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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지고도 설치된 ‘식민지 한사군’ 믿기 어렵다 (5부)
전쟁에서 참패한 육군.수군사령관을 참수한 한 무제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3/12/17 [10:17]
 
수차례 전투에서 계속 패해 도저히 승산이 없음을 간파한 한 무제는 우거에게 휴전을 제의했다가 실패하자 다시 공격명령을 내렸다. 좌장군 순체가 맹렬히 성을 공격하자 계속되는 집요한 한나라의 공격에 겁을 먹은 번조선의 대신들은 누선장군 양복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항복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말만 오고갔을 뿐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이 여러 차례 누선장군과 연합해 공격할 시기를 정했으나 누선장군은 번조선의 대신들과 화해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좌장군 또한 번조선에 사람을 보내 대신들이 항복해 올 때를 기다렸으나, 그들은 누선장군에게 투항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두 장군은 서로 반목하게 됐다. 좌장군은 속으로 “누선이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는데다가 지금은 사사로이 조선과 잘 지내고 있으며, 조선 또한 항복하지 않으니 반역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했으나 함부로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한 무제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수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므로 위산을 시켜 우거를 달래 항복하도록 해 우거가 태자까지 보냈다. 그런데도 위산이 이를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계교가 서로 달라 마침내 약속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두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역시 어긋나고 뜻이 달라 오래토록 결단치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를 보내 이를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리토록 했다.  
 
공손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조선이 항복할 지경에 이른지 오래됐는데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사정이 있어서입니다"고 말하면서, 누선이 여러 차례 싸우러 나오지 않은 것과 평소 생각을 낱낱이 고하면서 "지금 상황이 이와 같으니 누선을 체포하지 않으면 크게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 혼자가 아니라 조선과 함께 우리 군사를 멸할 것입니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공손수가 신표를 보내 누선장군을 좌장군 진영으로 오게 했고, 좌장군의 수하를 시켜 누선장군을 체포하고는 군사를 합친 뒤 한 무제에게 보고하니 화가 난 무제가 공손수를 죽여 버렸다. 
 
▲ 위만이 건넌 강이며 한사군전쟁의 주무대인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강이다 
▲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는 제원시는 옛날 조선현이다. 세 물길이 모이는데 가장 남쪽 강이 추하(패수)이다.     
 
 
육군과 수군을 통합지휘하게 된 좌장군이 맹렬히 번조선을 계속 공격하자 번조선의 상(=장관) 로인과 한음과 삼 그리고 장군 왕겹이 서로 모의를 했다. “처음에는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지금 그는 잡혀있다. 좌장군 혼자 군사를 합쳐 전투는 더욱 맹렬해져 맞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고는 모두 도망가 한나라에 항복해버린다. 로인은 가는 길에 죽었다.
 
B.C 108년 여름 드디어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번조선의 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해 왔으나, 여전히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피살된 우거의 대신 성이(成已) 장군이 한나라에 항복함에 반대하며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들을 공격했다. 그러자 좌장군 순체가 우거의 아들 장(長)과 항복한 상 로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성이장군을 죽이게 했다.
 
(해설) 한나라에 항복한 번조선의 대신들은 우리 역사 최초의 반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반역의 무리에 우거의 아들 장이 포함됐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장(長)은 전쟁에 승리하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한나라에 항복하고는 결사항전하고 있는 충신 성이장군까지 죽게 만들어 결국 번조선을 망하게 만든다. 그 대가로 그는 한나라로부터 제후인 기후(幾候)에 봉해진다. 이러한 장의 행동은 백제가 망할 때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의 행동과 같은 것이라 참으로 씁쓸하다.
 
부여융은 당나라에 항복한 뒤 ‘웅진도독부대방군왕’을 제수 받고는 백제의 부흥전쟁을 무산시킨 인물이다. 662년 7월 당나라 수군 및 군량선을 이끌고 가서 복신과 부여풍 등이 항전하고 있던 주류성을 평정한 후 당나라로 돌아간다. 또한 당나라 장수 유인궤의 주선으로 조국을 망하게 한 신라왕과 만나 백마의 피로 맹세하는 의식까지 치르고, 백제부흥군의 주역인 흑치상지를 설득해 당나라에 항복하게 만든다. 이로서 그의 조국 백제는 부흥의 꿈을 완전히 접고 망할 수밖에 없었다.
 
▲ 부여시는 부여융의 가묘를 만들어 조국을 망하게 한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원문) 이로써 (번)조선을 평정하고 (그 땅에) 사군을 설치했다(以故遂定朝鮮爲四郡). 삼을 봉해 홰청후(澅淸侯)로, 한음은 적저후(荻苴候)로, 왕겹은 평주후(平州侯)로, 장은 기후(幾侯)로 삼았다. 최는 아비 로인이 비록 죽었으나, 성이장군을 죽이는 큰 공이 있으므로 온양후(溫陽侯)로 삼았다.
 
한 무제는 좌장군에게 누선장군과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해 작전을 어긋나게 한 죄를 물어 기시(棄市)형에 처했다. 누선장군은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洌口)에 이르렀으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렸어야 함에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었다가 많은 병사를 잃어버렸으므로 죽이는 것이 마땅하나 속전(贖錢)을 받고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참고로 기시는 참수한 시신을 길거리에 전시하는 극형 중에 극형이다.
 
태사공(太史公=사마천)은 말한다. 우거는 지형의 험고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사신 섭하는 공을 속이다가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수군사령관 누선장군은 장수의 그릇이 좁아 난을 당하고 죄에 걸렸다. 번우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좌장군 순체는 공을 다투다 공손수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결국 육군과 수군 양군(兩軍)이 함께 치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제후가 된 사람이 없었다(兩軍俱辱 將率莫候矣).
 
▲ 중국이 그린 한사군도는 경상도를 제외한 한반도     © 편집부
(해설) 이러한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이 나중에 중국 사가에 의해 곡필 왜곡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위 <사기>의 기록을 약 180년 후에 나온 <한서>는 “마침내 조선을 멸해 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했다”로 다르게 적었다. 즉, 조선을 평정(定)한 것이 조선을 멸망(滅)시킨 것으로 바뀌며, 위 자치령 조선오군(홰청·적저·평주·기·온양)이 식민지 한사군(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사마천은 한사군전쟁을 직접 종군한 사람이다. 그런 사마천이 눈으로 직접 보고 적은 <사기>의 내용을 후대에 반고가 <한서>를 쓰면서 한사군이 설치됐다고 임의로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이후 사서들도 모두 따라 적고 있어 마치 유철(한무제)이 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한 것으로 알게 됐던 것이다.
 
당시 육군사령관인 좌장군 순체와 수군사령관인 누선장군 양복이 모두 기시라는 극형을 언도 받았다는 것은 한나라가 번조선과의 전쟁에서 완전히 참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땅에 식민지 한사군이 설치됐다고 하는 것은 후세 사가들의 붓장난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사군 전쟁을 직접 종군한 사마천이 눈으로 직접 보고 적은 <사기 조선열전>의 마지막 문구인 “결국 양군이 함께 치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제후가 된 사람이 없었다”는 매우 완곡한 춘추필법으로서, “한사군 전쟁은 한나라가 참패한 치욕적인 전쟁이다”라는 표현이다. 상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극형을 받은 장수들만이 있는 이 전쟁은 과연 누구 이기고 누가 진 전쟁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그 전쟁의 결과로 식민지 한사군이 설치됐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   한사군전쟁은 한 무제가 참패한 전쟁인데,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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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2/17 [10:17]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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