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후조선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요동(철령)은 대대로 고려의 강역 (1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친명사대로 전환
 
신완순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9/30 [17:12]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이어 사는 우리 삼천만,   복되도다 그 이름 대한이로세”

위 노래는 ‘대한의 노래’의 1절 가사로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와 ‘동북공정’과 ‘간도협정’으로 불거진 역사 분쟁과 영토문제로 비추어 보면
위 노래는 이제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반도 삼천리’와 ‘무궁화 이 강산에’라는 가사 때문이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3천리(?)

우리의 역사 강역은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삼천리에 국한된 적이 없다. 신시시대와 단군조선은 물론 삼국시대를 거쳐 발해,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반도 삼천리’에 갇혀 산 적이 없다.

보통 ‘만주(滿洲)’라 하면  현 중국의 동북3성 즉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3개 지역을 떠올린다.
현 중국에서는 만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중국은 만주와 청나라의 흔적을 굳이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으며 만주족은 ‘만족(滿族)’으로 만주는 ‘동북3성’으로 대체하여 쓰고 있다.

고대사에서 요동(遼東)을 현 요하(遼河) 동쪽이라고 우기는 것도 우리 역사 강역을 축소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만주를 포함한 요동지역이 5천년 이상 연고를 갖고 있는 우리와 만주족 등 이른바 동이의 흥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우리는 한반도에서만 살겠다는 노래 아닌 노래를 부르고 살고 있다.

우리는 언제 요동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그 단초는 고려 말의 역사에 우리가 요동을 포기하게 되는 아픈 역사가 있다. <명사(明史)> 권320 ‘고려전’과 같은 책 권136 ‘이원명(李原名) 전’에 기록에는 “고려에서 ‘요동의 문주(文州),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는 모두 고려의 옛 땅이니 철령(鐵嶺)에 병영을 설치하겠다.’고 주청하니, 

원과 명이 ‘여러 주(州)가 원(元)의 판도 안에 있어 요(遼)에 속하여 있으며 고려의 땅은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고 있고 지금 철령은 이미 위(衛)가 설치되어 있어 마땅하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고려에서 재차 주청을 하니 임금(명 태조)이 고려에 유시하여 땅이 갈라져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반해 <명사(明史)> 권320 ‘고려전’에는 “홍무(洪武) 20년(1387년) 12월 호부(戶部)에 명하여 고려왕이 철령 북쪽의 동서의 땅으로 옛 개원(開元)에 속한 것은 요동에서 다스리도록 하고, 철령 이남의 땅으로 고려에 속한 것은 본국에서 다스리도록 하라고 하고 나라의 경계를 바로 하고 침범하지 말도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홍무 21년(1388년) 4월 고려의 우왕(禑王)이 표를 올려 철령의 땅은 실로 대대로 고려에서 지키어 왔으니 마땅히 옛날처럼 되길 바란다.’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때는 중원대륙에서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시점이고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는 명나라를 견제해야할 처지에 있었다. 최영 등의 지지를 받고 있던 고려의 우왕(禑王)은 우왕 13년(1387년)에 대대로 고려의 땅이었던 요동의 철령 지역을 되찾고자 명나라에 되돌려 달라고 한 것이다.

▲ 대부분 사람들은 당시 요동을 지금의 요동반도, 위화도를 압록강 하구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 편집부

최영 요동정벌, 고려 영토였던 심양 북쪽 철령 수복 의도

여기에서 철령은 어디인가? 보통 철령하면 현 강원도와 함경남도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알고 있으나 아니다.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있는데 압록강 이남에 있는 철령에 병영을 설치하고 명나라와 싸워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철령은 현 중국 요녕성의 심양 북쪽에 철령이 있으며 철령 북쪽에 개원이 있다. 고려는 이 철령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명나라에 돌려달라고 요구를 하지만 명나라가 거절을 하여 고려는 최영과 이성계, 조민수 등을 장수로 하여 팔도의 군사를 모아 요동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고 치는 것은 불가하다는 등 4가지의 요동 정벌 불가 사유를 들어 군사를 돌려 곧바로 왕성을 공격하여 우왕과 최영 등을 사로잡았다. 우왕을 강화도로, 최영을 합포로 유배를 보내고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삼는 쿠데타에 성공을 하였다.

명나라를 숭배하는 숭명(崇明)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고려 왕조를 뒤엎고 임금이 된 이성계는 나라 이름을 정함에 있어서도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옛 강역인 요동을 버리고 주체성을 망각한 명나라를 숭상하는 사대주의는 세종 때 확고하게 정립이 되었다.
 

세종과 말에 대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2부)에 이어집니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4/09/30 [17:12]  최종편집: ⓒ greatcorea.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