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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년을 이어온 화랑과 풍류도
조선의 화랑제도 고구리의 조의, 백제의 무절, 신라의 화랑으로 이어졌다
 
신완순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6/02 [23:42]

화랑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 있다. 화랑의 유래에 대하여는<동국통감>에는 신라 진흥왕 원년(520) 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진흥왕 37년(576)이라 하며, <여지승람>에는 법흥왕 원년(514) 등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화랑은 고조선 즉 단군시대에 있었던 제도이다.

이암이 편찬한 <단군세기> ‘13세 단군 흘달’조를 보면 다음과 같이 화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무술 20년(BC 1763)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은 길을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고 다녀서 사람들은 이를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불렀다.”라고 되어 있어 신라 화랑의 근원이 신라의 진흥왕 시절보다 2천여 년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화랑, 단군조선 국자랑에서 기원

단군조선(BC 2333 ~ BC 238)의 13세 흘달(屹達) 단군이 통치하던 시절(BC 1782 ~ BC 1722)에는 무슨 일이 있었으며 어떠한 연유로 화랑제도를 만들게 되었는가를 추론해 본다. 흘달 단군 당시는 중원은 격변기였다. 중국의 하(夏)나라와 은(殷)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였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桀)은 요대(瑤臺)라는 화려한 궁전을 짓고 그 안을 천하의 온갖 진기한 물건과 미녀들로 채우고 큰 연못을 파고 술로 채워 향락에 탐닉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은 소위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장본인이며 폭군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폭정에 견딜 수 없어 은나라를 세운 탕왕이 반정(反正)에 나선 것이다.

단군조선이 어떻게 하나라를 정벌하고 은나라를 세우게 되는가가 앞서 언급한 <단군세기> ‘13세 단군 흘달’조에 잘 기술되어 있다. “갑오 16년(BC 1767) 이 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하나라 군주 걸(桀)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읍차(邑借)인 말량(末良)에게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도록 하니, 은나라 탕(湯)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이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마침내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군(畎軍)을 이끌고 낙랑(樂浪)과 합하여 관중(關中)에 진격하여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제(官制)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여 하나라와 은나라의 왕권 교체시기의 전말에 대하여 잘 기술되어 있다.

▲ 중국 북경대학교재에 그려진 하나라 때 형세도는 황하주변이다. 당시 사방에는 이족들이 있었다.     © 편집부
▲ 흘달단군이 하나라를 정벌한 장안 유역의 빈.기(邠.岐) 지역 - 단군조선은 진정한 아시아의 패자였음을 알려준다    

깃털 장식 모자는 동이족 상징

여기에서 관중은 중국 장안(지금의 섬서성 서안)을 중심으로 한 평원지역이며 빈.기(邠.岐)는 장안의 서쪽 지역이다. 이곳에 관리를 두고 다스렸다고 하는 것은 하나라의 중심부를 평정을 하였다는 말이다. 단군조선은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하나라를 인정하고 반란을 일으킨 은나라 탕을 정벌하려 하였지만 하나라 걸왕의 무도함을 알고 하나라를 정벌한 것이다.

이로써 중국 최초의 왕조라는 하(夏)나라는 멸망을 하게 되었고 은나라를 세워 중원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은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이족으로서 은나라 시조인 설(契)에 관한 설화는 알에서 나온 천손민족의 후예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세계 4대 고대문명의 하나인 황하문명은 동이족인 은나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은허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과 갑골문자는 이를 반증하고 있다.

<단군세기>에 “갑오 16년(BC 1767) 주와 현을 정하고 직책의 제도를 나누어 세웠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니,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 없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 거문고와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넘쳤다.”라고 하여 당시 동아시아 대륙의 진정한 패자는 단군조선이며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중원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 단군조선은 새로운 기틀을 다지기 위하여 제도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화랑제도인 것이다.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은나라를 세운 지 3년 만의 일이였다. 신라시대의 화랑들은 새 깃털로 장식한 모자인 조우관(鳥羽冠)을 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우관은 신라뿐만이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조우관을 썼다. 이는 남북조시대의 양나라의 <양직공도>에 보이는 백제 사신의 모습과 고구려 벽화에서 조우관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이 서역이나 유구(流球) 등지까지 영향을 미쳐 동이족이 살았던 곳이면 어디서든 나타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단군조선 국자랑, 고구려 조의선인... 신라 화랑 이어져

<삼국지> ‘동이전’에 삼한(三韓)에서 모자에 새 깃털을 장식하거나 장례에 큰 새 깃털을 사용한 것은
죽은 사람의 신령스러운 영혼이 잘 날아오르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우리 민족은 세상에 올 때에는 새의 알로서 오고 갈 때에는 새처럼 날아서 돌아간다는 천손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맥의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원화(源花)를 여랑(女郞)이라 하며 남자는 화랑이라 하며 천왕랑(天王郞)이라고도 하였다. 위로부터 명으로 오우관(烏羽冠)을 내리는데 관을 쓰는 것도 의식이 있었다.”라고 되어 있어 조우관 또는 까마귀 깃털을 꽂는 풍습이 상고시대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범장의 <북부여기> ‘해모수단군’조에는 “임금께서는 타고난 자태가 영용(英勇)하시며, 신령스러운 눈빛은 사람을 쏘아보는 듯하고 임금을 바라보면 천왕랑(天王郞)과 같았다. 오우관을 쓰고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셨다.”라고 하여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가 천왕랑과 같고 오우관을 쓰고 다녔다고 한 점으로 보아 해모수는 단군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화랑 출신으로 보인다.

즉 단군조선 시대의 화랑이 북부여를 거쳐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으로 그 맥을 이어온 것이다. 풍월주(風月主) 또는 풍월도(風月道)라고도 하였던 것을 신라시대에 화랑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풍월(風月)이라는 것은 ‘박달’ 또는 ‘배달’의 훈역(訓譯)으로서 ‘광명의 땅’ 또는 ‘신(神)의 도시’라는 뜻의 ‘신시(神市)’를 일컫는 말로서 한웅천왕께서 태백산(박달)에 도읍을 정하고 개천(開天)하여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고자 한 뜻과 부합이 된다.

최치원이 쓴 ‘난랑비 서문’에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이 가르침을 만든 근원은 신시의 역사에 상세히 실려 있으며 실로 안으로 유교․도교․불교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으니 만물을 접하여 화생(化生)하게 한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神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라고 하여 풍류의 실체를 밝히고 있으며 이는 화랑들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이념과 목표이며 수련의 원천이 되었다.

원광(圓光)이 신라 진평왕 때 화랑이 지켜야 할 계율로 다섯 가지를 정하였는데 보통 세속오계라 한다. 즉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며(事君以忠),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며(事親以孝),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며(交友以信),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고(臨戰無退),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다(殺生有擇) 등의 다섯 가지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화랑도의 세속오계를 마치 옛날에나 통용되었던 진부하고 고루하여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천년의 신라를 존속시킬 수 있게 만든 엘리트 집단의 이념임을 감안한다면 결코 가벼이 생각할 수 없다. 세속오계 중에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다’는 말의 생명존중 사상도 마찬가지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또한 살생(殺生)에도 법이 있어 위로는 나라의 임금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들까지 모름지기 스스로 살생할 때와 살생할 대상을 가려서 살생을 하도록 하여 한 생명이라도 죽임을 남발하지 않았다. 예부터 부여(夫餘)에 ‘말이 있으나 타지 아니하고 살생을 금하고 목숨을 살려 주었다.’라고 하는 것은 또한 그러한 뜻이다.

그러한 까닭에 잠자는 새와 알을 잡지 아니함은 살생의 때를 가리는 것이며, 어린 것과 이로운 것을 죽이지 아니함은 죽이는 사물을 가리는 것이다. 사물을 중하게 하는 뜻이 가히 지극하다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이 경계해야할 대목이며 우리의 생명 존중 사상의 뿌리가 심원함을 알 수 있다.

풍월(風月), 배달의 훈역... '신의 도시(神市)' 일컬어

화랑에 관하여 기록한 중국의 사서는 <신라국기(新羅國記)>이다. <신라국기>는 당나라 때  고음(顧愔)이라는 사람이 대력(大歷) 년간(766-779)에 신라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집필을 한 것으로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는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이 쓴 <대중유사(大中遺事)>라는 책이 <신라국기>의 부록으로 되어 있던 것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신라국기>는 신라의 화랑 뿐만이 아니라 신라의 역사와 제도 그리고 문화 등을 상세히 기록했던 사서로 추정이 되고 있다. <신라국기>는 현재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당․송 시대를 거쳐 원나라 때 도종의(陶宗儀)가 편찬한 <설부(説郛)>라는 책에서도 인용이 되고 있고, 청나라 때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펴낼 당시에도 그 목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는 현존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남의 손에 의해 쓰인 우리의 사서이지만 신라의 제대로 된 역사를 밝히기 위해선 꼭 필요한 사서임에도 볼 수 없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언급된 것처럼 세계 모든 종교와 사상의 뿌리가 되는 풍류를 우리 선조들이 갖고 있었음에도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 등의 근원이 우리의 풍류도라는 사실을 기록한 <신사(神史)>나 신라 역사를 기록한 <신라국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풍류도와 화랑이 역사적 격변기에 항상 재현이 되어 우리를 세계의 주도국으로 이끌어왔음을 상기할 때 통일과 평화와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모습으로 출현한 날이 머지않았으리라. 한웅천왕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신시에 펼쳤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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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6/02 [23:42]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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