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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과 수양제 대운하의 허구
만리장성은 실제 천리, 대운하는 작은 물길
 
신완순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4/03 [10:20]
만리장성을 넘었다. 이는 언론들이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중국과의 스포츠 경기에서 중국에게 이겼을 때 자주 쓰는 말이다. 만일 졌을 때는 이와 상반된 표현을 쓴다. 보통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냥 ‘장성’이라고 한다.

한때 만리장성이 달에서도 보이는 지구의 유일한 인공구조물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지난 2003년 10월 중국 최초의 유인우주선 ‘신주(神舟) 5호’를 발사하여 중국의 우주인과 교신을 한 결과 만리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용도 폐기된 바 있다.

먼저 현재 중국의 장성이 만리장성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사마천의 <사기>권 88 ‘몽념열전’의
“진(秦)나라가 천하를 병합하고 몽념(蒙恬)에게 30만 명의 군사로 북쪽의 융적을 내쫓게 하고 하남을 수복(收復)하고 장성을 쌓았는데 지형과 험고함을 이용하여 요새를 만들었다.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 거리가 만여 리 이었다”라고 한 기록 때문이다. 이 기록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시황 때 만리장성을 쌓은 것으로 알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진(晉)나라 때의 <태강지지(太康地志)>에 ‘낙랑의 수성현(遂城縣)에 갈석(碣石)이 있는데 장성이 비롯된다.’는 기록과 <통전(通典)>에 ‘갈석은 오늘날 고려의 옛 강역에 있다(在今髙麗舊界)’라는 기록을 묶어 

낙랑의 수성현은 오늘날 황해도 해주 부근으로서 장성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을 펴는 우리나라 일부 식민사학자와 이를 역이용한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진시황이 몽념에게 쌓게 하였다는 만리장성이 한반도 해주지역까지 들어와 있으며 한강이북이 진(秦)나라의 강역이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진시황이 황해도 유역까지 장성 축조?

위 기록대로 진시황은 우리나라 황해도 유역까지 장성을 쌓았을까? 이는 허무맹랑한 허구일 뿐이며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그렇다면 진시황이 몽념에게 쌓게 했다는 장성은 과연 어디까지였을까? 먼저 <사기>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자. <사기> 권6 ‘진시황본기’에는 “몽념에게 북쪽에 장성을 쌓게 하여 변방을 잘 지키도록 하고 흉노를 700여 리 내쫓았다”라고 하여 만 리의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한(漢)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편찬한 <회남자(淮南子)>에는 “진왕협록도(秦王挾錄圖)의 전에 이르기를, ‘진(秦)을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이다’라고 하여 이로 인하여 진왕이 군사 50만 명을 징발하여 몽념과 양옹자(楊翁子)에게 성을 쌓고 수리하도록 하였다. 서쪽으로는 유사(流沙)에서부터 북으로는 요수(遼水)에 닿고 동쪽으로는 조선에 연결되도록 하였다(西屬流沙北繫遼水東結朝鮮). 나라 안의 군들이 수레를 끌고 그 것을 도왔다(中國內郡輓車而餉之).”라고 되어 있다.

< 사기> ‘몽념열전’의 임조에서 요동까지라고 되어있는 장성의 기록과 사뭇 다르다. 요동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과 북쪽으로 요수에 연결되게 하였다고 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당나라 때의 시인 왕굉(王宏)이 지은 ‘종군행(從軍行)’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에 ‘진왕축성삼천리 서자임조동요수(秦王築城三千里 西自臨洮東遼水)’라는 대목이 나온다. 즉 이 말은 진왕 즉 진시황이 쌓은 장성은 서쪽 임조에서부터 동쪽으로 요수까지 3천 리라는 말이며 <사기>에서 말하는 1만 리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시황 축조 장성 동쪽 끝 요수(遼水)는 황하(黃河)

또한 진나라가 7국이 다투는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고 하지만 진나라는 통일한 지 불과 15년 만에 망한 나라인데 만여 리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난센스다. 왜냐하면 장성을 쌓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는 후대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장성 축조 후 8백여 년이 흐른 뒤 고구려를 침공하였다가 실패한 수양제 때의 장성 축조 기사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수서(隋書)> 수양제본기에 “대업 3년(607년) 백만 명의 장정을 징발하여 서쪽의 유림(榆林)으로부터 동쪽으로 자하(紫河)까지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열흘 만에 그만 두었으며 죽은 자가 열에 대여섯 명이었다.”라고 하였으며

“대업 4년 7월 20여 만의 장정을 징발하여 유림에서 동쪽으로 장성을 쌓았다.”라고 하여 장성을 쌓는 작업이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 수나라 때 장성을 쌓는 노역과 고구려와의 전쟁에 징발되어 죽어가는 것이 너무나 비참하여 ‘막향요동랑사가(莫向遼東浪死歌)’라는 말이 생길 지경이었다.

‘막향요동랑사가(莫向遼東浪死歌)’라는 말은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와 같은 것으로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잘 표현되어 있으며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와 이맥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도 기술된 것처럼 ‘요동(遼東)으로 가면 오로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지 말라’는 한이 맺힌 민초들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진시황이 장성을 쌓도록 하니 <회남자>의 “나라 안의 군들이 수레를 끌고 그 것을 도왔다(中國內郡輓車而餉之)”는 것은 “나라 안의 군(郡)들의 백성들이 노역에 시달려 수레에 실려 죽어(輓) 나가고 도망쳐 걸식(餉)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으니 얼마나 고통이 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 진나라 시대의 중국 역사지도 - 진장성이 한반도 북부까지 들어와 있다. 심지어 한강 이북을 진(秦)나라에서 삼국을 통일한 서진(西晉)시대까지 중국의 강역으로 표시하고 있다                                                                   © 편집부


‘요동(遼東)으로 가면 오로지 죽음.... 가지 말라’

장성을 쌓는다는 것이 이처럼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치루는 것인데 진나라가 만 리나 되는 장성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설령 3천 리 장성을 쌓았다 하더라도 그 장성은 현 중국의 감숙성에서 섬서성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이며 <회남자>에 기술된 것처럼 북쪽으로는 요수에 동쪽으로는 조선에 연결되도록 하였다고 하였으니 진장성은 감숙성과 섬서성의 북쪽에 흐르는 현 황하(黃河)까지 쌓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요수는 황하일 수밖에 없고 진나라 당시의 조선은 섬서성에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우리나라의 식민사학자들과 중국의 학자들이 진나라의 장성이 황해도까지 이어졌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것이며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토목 공사는 앞서 말한 장성의 축조와 수양제가 완성하였다는 절강성 항주에서 북경까지 물길로서 이른바 경항운하(京杭運河)의 건설이다. 과연 수양제는 이렇게 엄청난 길이의 대운하를 정말로 건설하였으며 왜 했을까? 수양제는 영제거(永濟渠)와 통제거(通濟渠)를 건설하여 물길을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뭔가 의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영제거(永濟渠)에 관한 기록으로 <수서> 권3 수양제본기의 내용을 들 수 있다. “대업4년(608년) 봄 정월에 조서를 내려 하북(河北) 여러 군의 남녀 백여 만 명을 징발하여 영제거를 개통하였는데 심수(沁水)의 물을 끌어들여 남으로 황하에 이르게 하고 북으로 탁군(涿郡)과 통하게 하였다”라고 되어있다.

탁군은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에 군사를 집결시킨 곳이다. 즉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은 탁군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심수(沁水)는 산서성 심원현에서 발원하여 황하에 흘러드는 강이며 탁군은 현 북경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심수는 물길을 바꾸지 않아도 황하로 흘러드는 강인데 굳이 황하에 닿게 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으며 또한 산서성에 흐르는 심수는 현 북경 인근인 탁군까지 통하게 할 수 있는 강이 아니라는 점이다.
▲ 수양제가 만든 대운하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항운하    


이로 미루어보면 탁군은 현 북경 인근 유역이 아니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도출이 된다. <명일통지(明一統志)> 권4에 실려 있는 영제거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의문이 풀린다. “영제거는 청하현(清河縣) 서북 10 리에 있으며 청장수(淸漳水)를 끌어들여 청하현 경계에 흐르게 하였다. 옛 이름은 고녀거(孤女渠)이며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 할 때 영제거라 이름을 바꾸었으며 속명은 어하(御河)이다”라고 되어 있다.

어하(御河)는 오늘날 하남(河南)의 급(汲), 활(滑)과 내황(內黃)의 여러 현을 경유하여 하북성으로 들어간다. 즉 이곳이 북송(北宋)의 북경(北京)이며 현 하북성 남부의 대명현(大名縣)이다. 따라서 탁군은 현 북경 인근 유역에 있는 것이 아니며 황하 인근 유역인 현 하남성과 하북성 경계 지역이다.

위의 <명일통지>의 기사는 영제거를 만든 목적까지 내포되어 있다. 영제거를 건설한 목적은 고구려를 침략하는데 군사와 군량미의 보급 운송을 원활히 하고자 치밀히 계산되어 만들어진 것이며 후대에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고자 현 북경유역으로 지명을 옮긴 것이다.

경항운하, 수양제 당시 건설되지 않았다.

현재 중국의 만리장성은 총연장 6400km로서 말 그대로 만 리가 넘는다. 그러나 이 장성이 모두 진시황 때 쌓은 것이 아니며 경항운하도 수양제 당시에 건설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설적으로 장성을 쌓거나 운하를 건설을 한 이유는 당시 강성했던 동이 즉 우리의 선조국가들이 강력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여 방어용 또는 공격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성을 쌓은 주체들은 우리의 적이 되질 못했고 운하를 건설한 수양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할뿐더러 저들이 역사적 사실을 감추고 왜곡한 것에 놀아나고 있다. 위의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경항운하의 실체를 정확히 안다면 강성했던 조선과 고구려의 실상을 알게 될 것이며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설 것이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말이 현재는 남녀 간의 끈끈한 사랑으로 표현이 되고 있지만 실상은 하룻밤에 쌓은 장성이 얼마나 부실하게 쌓아졌는가를 나타내는 말이며 장성을 쌓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것을 웅변으로 실증하고 있다. 나라를 지키고 지탱하는 힘은 철옹성같은 장성이나 운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역사는 침묵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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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4/03 [10:20]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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