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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하마는 천리마인가? 수레를 끄는 나귀인가?
작지만 전투력이 강해 아시아를 정복한 말
 
신완순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7/31 [12:11]
과하마(果下馬)는 과연 어떠한 말이었을까?

과하마의 나라별 사서의 기록

1. 예(濊)의 과하마(果下馬)
(예에서) 한나라 환제(桓帝) 때(147~167) 바쳤다. (果下馬漢桓時獻之).”라고 되어 있으며, 이를 주해한 배송지(裵松之)는 “신 송지가 살펴보건대 과하마는 3척으로 그것을 타고 과일나무 아래를 다닐 수 있는 까닭으로 과하(果下)라 하였다. 박물지(博物志) 위도부(魏都賦)를 보라. (臣松之按果下馬髙三尺乘之可於果樹下行故謂之果下見博物志魏都賦)”라고 하였다. - <삼국지> 권30 위지 동이전

※ 한나라 환제 때의 기록은 없다.
<후한서> 권155 동이전 예(濊) 조에 “또한 문표(文豹)가 많으며 과하마가 있다. 바다에서 반어(班魚)가 나며 사신이 와서 모두 바쳤다(又多文豹有果下馬海出班魚使來皆獻之)”라고 되어 있다.

2. 고구려 삼척마(三尺馬)
고구려에는 삼척마가 난다고 하는데 본래 주몽이 탔던 말의 종류이며 즉 과하마이다.(出三尺馬云本朱蒙所乘馬種即果下也)  - <위서(魏書)> 권100 고구려전(髙句麗傳), <북사(北史)> 권94 고구려전

3. 백제의 과하마
무덕 4년(621년) 백제왕 부여장이 사신을 보내 와서 과하마를 바쳤다. (武德四年其王扶餘璋遣使來獻果下馬).  - <구당서> 권199 상 동이전 백제

4. 신라의 과하마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713~741)에 (신라에서) 수차례 입조하여 과하마를 바쳤다. (玄宗開元中數入朝獻果下馬).  - <신당서> 권220 동이전 신라

※ <구당서>에는 신라에 과하마가 있거나 과하마를 바쳤다는 기록은 없으며, <신당서>에 신라 성덕왕이 과하마를 바쳤다는 기사 뿐이며 그 숫자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
<책부원귀(册府元龜)>에서 개원 11년(723년) 4월 신라 성덕왕이 과하마 1필을 바쳤다고 하며,
<당회요(唐會要)>에서는  개원12년(724년) 신라 성덕왕이 과하마 2필을 바쳤다고 되어 있는데.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서는 이러한 모든 기록을 취합하여 기록했다.

5. 북제(北齊)의 과하마
위경(尉景)에게 과하마가 있었는데 문양(文襄)이 그것을 구하고자 하니 위경이 말을 주지 않고 말하기를 ‘흙은 상부(相扶)하여 담장이 되고 사람은 상부하여 임금이 되는데 한 필의 말  또한 얻어 기르지 못하고 찾는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有果下馬文襄求之景不與曰土相扶為墻人相扶為王一馬亦不得畜而索也)?’  - <북제서(北齊書)> 권55 위경열전(尉景列傳)

▲ 과하마로 추정되는 작은 말은 큰 말에 비해 전투력이 강하다                                   © 편집부

과하마의 용도

1. 소황태후(召皇太后)가 소마차(小馬車)를 부렸다. (召皇太后御小馬車)
장안(張晏)이 말하기를 ‘황태후가 궁중에서 노닌 것은 수레를 끌게 하여 가마를 탔다는 것이다. 한나라 마구간에는 과하마가 있는데 키가 3척이며 과하마로 가마를 끌게 하였다. (張晏曰皇太后所駕遊宮中輦車也 漢廐有果下馬髙三尺以駕輦)’라고 하였으며,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소마(小馬)는 과일나무 아래에서도 말을 탈 수 있었던 까닭에 과하마(果下馬)라 불렀다. (師古曰小馬可於果樹下乗之故號果下馬)’라고 하였다.  - <전한서(前漢書)> 권68 곽광김일제전(霍光金日磾傳)

2. 한나라 때에는 수레를 타고 부렸는데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끌게 하거나 혹은 과하마가 끌도록 하였다. (漢制乘輿御之或使人輓或駕果下馬) - <송서(宋書)> 권18 지제8

3. <한서>에 이르기를 ‘창읍왕(昌邑王) 하(賀)와 소황태후(召皇太后)가 과하마를 탔다’고 하였다. (漢書曰昌邑王賀召皇太后果下馬乘之) - <태평어람(太平御覽)> 권894 송(宋) 이방(李昉)

4. (고구려의) 그 말은 모두가 작으며 산을 능숙하게 잘 오른다. 나라 사람들은 기(氣)와 힘을 있어 전투를 잘한다(其馬皆小便登山國人有氣力習戰鬪).  -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권30 동이전

5. 고구려의 말은 모두가 작으며 산을 능숙하게 잘 오른다. 나라 사람들은 기(氣)와 힘을 숭상하고 활과 화살 그리고 칼과 창을 잘 다루며 개갑(鎧甲)을 하고 전투를 잘한다.(其馬皆小便登山 國人尚氣力 便弓矢刀矛有鎧甲習戰鬪)  -  <량서(梁書)> 권54 열전 고구려 조

6 과하마로 수레를 끌었는데 그 크기가 양(羊)과 같았다.(駕以果下馬其大如羊)
- <수서(隋書)> 권10 지제오(志第五)

7. 이하(李賀)의 마시(馬詩) 8
赤兎無人用 (적토무인용)    적토마(赤兎馬)를 부릴 사람이 없는데
當須呂布騎 (당수여포기)    모름지기 여포(呂布)만이 말을 몰아 상대할 수 있다네
吾聞果下馬 (오문과하마)    내가 듣자하니 과하마(果下馬)가 있다는데
羈策任蠻兒 (기책임만아)    오랑캐 아이들은 마음대로 채찍질을 할 수 있다네  

※ 이하(李賀, 791년 ~ 817년)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으로 자(字)는 장길(長吉)이다. 이하는 마시(馬詩) 23 수를 남겼는데 위는 8번째 시이다. 이 시를 이해하는 각도에서 조금 다른 견해를 보일 수 있다.

    1) 첫 번째는 적토마와 과하마를 대비시켜 적토마는 천리를 가는 훌륭한 말인데 비해
       과하마는 오랑캐 어린아이들도 탈 수 있는 보잘 것 없음을 비유한 것이라는 설

   2) 두 번째는 적토마는 오직 걸출한 영웅인 여포만이 탈 수 있는데 반해
       과하마는 적토마의 일종이지만 고구려(동이족)는 어린아이도 부릴 줄 아는 용맹한 것을 부각함

▲ 한국 조랑말의 원조인 몽골 조로모로가 과하마였을 가능성이 크다     © 편집부

과하마의 산출지

1. 조경부(肇慶府)
주의 경내에서 산출되는 것이 가장 좋다. 키가 3척을 넘지 않으며 준마(駿馬)는 척골(脊骨)이 둘인데 쌍척마(雙脊馬)라 부르며 씩씩하며 잘 다닌다. (州境出者為最髙不踰三尺駿者有兩脊骨號雙脊馬徤而能行).  - <명일통지(明一統志)> 권81 조경부(肇慶府)

2. 조선
토산물로 금, 은, 철 등이 나며 과하마가 난다. (土産金銀鐡(중략)果下馬) 
- <명일통지(明一統志)> 권89 외이(外夷) 조선국(朝鮮國)

3. 덕경(德慶)의 농수(瀧水)
토산물. 수레를 끄는 작은 말(駟)로서 덕경(德慶)의 농수(瀧水)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키가 3척을 넘지 않으며 준마(駿馬)는 척골(脊骨)이 둘인데 쌍척마(雙脊馬)라 부르며 씩씩하며 잘 다닌다.
<우형지(虞衡志)> (果下馬土產小駟也以出德慶之瀧水者為最高不踰三尺駿者有兩脊骨 故又號雙脊馬健善行虞衡志) - <광동통지(廣東通志)> 권52 물산지(物産志)

4. 나정주(羅定州)
<우형지(虞衡志)>에 이르기를 ‘농수(瀧水)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키가 3척을 넘지 않으며 준마(駿馬)는 척골(脊骨)이 둘이며 씩씩하고 잘 달린다. (虞衡志瀧水産小駟馬髙不踰三尺駿者有兩脊骨健而善行)  - 흠정(欽定)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 권 351 나정주(羅定州)

5. 광동 나정주, 호남성 등
토산물. 수레를 끄는 작은 말(駟)로서 덕경(德慶)의 농수(瀧水)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키가 3척을 넘지 않으며 준마(駿馬)는 척골(脊骨)이 둘인데 쌍척마(雙脊馬)라 부르며 씩씩하며 잘 다니며 힘든 것을 잘 참는다. 농수의 사람들이 많이 새끼를 내어 놓아기른다.

매년 7월 15일이면 기르던 가축을 내놓고 강가에 모여 경주를 벌인다. 말을 살 사람들이 모두 와서 모인다. 경주 관람이 끝나면 사고팔 가격을 의논하는데  그 날은 사기 어렵다. 호남(湖南)의 소양(邵陽)과 영도(營道) 등지에서도 또한 생산이 되는데 일종의 키가 작은 말로서 목이 짧아 돼지와 같으며 둔하고 무딘 것이 농수의 과하마에는 미치지 못하며 또한 쌍척(雙脊)이 있는 것이 드물다. 
- <영외대답(嶺外代荅)> 권9 송(宋) 주거비(周去非) 찬(撰)

맺음말

우리의 과하마와 중국의 과하마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우리의 과하마가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3척 밖에 안되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과하마를 타고 다녔던 말이 저들이 말한 과하마라면 주몽이 왠지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위지> 동이전이나 <량서>를 보면 고구려의 말이 작지만 산을 잘 오르고 전투에 참여하여 용맹을 떨치는 것으로 보아 한족들의 과하마하고는 다름을 느낀다. 한족들이 말하는 과하마는 위 <태평어람>과 <송서> 그리고 <수서>를 보면 왕복들이 타는 수레를 끄는 작은 말 즉 소사(小駟)로 나온다. 특히 <수서>에서는 수레를 과하마의 크기가 양(羊) 같다면 고구려에서 활용했던 전투용 말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과하마의 산출지는 고대에는 예와 백제 그리고 신라로 되어 있던 것이 근대에 오면서 대부분 광동성과 근대조선으로 나온다. 또한 예와 백제에서 바쳤다는 과하마는 그 숫자가 나와 있지 않는데 유독 신라 때만 <구당서>나 <신당서>에 없는 과하마의 조공 숫자가 <당회요>나 <책부원귀>에서 1~2 마리로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가도 의문이다.

추측건대 우리의 과하마는 비록 그 크기는 작았지만. 매우 용맹하고 잘 달렸으며 숫자도 많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러한 과하마를 부르는 우리 고유의 이름이 있었으며 이것을 중국으로 수출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우리가 알고 과하마로 바꼈을 것이다.

<위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몽이 탔던 말이어서 그렇게 불렸다면, 과일나무 아래(下)를 다니는 말이 아니라 고주몽이 타고(高) 내렸던(下) 말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과하(果下)를 현재 중국어로 발음하면 "궈샤(Guoxia)"이다. 이 "궈샤"는 고하(高下)의 "고샤(Gaoxia)"하고 비숫하여 과하(果下)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하마(高下馬)"는 고구려(高)에서 타고(高) 내리던(下) 말(馬)이며, 고주몽(高) 타고(高) 내리던(下) 말(馬)이었던 것이 과수나무 아래를 다니는 말인 과하마(果下馬)로 와전된 것이다. 도대체 어떤 과일 나무 아래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다.

원래 '고구려의 말(馬)'이라는 말(語)이 '작고 비루한 말'이라는 뜻으로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의 이하(李賀)의 마시(馬詩)가 이해될 것이다. 몽골의 초원에서 어린아이들도 능숙하게 말을 잘 부리고 타는 것을 보면 말이 작고 힘이 없어서가 아니고 말과의 생활이 일상화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 말이 세계를 정복한 말(馬)이라면 어찌 과수 아래 지나는 작은 말이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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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7/31 [12:11]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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