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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 시대의 북제(北齊)는 고구리의 속국
고대 요수는 황하, 북제의 서쪽인 요동은 황하유역
 
신완순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3/24 [18:21]
역사에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사서를 보다보면 이러한 냉엄함을 항상 느낀다.
보통은 승자에겐 박수를 패자에게는 동정을 보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널리 읽혀지고 있는 중국의 역사소설인 <삼국지연의>나 <초한지>를 보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장인물에 대해 인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는다’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주인공인 항우를 보면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는 용맹스러운 장군이라는 이미지보다는 힘만 좋을 뿐 우직하고 고집이 세고 자만하여 일을 망쳐버린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중원대륙의 역사를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로 일관되게 의도되어 서술한 결과의 산물이다.

한족 중심 역사서술 폐해 심각

<초한지> 역시 <삼국지연의>의 폐해의  심각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승자인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보다도 패자인 항우를 주목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어쩌면 항우의 처지와 평가가 고대의 역사와 강역을 잃어버린 우리와 너무 많이 닮아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당나라 말기에 두목(杜牧, 803~ 852)이 지은 ‘제오강정(題烏江亭)’이라는 항우에 대한 추모의 시는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암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일로 기약할 수 없으니 (勝敗兵家事不期)
수치를 감추고 참을 수 있어야 진정한 남아로다 (包羞忍恥是男兒)
강동의 자제에는 인재와 호걸이 많으니 (江東子弟多才俊)
땅을 차지할 날이 다시 옴은 아직 알 수 없도다 (卷土重來未可知)


이 시는 항우가 유방과의 결전에서 패하여 오강(烏江) 근처에서 자결한 것을 탄식한 노래이며 여기서 권토중래(捲土重來) 즉 ‘땅을 차지할 날이 다시 온다’는 말은 어떤 일의 한 번 실패에 굴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남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이 고래로부터 대륙의 역사를 한족 중심의 역사로 왜곡 재편하려 한 것은 비단 현재의 동북공정 뿐만 아니라 공자의 <춘추>와 사마천의 <사기> 또한 마찬가지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가 위(魏)나라 중심으로 편찬된 사서인 반면 유비의 촉한(蜀漢)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서가 <속후한서(續後漢書)>이다.

< 속후한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송나라 때 소상(蕭常)이 편찬한 <속후한서>를 <소씨속후한서(蕭氏續後漢書)>라 하고 원나라 때 학경(郝經)이 편찬한 <속후한서>를 <학씨속후한서(郝氏續後漢書)>라 부른다. <속후한서>는 유방이 세운 전한(前漢=西漢)과 유수가 세운 후한(後漢=東漢)에 이어 유비가 세운 촉을 촉한(蜀漢)이라 하여 앞선 두 왕조를 잇는 정통왕조로 보는 한족 중심의 역사관을 세우기 위해 편찬된 사서들이다.

북제는 고구려 별부(別部)... 발해왕(渤海王)이 통치

얼핏 보면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엄청난 시각의 차이가 있다. 진수가 쓴 <삼국지>가 유비를 황제가 아닌 ‘선주(先主)’로 그 아들 유선을 ‘후주(後主)’라 칭하고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반면에, <속후한서>는 유비를 ‘소열황제(昭烈皇帝)’라 하고 유선을 ‘소제(少帝)’ 또는 ‘말제(末帝)’라 하여 황제로 칭하고 정통성을 이은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한족 중심의 역사로 끌고 가려 하는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철저히 계산되어 ‘만들어진 역사(a made-up history)’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송(宋)나라와 명(明)나라로 이어져 <삼국지연의>와 <초한지> 등의 소설을 만들어냈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조선시대의 소중화 사상에 물든 일부 잘못된 선비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현대의 우리들도 여기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소씨속후한서>에는 흔히 말하는 사이(四夷) 즉 우리 역사에 관한 기술이 빠져 있으나, <학씨속후한서>에서는 동이(東夷)에 관한 역사 기술이 우리의 눈을 확 잡아끈다. 원래 <학씨속후한서>는 90권으로 된 원(元)나라 때 학경(郝經)이 편찬한 사서이며 학경의 자는 백상(伯常)이며 능천(陵川)사람이라 하며 벼슬이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에 이르렀으며 소문관대학사 영록대부(昭文館大學士榮祿大夫)에 추증되었고 죽은 뒤에 기국공(冀國公)으로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 학씨속후한서>가 위(魏)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진수(陳壽)의 <삼국지>를 개편하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주해한 <삼국지>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비교하여 뺄 것은 빼고 취할 것은 취하여 교간된 것이다. 이 중에서 동이(東夷)에 관련된 사항은 <속후한서>권81 열전 제78편에 부여, 고구려, 발해 등 11개의 나라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속후한서.동이열전> 중에 부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예(濊)를 뺀 동옥저, 읍루, 삼한 등 나머지 7전은 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이전 고구려 조에 우리 학계에 일반화된 기존의 역사 인식을 흔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북조 시대의 <북제(北齊)>에 관한 기술이며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별부(別部)는 발해이다. 그 땅의 동쪽은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 풍속이 점차 중국과 같아졌으며 수인(蓚人) 고환(高歡)에 이르러  위(魏)나라 효무제(孝武帝)를 축출하고 그 아들 고양(高洋)이 마침내 동위(東魏)를 빼앗아 제왕을 칭하고 나라 이름을 제(齊)라 하였다. 고위(高緯)에 이르러 주(周)나라 무제(武帝)에게 멸망하였다. (句麗別部曰渤海其東際海西接遼東俗漸同中國至蓚人高歡逐魏孝武帝 其子洋遂簒東魏稱尊號國號齊至緯爲周武帝所滅)”

요수는 황하... 요동지역은 황하 유역

북제(北齊)는 남북조 시대 550년에 건국되어 577년 북주(北周)에 의해 멸망한 나라이다. 선비족인 탁발씨에 의해 386년에 세워진 북위(北魏)가 6진의 난으로 인하여 534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나누어졌는데 동위는 북제가 되고 서위는 북주가 된다. 동위는 실질적으로 발해왕(渤海王) 고환(高歡)이 통치하였으며 그의 아들 고양이 나라 이름을 북제라 한 것이다.

이러한 북제가 고구려의 별부인 발해로서 바로 고구려의 연방에 속한 속국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비록 51자의 짧은 기록이지만 남북조 시대의 고구려의 역사를 밝힐 핵심적 요소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중화사관에 의해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발간된 아래 ‘중국역사지도집’의 ‘진(陳)·제(齊)·주(周) 시기 전도’- (그림1)를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학경의 <속후한서>의 내용과 지도를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유추할 수 있다.

▲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 중국역사지도집 중의 '진ㆍ제ㆍ주 시기전도’ - <속후한서>에서 북제 강역의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 하였으니 요동은 지금의 섬서성과 황하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 편집부


먼저 요동의 위치문제이다. 지도에서 북제의 강역을 보면 서쪽 경계는 위쪽으로는 황하 동쪽과 아래쪽으로는 낙양(洛陽)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양자강 북쪽을 표시하고 있다. ‘동쪽으로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는 구절에서 서쪽의 요동은 현 중국의 섬서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황하가 그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동이라는 개념은 요동과 요서를 나누어서 분류가 되지만, 일반적으로 요동은 요동과 요서를 합한 개념으로 사서에서 많이 쓰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또한 요동이 그냥 고구려를 가리킬 때도 많다. 예를 들면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것을 ‘요동정벌’이라 하였다.

따라서 북제의 강역으로 보는 요동은 현재의 요녕성이나 하북 지역이 아닌 황하 인근 유역이며 황하가 자연스럽게 요수(遼水)였음을 밝혀준다. 따라서 ‘요동은 현 요녕성에 있는 요하의 동쪽이었다’는 기존의 지명 비정은 마땅히 재고되어야 하며 현 요하 동쪽으로 고구려의 강역을 표시하는 역사인식 또한 바뀌어야 할 것이다.

▲ 북제가 고구려의 별부인 발해였다는 것을 담고 있는 학경의 <속후한서>     © 편집부


또한 송나라 악사(樂史)가 편찬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 172 하 동이 편에 보면, “동이의 땅은 흉산(胸山)으로부터 동쪽이다. 그 북쪽은 낙랑(樂浪)·조선(朝鮮)·요동(遼東)이며, 그 남쪽은 민(閩)·월(越)·진안(晉安)의 동쪽 모두가 그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흉산(胸山)은 현재의 중국 하남성에 있는 숭산(嵩山)으로 보인다. 태산(泰山), 항산(恒山), 형산(衡山), 화산(華山)과 함께 중국의 5악으로 불리는 숭산은 5악 중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숭산은 인체의 심장 부근에 해당되는 산이며 의미상으로 흉산(胸山)이며 이 흉산은 발음은 숭산과 유사하다.

따라서 <태평환우기>에서 말하는 동이의 강역은 하남성 낙양 부근 숭산의 동쪽에 해당되며 황해 연안을 따라 현 하북성에서 복건성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이는 동쪽 지역에 있는  유(幽)·영(營)·청(靑)·서(徐)·양(揚) 지역이며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이(夷)를 가리킨다는 것을 앞서 학경의 <속후한서> 동이전의 맨 첫머리에 싣고 있어 <태평환우기>의 기사에 신뢰감을 더해주고 있다.

고구려 2대 유리왕, 북제와 북위의 전신 선비 정벌

북제의 전신이 되는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다. 북위와 고구려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스럽게 잘 지낸 것을 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외교력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비족은 고구려 2대 임금임 유리명왕 때 이미 정벌을 하여 속국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관계가 후대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북위에서 동위로 또한 동위가 북제로 변천하는 과정에는 항상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며 이들은 실질적인 고구려의 전위부대 성격의 국가였던 것이다. 북제가 고구려의 연방에 속한 속국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우리의 역사에서 이들 고구려의 연방에 대한 국가들을 지워버림으로써  중국의 한족들은 속으로는 오랑캐라 경멸하면서도 선비족의 역사까지 그들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 연방의 일원이었던 선비 등의 역사까지 포함하여야 한다.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온 대륙의 역사는 동이가 나설 때 정리가 되고 안정이 되었다는 것을 많은 사서에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항우를 노래한 시처럼 언젠가 동이가 중원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올 것이라는 공포를 항상 안고 살고 있다. 우리는 항우의 권토중래 아니 고구려의 다물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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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3/24 [18:21]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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