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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집안으로 옮겨진 광개토호태왕비 (1부)
과연 길림성 집안이 고구리 국내성일까?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5/01/05 [11:13]
중국 25사에도 속하지 않는 <괄지지(括地志)>의 "불내성(不耐城)은 곧 국내성(國內城)이다. (중략)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라는 문구를 근거로 하여, 압록강 북쪽에 있는 길림성 집안현이 고구리의 도읍인 환도성으로 확정된 유물적 증거가 관구검기공비이고, 국내성으로 확정된 유물적 증거가 거대한 광개토호태왕비이다.

일명 관구검기공비는 다른 사람의 비석 파편으로 보이는데다가 크기가 사방 한자 정도로 작아 중원 어딘가에서 집안에다 옮겨다놓고 역사왜곡을 한 것이라고 지난 컬럼에서 밝힌바 있다. 그렇다면 집안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호태왕비도 옮겨진 것일까? 즉 집안이 고구리 국내성이 아니라는 말로 실로 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514&section=sc2&section2= 참조)

중국 25사에 속하는 <신당서 열전 145-동이>에는 “압록수는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海로 흘러 들어간다. (鸭渌水历国内城西, 与盐难水合 又西南至安市, 入于海)”라는 기록이 있어, 국내성은 압록수의 동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내성이 압록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당서>의 기록이 맞는지, 아니면 압록강 북쪽에 있는 길림성 집안현이 고구리의 200년 도읍지인 국내성인지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집안을 다녀온 한국인이면 누구나 “과연 집안이 고구리의 도읍지였을까?”하는 의구심을 느끼고 돌아온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협소한 외길인데다가, 집안은 국가의 도읍이 될 만한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한 그야말로 분지형 소읍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한 곳에 대제국 고구리가 도읍을 세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좌) <신당서> 기록대로 압록의 동쪽에 있는 국내성 (우) 압록의 북쪽 집안현으로 비정된 국내성     © 편집부

1,600년 전에 건립된 광개토호태왕비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우뚝 서있는 거대한 비문에 새겨진 명문에는 시호(諡號)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광개토왕이나 광개토대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스스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므로, ‘광개토평안호태왕’이라고 하든가 편의상 ‘광개토호태왕’ 또는 ‘평안호태왕’ 간단히 줄여서 '호태왕' 또는 ‘영락태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광개토(廣開土)은 글자 그대로 나라의 경계(땅)를 넓게 열었다는 의미로 호칭이라기보다는 가장 상징적인 업적일 것이다. 흔히 광개토호태왕을 중국식으로 황제의 칭호를 붙여 ‘광개토대제’라고도 부르는데, 태왕이라는 의미 자체가 여러 제후(왕)을 거느린 의미이므로 우리 식으로 태왕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또한 비문에 “18세에 등극해 연호를 영락이라 했다(二九登祚號爲永樂)”라는 문구에서 광개토호태왕은 영락(永樂)이라는 자체연호를 사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 명나라의 속국이 되어 소중화가 된 조선왕조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보이는 <삼국사기>에서는 광개토왕이라 기록했으며, 영락태왕이 자체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삭제되어 있다. 
 
그러나 <고구리사초·략>에는 “태왕이 등극하며 군신들에게 이르길 ‘지금 4해의 모든 나라들이 연호를 세우지 않은 곳이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없어진지 오래되었소. 마땅히 3대(추모, 유리, 대무신) 시절에 건원했던 예를 살펴서 다시금 새 연호를 세워야겠소.’라고 명하니, 춘태자가 영락(永樂)을 년호로 평안(平安)을 휘호(徽號)로 올려 이를 허락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삼국사기>가 호태왕의 자체연호 사용기록을 고의로 삭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비석은 광개토호태왕 붕어 후 아들인 장수태왕이 414년에 세운 것으로 올해가 광개토호태왕비 건립 1,600주년 되는 뜻 깊은 해이다. 호태왕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 비석으로, 높이는 6.34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 성인의 키와 비교한 광개토호태왕비     ©편집부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대석)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15~20cm로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의 내용은 크게 ① 서언으로 고구리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호태왕의 즉위 후 대외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에 대해 새겨져 있다.                       
                                                   
비는 1876~80년 사이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당시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이 설치되었다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지고, 2005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비석이 어딘가에서 옮겨진 것이라는 의혹이 있고, 일제가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호태왕이 자기네 조상인 왜를 정벌한 내용을 치욕으로 여겨 훼손해버렸고, 비문을 위조해 조선침략의 정당성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 역사왜곡을 위해 변조한 비문에서 석회물이 흘러내리는 모습     © 편집부

최초 발견 이전 호태왕비에 대한 기록이 왜 없을까?

호태왕비가 집안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 1876~80년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토록 거대한 비가 왜 그 이전에 그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고 어떻게 그 큰 비석이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조선왕조 때 압록강 건너 집안 지역에 있는 비에 대한 아래 세 기록이 있기는 하다.

1. <용비어천가 제39장 압강(鴨江) 주해>
(황성) 평안도 강계부 서쪽 강 건너 140리에 있는 큰 들 가운데 대금황제성이라 칭하는 고성이 있고 성 북쪽 7리에 비가 있다.
(皇城 平安道江界府西越江一百四十里, 有大野中有古城 諺稱 大金皇帝城 城北七里有碑)

2. <동국여지승람 권55 강계부 산천조>
(황성평) 만포 30리 거리 황성평에 금황제묘라 전하는 황제묘가 있고 10장 높이의 비석이 있다.
(皇城平 距滿浦三十里. 皇帝墓. 在皇城平. 世傳金皇帝墓. 碑石爲之 高可十丈)

3. <강계읍지 : 1830년 편찬 1872년 교정>
(황제성) 압록강변 벌등진에 금나라 초기 도읍으로 전해지는 성곽이 완연하다. 황제묘는 황성평 위 1리에 있고 높이가 10장짜리 비석이 서있다.
(皇帝城 在伐登鎭被鴨綠江邊. 城郭尙今宛然. 金國初都云. 皇帝墓在皇城平上一里許有立碑. 高可十丈)

1445년 완성된 용비어천가와 성종 12년(1481)년 완성된 <동국여지승람>과 이후 350년 후에 편찬된 <강계읍지>에 거의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0장 높이의 비석이 오랫동안 그곳에 계속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된 강계와 만포는 현재 중국의 길림성 집안현과 압록강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조선왕조 때 지명으로 지금도 같은 지명이다.

▲ (좌) 현대지도 집안, 만포와 강계, 삼수, 갑산 (우) 19세기 초 제작된 조선여진양국경계도에 그려진 황제능과 황제평 

과연 위 기록에서 언급한 10장짜리  금황제묘비석이 과연 현재 집안현에 우뚝 서있는 광개토호태왕비일까? 통상 1장(丈)을 3m라 했으니 약 30m 높이인데 비석의 높이로는 불가능하므로 아마 10척(尺)의 오기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호태왕비의 높이는 6.34m로 약 20척이다. 설사 척을 장으로 잘못 쓴 오기라 하더라도 높이의 단위가 잘 맞지 않기에 위 세 기록에서 언급한 금황제능비석은 광개토호태왕비와는 다른 비석으로 보인다.
▲ 집안 아불란사 터에 있는 석주     ©


실제로 집안현에 있는 사찰인 아불란사 터에 높이 3~4m 정도 되는 큰 석주가 있는데, 이것이 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금황제의 비석으로 보인다. 따라서 1872년 이전에 광개토호태왕비는 집안에 없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여러 기록에 ‘조선의 영토는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라 했듯이 집안 지역은 고려와 조선왕조의 영토였기 때문에 사서에 호태왕비에 대한 기록이 당연히 남아있어야 한다. 게다가 서간도를 개척할 당시 거대한 호태왕비가 우리 주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호태왕비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호태왕비는 원래 집안에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고구리의 도읍이 있던 지역은 산서성 중남부였고 직접 통치강역이 동쪽으로 한반도부터 서쪽으로 신장·위구르까지였으므로, 집안현에서 고구리 비석과 유물이 발견됨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호태왕의 능과 공적비가 산서성의 도성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집안현에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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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1/05 [11:13]  최종편집: ⓒ greatcorea.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 문걸 15/01/06 [08:03]
매일 새로 올라오는 기사들 잘 보고 있습니다.
중국 대륙에 원래 고구려,백제,신라 지역엔 집안이나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무덤이나
이런 것들보다 훨씬 많은 유물들이 있을것이라 생각되나 중국측에서 일부러 발굴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중국 대륙에 있는 현재 발굴되거나 우리 유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고분들에 대한 칼럼도 한번 부탁드립니다. 혹시 제가 못찾은거면 링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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