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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과 고구려 좌원대첩
동북공정으로 이어진 허구의 한사군과 소설 삼국지연의
 
신완순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1/02 [10:15]
다음은 판소리 ‘적벽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저 비둘기 조롱한다. “여보소 조승상아, 사백년 한(漢)나라가 까치 집이 아니어든 공연히 뺏으려고 내 재조를 하려 하니  아무런들 될 것이냐. 꾸우륵 꾸우륵.”
저 따오기 조롱한다. “여보소 조승상아, 간신 행세 부끄러워 황개의 호통 소리 그리도 무섭던가. 홍포조차 벗었으니  나 입은 것 빌려 줄까. 따옥따옥.”

이는 새들의 입을 빌어 도망가는 조조를 놀리고 있으며 한족(漢族) 중심의 사관이 가미된 소설 <삼국지연의>에 바탕에 두고 있다. 그나마 판소리 ‘적벽가’는 <삼국지연의>와는 달리 전쟁에 참여한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우리식으로 풍자와 해학을 곁들여 그려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관왕묘에서 관우제사를 지내야만 했던 선조

이렇게 우리의 민중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삼국지는 어떤 요인들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인가?
아마도 삼국지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삼고초려, 관우가 조조를 사로잡고 죽일 수 있었지만 살려주는 관대함, 동남풍을 불게 하여 조조의 백만대군을 몰살시켰다는 적벽대전, 그리고 제갈량의 출사표와 죽은 공명이 살아있는 사마중달을 이긴 이야기와 이외에도 많은 극적인 요소들이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역사와 소설을 혼동하게 만들고 가치관을 흔드는 이러한 삼국지의 해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우리의 역사를 잘 모르는데에서 기인한다고 하면 지나친 이야기일까? 충절과 의리 그리고 관용의 상징이라는 관우에 관해서 알아보다 보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우리의 시선을 끈다.

조선왕조실록에 임진왜란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선조 31년(1598) 4월에 갑자기 소위 관우를 모신 사당이라는 관왕묘를 설립하기 위해 물자를 조달하는 일이 발생한다. 또한 선조실록 선조31년(1598) 5월 13일자의 기사를 보면, “오늘은 관왕(關王)의 생신이다. 소상(塑像)과 제구를 갖추어 치제하였는데, 상도 행행하여 치제하도록 요청했다. 이 관왕묘는 중국에는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없어서 그 의식이 사전(祀典)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경리가 강요하므로 상이 할 수 없이 가서 분향(焚香)하려고 대가(大駕)를 차비하였는데 갑자기 큰비가 내려 행행을 중지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속국인 조선을 왜적으로부터 구해주고 있으니 마땅히 관왕묘에 치제하도록 명나라의 관리가 압력을 넣어 역사상 전무한 일을 어쩔 수 없이 강행하려 한 것인데 하늘도 통곡을 하였는지 비가 내려 행사를 못하였다는 기사이다. 선조는 그 다음날 마지못해 관왕묘에 치제를 하였다.

선조가 재위 초기인 선조2년(1569)에 당대의 석학인 기대승으로부터 "<삼국지연의>는 무뢰한 자들이 잡된 말을 지어 만든 것으로 적벽(赤壁)싸움에서 이긴 것 등은 괴상하고 황탄한 일과 근거 없는 말로 부연하여 만든 것이며, 마땅히 군주는 이러한 서적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30년이 채 되지 않아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장수인 관우를 신으로 받들고 치제를 하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으며 힘없는 나라의 설움을 웅변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 서울의 동묘(관왕묘)에 있는 관우상     © 편집부
 
 
한족 중심의 <삼국지연의>는 역사 아닌 허구

이후 도성과 지방의 여러 곳에 관왕묘가 들어서게 되었으며 관우신앙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소설 <삼국지연의>도 민간에서 많이 발행이 되어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현재 우리가 읽는 삼국지는 이 <삼국지연의>에 바탕을 두고 각색하여 허구로 만들어진 재탕 삼탕의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는 진수가 쓴 정사인 <삼국지>와는 사뭇 다르다. 정사 <삼국지>는 
위나라 45년((AD220~265), 촉나라 42년(AD221~263), 오나라 58년(AD222~280)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며 이 존속기간은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의 약 1/20밖에 안 되는 존속기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족(漢族) 중심의 정통론을 주장하는 소설 <삼국지연의>를 신봉하고 그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인식하고 있으며 우리의 역사는 도외시하고 있다. 이는 정신적인 사대와 모화주의의 일환일 뿐이다. 일례로 <삼국지연의>의 절정 부분의 하나인 적벽대전을 보자.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벽에서 조조의 위나라 군사에게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게 하여 화공(火攻)을 펴 조조의 백만대군을 섬멸시켰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정사인 <삼국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삼국지 위지>는 ‘적벽에 이르러 유비의 군사와 더불어 싸웠는데 불리하였으며 이때 역병이 크게 돌아 관리와 선비들이 많이 죽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지 촉지>에는
‘조공(조조)과 더불어 적벽에서 싸워 조조의 군사를 크게 무찔렀고 그 배를 불태웠으며 유비와 오나라 군사들이 수륙 양쪽으로 추격을 하여 남군에 다다랐을 때 역병이 돌아 군사가 많이 죽어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史實)을 소설로 각색하여 적벽대전을 제갈량의 지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꾸며 제갈량을 모든 만물의 이치를 통달한 신출귀몰한 병법의 전략가로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허구의 이야기를 홍콩의 오우삼 감독이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과 합작을 하여 적벽대전’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내년 북경올림픽 즈음에 개봉한다고 하니 또 하나의 허구를 만들어 내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안타깝다 못해 서글프다. <삼국지연의>가 가공의 소설임에도 적벽대전을 마치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면서도 우리의 역사 속에 나오는 적벽대전 이상 가는 대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10만의 한나라 군사와 말 한 필도 살려주지 않고 몰살시킨 고구려 명림답부의 좌원대첩이 그것이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양만춘의 안시성 대첩과 함께 고구려의 3대 대첩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명림답부의 좌원대첩이다. 그러나 좌원대첩은 고사하고 제갈량보다도 더 뛰어난 지략과 경륜을 갖춘 명재상 명림답부라는 이름조차 우리 국민들에게는 생소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작고 보잘 것 없다는 인식과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되는 문제이다.

10만의 한나라 군사를 몰살한 고구려 명림답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고구려국본기 신대왕 편>과 <열전 5 명림답부>편에 좌원대첩과 명림답부에 대하여 잘 나타나 있는데 요약을 하면 다음과 같다.
 
"명림답부는 고구려 사람으로 조의선인을 지냈으며 차대왕 20년(165)에 백성들이 폭정에 견디지 못함을 보고 차대왕을 시해하고 신대왕(고구려 8대왕)을 세웠으며 국상이 되었다. 신대왕 8년(172)에 한(漢)의 현도군 태수 경림(耿臨)이 대군을 일으켜 우리를 침공하려 하여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좋은가를 물었는데 나가 싸우지 않으면 우리가 겁을 낸다고 하여 자주 침략을 할 것이니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때에 명림답부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한(漢)은 국토가 크고 인민이 많은데다가 지금 굳센 군대가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칼날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경우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경우에는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인(漢人)들은 천 리 밖에서 군량을 실어 왔으므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며, 만약 우리가 참호를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고 들판의 농작물을 치우고 기다리면 저들은 반드시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굶주리고 피곤해서 돌아갈 것이니, 그때 우리가 날랜 군사로써 몰아치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

왕이 그렇게 여겨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한인(漢人)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가는 것을 명림답부가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싸우니 한군(漢軍)이 대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質山)을 주어 식읍을 삼게 하였다. 신대왕 15년(179) 가을 9월에 죽으니 나이 113세였다. 왕이 친히 빈소에 가서 애통해하고 7일간 조회를 파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질산(質山)에 장사지내고 수묘인(守墓人) 20가(家)를 두었다"고 되어 있다.

근대의 역사학자인 박은식이 쓴 <명림답부전>에는 고구려를 공격한 한나라 군사는 10만 명이라고 한다. 한나라의 10만 명의 군사와 말이 모조리 몰살되었다는 것은 명림답부의 지략과 고구려 군사들의 용맹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말해 주고 있으며 이 때의 명림답부의 나이가 106세였으니 모든 면에서 허구 소설 삼국지의 제갈량을 압도하고 남는다.

한4군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조조의 후예가 된 우리 역사

역사가 잘못 왜곡이 되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 한(漢)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한 지역이 한반도라고 강변을 한 잘못된 역사왜곡이 <삼국지연의>처럼 부메랑이 되어 다시 날아오고 있으며 현재의 동북공정이 그 것이다.

현 중국의 역사교과서의 한(漢)나라의 강역과 위. 촉. 오의 삼국시대의 강역도에는 우리나라의 한강 유역 이북이 모조리 포함되어 있다. 이는 우리 학자들이 한4군을 한반도 안에 우겨 넣음으로 인해서 생긴 문제이며 중국이 이를 원용하여 왜곡된 역사지도를 교과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 사실처럼 알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잘못된 한4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방치하고 있으며 겉으로만 동북공정에 대응한다고 하고 있다.
 
▲ 중국이 그린 서한의 한사군도와 일치하는 우리 국사교과서의 한사군도     © 편집부
 
 
현 중국의 하북성과 산서성 산동성 유역에 있어야 할 한4군이 우리 스스로의 잘못된 역사왜곡으로  한강 유역 이북의 사람들은 모두가 한나라 사람이고 조조의 위나라 후손이 될 수 밖에 없는 서글픈 처지에 놓여 있다. 명림답부의 좌원대첩은 몰라도 제갈량의 적벽대전은 알고 있고 우리의 역사 강역은 남의 집 앞마당이 되어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역사를 다시 알아야 하고 세워야할 때이다. 그래야만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될 것이다. 남들은 없는 것도 만들어 부풀리고 키워서 자기의 역사로 만들고 있는데도 우리는 있는 것조차 아니라고 부정을 하는 자기모순적 역사관을 지양하고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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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1/02 [10:1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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