]
한사군이 지금 대동강에 있었다고 웃기는 인간이구만 왜놈들이 만든 식민 사관에 물은 이병도 후손들이 조선 정신을 망쳤는데 여기 물든 인간들이 ...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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