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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이 세운 신시(神市), 한국문명 시초이자 세계 최초 국가"
신시는 단군왕검의 조선 건국보다 앞서는 인류 최초의 문명
 
역사모 김종서 박사 기사입력  2015/07/12 [15:03]
일본이 우리 역사의 출발인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라고 왜곡한 데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우리 교과서에서는 아직도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교육부에서 지침을 그렇게 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군의 건국이야기가 나오는 삼국유사의 기이편 ‘고조선조’에는 단군 이전에 “환웅천왕이 신시(神市)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주목을 하지 않은 것이다.

최근 중국의 요하문명 지역과 북한의 대동강 유역에서는 단군 건국 이전의 유물과 유적들이 상당히 많이 발굴되고 있다. 우리나라 제도권 국사학계에서는 단군왕검의 고조선도 신화라고 하니 이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 입을 다물고 중국 측의 눈치만 보고 있다.

기록에 분명히 나와 있는 이 신시의 역사를 찾으면 만주를 포함한 우리 겨레의 서북지역 활동 역사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고조선 신화론과 반도사관을 바로잡고, 이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자기들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왜곡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근원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그래서 신시시대 역사의 진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 일본이 단군을 신화라고 하니 우리는 그 이전을 탐구하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왕검은 그 환웅의 아들로서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국정교과서인 초등학교 사회 5-1에는 “고조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이며 단군왕검이 서기전 2333년에 세웠다”고 되어 있으며, 중·고등학교 검정교과서인 ‘역사’, ‘한국사’ 또한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를 단군이 건국한 고조선으로 기술하면서 이것조차 ‘신화’라고 가르치고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시 관련 기록을 빼버린 것이다.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라고 하는 조선총독부의 주장을 따르다 보니 그 이전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며, 그런 사관이 지금 우리 교과서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을 강제 점령하기 이전인 1894년 4월과 12월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삼국유사 고조선편의 기록 자체를 조작된 신화로 왜곡하는 논문 2편을 발표했다.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을 강제 병탄한 직후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의 실존을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단군의 실존이 부정되니 그 이전은 따라서 더 철저히 부정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흐름이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세뇌된 학자들이 학교와 연구기관 등 제도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의 인류사회 발전단계설이 알려진 상태에서도 신시의 사회조직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주류 국사학자들의 자세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신시시대 사람들이 남긴 흥륭와문화(서기전 6200∼서기전 5400년)로부터 홍산문화(서기전 4710∼서기전 2920년)까지의 요하문명을 우리 문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된다. 일부 학자들이 이 지역 후기 문화를 고조선과 연결시키기는 하지만 신시 역사를 모르니 단군 이전의 유물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함으로써 중국의 문화유적이 되게 된다.

▲ 환웅천왕이 세운 신시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홍산 취락유지 복원도. 천혜의 요새인 홍산산성은 서기전 4710년 전에 이미 부족연합국가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 편집부

◆ 세계 최초의 국가인 신시 탄생의 배경과 국가제도

인간이 수십명 내외의 무리를 지어 이동생활을 할 때는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먹을 것이 많은 곳을 찾아 떠나면 됐다. 그러나 농업을 하는 정착생활은 먹을 것이 적다고 이동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하면 이웃 마을을 공격하여 식량을 약탈하는 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가 6200년 전 120가구로 만들어진 흥륭와마을 유적지의 해자이다. 적이 쳐들어오다 해자에 빠지면 돌, 창, 활 등으로 쉽게 제압하기 위한 것이므로 해자는 전쟁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끝없는 마을과 마을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마을보다 좀 더 강한 힘을 가질 필요가 있었고, 자연적으로 부족의 내부 결집을 위한 지도자가 생겼을 것이다. 전쟁이 잦아지자 살아남기 위해 부족 간 연합이 필요했으며, 이런 조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법과 제도가 생기고, 마침내 고대국가가 건국된다.

삼국유사에 환웅천왕이 풍백(풍속교화), 우사(수자원 관리), 운사(천문관측), 주곡(식량생산), 주명(명령 집행·군사), 주형(사법), 주병(보건의료), 주선악(교육) 등의 8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의 장을 거느리고 백성들을 다스리고 교화시켰다고 했으니 법과 제도를 갖춘 국가였다고 보아야 한다. 신시는 하느님의 자손을 자칭하는 환웅족, 곰을 이름으로 사용하는 부족, 호랑이를 이름으로 사용하는 부족 등 다수의 부족이 연합한 부족연합 형태의 국가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  옥 귀걸이, 목걸이, 팔찌를 만들어 멋을 내는 문화홍산 문화 (기원전 4500~3000) c형 옥룡     ©

◆ 흑룡강·요하문명은 신시의 문화유산

세계 4대문명보다 앞선 문명이 요하문명이고, 요하문명보다 앞선 문화가 흑룡강문명이다. 이 두 문명이 한국 문명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첫째 흑룡강·요하 유역이 고대 한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둘째 흑룡강·요하 유역·한반도가 동일한 문화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

필자는 고조선과 한사군이 실존할 당시에 쓰인 중국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고조선 관련 지명인 연, 조선 등 20여곳의 위치를 고증한 결과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영정하(북경·천진 서쪽)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고대·현대 도로를 비교하여 위치를 고증하는 방법, 지도상의 단순 거리를 비교하여 위치를 고증하는 방법, 도로의 굴곡 상태와 수평 직선거리로 위치를 고증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한사군(현도·낙랑·임둔·진번)과 대방군, 요동군 등 한나라의 동북지역 군·국들의 위치 18곳을 일일이 고증해 고조선 영토 위에 설치된 요동·요서군·요동속국과 한사군, 대방군은 영정하와 요하 사이에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지면 관계상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영정하의 동쪽 지역과 그 위의 문명은 고대 한국의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고조선과 한사군의 실제위치를 찾아서’ 1∼8권 참조).



▲ 상투머리 한국인 모습을 하신 하느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문화     ©편집부


이어서 흑룡강 유역, 요하 유역, 한반도에서 발굴된 유물·유적의 공통점을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①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는 문화
②남녀노소가 옥으로 귀걸이, 목걸이, 팔찌를 만들어 멋을 내는 문화
③하느님을 모신 신전과 제천단을 세우는 문화
④상투머리 한국인 모습을 하신 하느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문화
⑤무덤 위에 탑을 쌓은 세계 최초의 피라미드·적석총문화
⑥곰을 부족 명칭으로 사용하는 문화
⑦닭, 말, 돼지, 곰, 뱀, 발 달린 뱀, 날개 달린 뱀 등의 모습을 한 용을 인간세상과 천국을 왕래하는 탈것으로 생각하던 용문화
⑧움집과 뼈대집 건축문화와 돌로 성을 쌓는 문화
⑨비파형 모양의 동검을 사용하는 문화
⑩칼 모양의 돈에 하느님을 상징하는 ‘날 일’(日)자와 ‘달 월’(月)자를 새긴 명도전 사용문화
⑪불교보다 수천년 전에 참선과 명상을 하여 건강을 지키고 향상시키는 문화
⑫가면 탈 등을 만들어 노는 문화 등의 공통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필자는 이 12가지 특징을 가진 문화를 신시문화라고 부르는데, 흑룡강·요하 유역과 한반도에 동일하게 존재하므로 동일문화권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따라서 흑룡강·요하 유역, 연해주, 한반도를 아우르는 이 지역을 신시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나일강문명을 이집트문명이라고 부르듯이 이 지역 문화를 한국문명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한국사 교과서 바로잡기 1000장면’ 참조).



▲ 흑룡강 유역, 요하 유역, 한반도에서 발굴된 유물·유적에는 여러가지 공통점이 확인돼 동일한 ‘신시문화권’ 혹은 ‘한국문명권’으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 편집부

◆ 신시의 건국·교화 이념인 홍익인간을 고조선 건국이념으로 왜곡

한국사 관련 교과서는 모두 홍익인간을 고조선의 건국이념으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또한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을 왜곡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환웅이 인간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므로 (탐구인세·貪求人世) 환인이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홍익인간(弘益人間)할 만한지라 천부인 세 개를 주어 인간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단군과 홍익인간 관련 기록은 없다. 이 기록 내용으로 보면 ‘홍익인간’은 환인이 환웅에게 준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이념이었다. 단군도 그 이념을 따랐을 수는 있지만 고조선의 건국이념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이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고 추상적으로 해석해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백성들이 알고 실천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홍익인간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부간에 서로 존중하며, 형제간에 우애 있고, 이웃을 사랑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예의와 법과 제도를 잘 지키는 삶을 실천하여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라는 인간 교화의 이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일본식 한문 해석이며 일본 교육을 받은 이병도가 우리나라 학자로는 처음으로 삼국유사를 번역하면서 그렇게 번역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연구도 나와 있다(김영돈, 유탁영). 어쨌든 구체적 역사 사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연구를 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 초기 국가 신시를 기반으로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열었다

앞에서 인류사회의 발전 단계를 간단히 설명했지만, 신시시대나 고조선이 신화의 시대이거나 갑자기 국가를 만든 것은 아니다. ‘떠돌이사회’→‘부족사회’→‘부족연맹사회’라는 단계를 거쳐 국가가 만들어진다. 필자는 환웅천왕의 신시를 국가사회로 보지만, 윤내현 등 주체 사학자들조차 청동기시대와 연결짓는 서구 논리를 따라 그 당시의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지 않음을 들어 아직 국가사회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고조선을 최초의 국가사회로 보기도 한다.

이 부분은 좀 더 많은 연구가 이어져야 보편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기록으로 보거나 발굴된 유적과 유물로 봐서도 단군왕검의 고조선이 이러한 신시를 이어서 생겼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겨레의 역사를 말할 때 초기 사회에 대한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가 형성되기 위한 지역적 여건, 경제적 환경, 문화 등 여러 조건을 통해 ‘한덩어리’가 되는 배경과 과정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삼국유사의 고조선 기사는 이런 과정과 정신이 잘 녹아 있는 기록이다. 짧게 요약되어 있으나 다른 많은 기록들과 유물 유적, 민속 등을 연결지어 치밀하게 연구한다면 우리 겨레 시원사를 제대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국사학계처럼 주체적 시각을 갖지 못하고 널리 알려진 역사기록조차 조선총독부의 식민사학자들이나 중국의 동북공정 이론가들만큼도 연구하지 않는 것은 역사를 하는 기본자세가 아니다. 가까이 있는 우리 역사기록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이 우리 역사를 복원하는 첫걸음이다.

김종서 문학박사
역사교육을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 (www.yuksamo.com) 회장
(원문 기사)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6/07/201506070018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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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7/12 [15:03]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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