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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성 동남부에서 황해도로 옮겨진 대방군 (8부)
대방군은 한사군이 아닌 고구리 변방으로 백제 고지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4/07 [21:49]
지금부터 허구의 한사군으로 조작된 대방의 연혁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원래 대방고지는 백제의 시국처이기 때문에 당시 대방은 한사군의 땅이  아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일 식민사학의 학설대로 한사군이 대방과 낙랑 땅에 400년간 줄기차게 존속했더라면 어떻게 백제가 B.C 18년 그곳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겠는가! 

백제의 시국처는 42년에 백제의 다루왕이 고구리 대무신제에게 바치고 남쪽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이후 고구리의 직할영토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고구리 역사서에 아래와 같이 대방에 대한 연혁이 기록된 것이다. 대방은 낙랑군에 속한 현이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3세기 이전 기록이 별로 없으나, <고구리사초략>에는 관련 기록들이 많이 있다.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된 대방의 연혁

* “태조황제 30년(141) 신사 4월, 대방의 장언이 둔유에 침입하니, 도성태수 을어가 그를 쳐서 죽였다.”라는 기록과 “35년(146) 병술, 대방이 반란을 일으켰다. 을어가 대방태수 유호를 참살하니, 나머지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항복했다.”라는 기록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문구로 보아 당시 대방태수는 고구리의 태수였음을 알 수 있다.

* “산상제 13년(209) 기축, 공손강이 둔유(요중) 이남의 땅을 차지하고 대방국(帶方國)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두고 한사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망하기 직전인 상태라 공손연을 보내 한사군을 설치할 능력이 없었고, 제3의 독자세력인 공손연이 한나라와 상관없이 대방 땅에다 자칭 나라 같지도 않은 작은 나라를 세웠던 것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공손강이 대방국을 세웠다는 요중(遼中) 즉 둔유 이남의 땅이 어디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요(遼)는 요산이 있고 요수가 흐르는 곳이며, 요중은 요 가운데라는 말이다. 먼저 요에 대해 알아보면, <요사> 권49 탁극탁등수지 제18 예지1 편에 “요는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다. 기자 8조의 가르침의 풍속이 남아 있다.(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流風遺俗)”라는 문구가 있으며,
                
<흠정대일통지> 권121 요주(遼州)편에는 “요수: 일명 요양수라고도 하며 서장수라고도 하는데, 화순현 서북에서 발원하여 팔부령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흘러 주의 성 서남쪽으로 지나며 청장수에 들어간다. <수경주>에 요수는 요하현 서북쪽 요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요하현 옛 성 서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속성에 이르러 청장수에 합류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곳이 과연 어디일까? 명나라 때 이묵이 그린 <대명여지도의 산서여도>에 그곳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 일대이다.  
 
(원문) 轑水(遼水): 一名遼陽水又名西漳水源出和順縣西北入八賦嶺東流經州城西南入淸漳水
 <水經注>轑水出轑河縣西北轑山南流逕轑河縣故城西南東流至粟城注於淸漳                
                     
▲ 명나라 이묵이 그린 <대명여지도>의 ‘산서여도’에 있는 요산     © 편집부
     
▲ 중국이 제멋대로 그린 공손씨의 요동도에 그려진 대방군은 황해도     ©편집부
    
* “동양대제 11년(237) 정사, 류흔・선우사・오림 등이 대방・낙랑 등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고, 공손연과는 한 몸과 같이 되니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을 칭하고 교만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이에 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는 계획을 상의했다.”라는 기록에서,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은 위나라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독자세력임을 알 수 있다. 만일 공손연이 위나라에서 한사군을 위해 파견한 관리였다면, 고구리가 위나라에게 같이 공손연을 토벌하자고 사신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 “동양대제 14년(240) 경신, 대방사람 궁준이 위나라의 태수임을 자칭하며 변방을 침략하고, 신라 및 왜와 소통해 근심거리가 많아졌다. 어관에게 명을 내려 한(韓)의 신지 등을 이끌고 나가 이를 쳐 죽이게 했다.”라는 기록에서 궁준은 위나라에서 파견한 대방태수가 아니라 고구리에 반기를 들고 위나라 편에 섰음을 자칭한 토착인 태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동양대제 20년(246) 병인, 관구검의 난리 중에 낙랑의 유무와 대방의 왕준이 남쪽으로부터 들어와 관구검을 돕자, 백제의 고이왕이 그 허를 틈타 이 두 나라를 기습해 많은 수의 변방 백성을 노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번에는 친중파인 궁준이 노골적으로 고구리를 침략한 위나라 관구검까지 군사적으로 도와주기에 이른다. 위나라 군대가 오니까 도와준 것이지 위나라에서 파견한 한사군 태수는 아닌 것이다. 
  
* “서천대제 5년(274) 갑오 가을 8월, 서진이 유주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平州)로 삼았다. 일설엔 범양・상곡・북평과 요서를 말하고, 또 다른 설에는 창려・요동・대방・낙랑・현토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진의 땅이 아니었었다. 교위・태수・참군을 허설(虗設)한 것이었으니, 또한 웃을 일 아니겠는가?”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진나라가 자기네 땅도 아닌 평주를 행정개편했음을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이 이북5도청을 둔 것과 같은 이치로 보면 된다.

* “서천대제 16년(285) 을사 3월, 대방을 쳤더니 백제사람들이 달려와서 구원하기에, 공격을 백제로 돌려 그들의 성 두 개를 빼앗았다.”라는 기록과 “미천대제 5년(304) 갑자 2월, 백제의 분서왕이 낙랑의 서도(대방)을 습격해 깨뜨리고 그 땅을 군(郡)으로 만들었다. 그 땅은 본래 분서의 모친인 보과의 나라인 대방의 도읍인지라 분서가 모친을 위해 탈취한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대방이 오히려 백제의 식민지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 “미천대제 15년(314) 갑술 가을 9월, 선방이 조문 등을 보내 대방을 쳐서 잠성・제해 두 성을 빼앗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바쳤다.”라는 기록에서 백제의 식민지였던 대방을 다시 고구리가 빼앗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이 바로 <삼국사기> 미천왕조에 기록된 “15년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했다.”라는 기록인 것이다. 한사군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 인기 소설가 김진명의 소설 ‘고구려’의 전반부는 미천태왕에 관한 이야기가 그려졌다     © 편집부

이상과 같이 대방의 연혁에 대해 알아보았듯이, 대방은 원래 한사군의 땅이 아니었다. 고구리의 변방지역인 낙랑과 대방에 살던 사람들은 국제정치의 상황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던 중간세력들이었다. 고구리가 강했을 때는 쥐 죽은 듯이 지내다가도, 고구리가 약해지거나 친중국 성향의 토착인 태수가 나타나면 반란을 일으켰던 회색분자와 같은 세력이었던 것이다. 

또한 공손도-공손강-공손연으로 이어지는 공손씨가 발흥하면서 대방 땅이 잠시 그들에게 넘어간 적은 있으나 약 50년 정도로 그리 길지 않았다. 이러한 공손씨 가문도 위나라에서 한사군을 위해 파견한 관리가 아니라 제3의 중간세력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공손연이 연왕(燕王)임을 자칭하며 거들먹거리자, 고구리와 위나라가 연합해 공손연을 토벌하자고 상의했다는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실례로 공손연은 237년 관구검의 공격을 격퇴하는 등 위나라에 적대할 뜻을 분명히 밝히자, 위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그의 형 공손황이 죽임을 당한다. 238년 위나라 사마의의 군대에 패퇴해 그의 아들 공손수와 함께 도주하다 위나라 군사들에게 잡혀 참수된 공손연이 차지했던 대방을 어찌 한사군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보는 식민사학계의 현 이론이 완전 넌센스라 할 수 있다. 본국에서 군대가 와서 자기네 식민지를 다스리는 수장을 잡아서 참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미천대제는 즉위하자마자 국방력을 강화해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후 이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나 태수를 고구리 중앙정부에서 직접 파견해 통치하는 체제로 만든다. 미천대제는 자신을 옹립했던 12공신 중 한명인 선방을 14년(313)에 낙랑의 왕으로 임명했으며, 7년 후 선방이 죽자 26년(325) 역시 공신인 방부와 오맥남을 낙랑의 왕으로 계속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까지 낙랑·현토·대방 등 허구의 한사군에 대해 알아보았듯이 역사적 사실이 이러할 진데, B.C 108년 한나라 무제가 전쟁에서 참패하고도 설치했다는 한사군이 어떻게 400년간 한반도에서 줄기차게 존속할 수 있었단 말인가! 400년 한반도 한사군은 그야말로 허구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사학계는 지금까지 중국과 일제가 조작한 식민지 한사군 이론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고 있다. 이제는 제정신을 차려 잘못된 역사이론을 바꿀 때도 되었다. 왜 식민지 백성으로 노예적 삶을 살았다는 반민족적인 허구의 역사를 그들은 그토록 숭상하고 철옹성 같이 신봉하면서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는가 말이다. 이것이 바로 친일과 중화사대주의의 잔재 아니겠는가! 올해 광복 70주년이다. 이제는 진정한 의미의 광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사이토 총독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를 정체성이 없는 민족으로 만들고 있는 식민사학계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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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4/07 [21:49]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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