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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096년의 역사서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
<단군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찬란했던 나라 조선 2,096년의 대서사시
 
편집부 기사입력  2016/06/04 [15:00]
국조 단군 왕검의 탄신일은 음력 5월 2일로 올해 2016년은 양력으로 6월 6일(월)이다. 이날 전국에 있는 단군 관련 단체에서는 천제를 지내는 등 많은 행사가 있을 예정이다. 원래 이런 성스럽고 뜻 깊은 행사는 국가가 주도해야 마땅할 것이나, 일제식민사학에 의해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로 되다보니 기념식은커녕 어떠한 조촐한 행사도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국조(國祖)를 곰의 신화로 보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정부는 아마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다.    

본 高句麗역사저널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였던 조선의 역년 2,096년을 재조명하는 특집시리즈를 기획 연재할 예정이다. 고려 말 문하시중을 지낸 행촌 이암 선생이 저술한 <단군세기>의 기록 중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추려 알기 쉽게 해설하여 조선이 얼마나 위대한 나라였는지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단군세기>를 저술한 행촌 이암의 생애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군해(君侅).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 판밀직사사 감찰대부 세자원빈(判密直司事監察大夫世子元賓)인 존비(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 우(鐵原君瑀)의 아들로 태어났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했다. 필법은 조맹부(趙孟頫)와 대적할 만하며, 지금도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에 뛰어났다.    

[생애와 활동사항] 1313년(충선왕 5)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충선왕이 그의 재주를 아껴 부인(符印)을 맡겨서 비성교감(祕省校勘)에 임명된 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충혜왕 초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兼監察執義)에 올랐으나,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해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섬으로 유배되었다.    

1340년 충혜왕의 복위로 돌아와 지신사(知申事)·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충혜왕이 전교부령(典校副令)에 무인 한용규(韓用規)를 임명하자 이를 반대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로 제수되어 제학(提學) 정사도(鄭思度)와 함께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었지만,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인사행정을 공평하지 않게 처리한다고 왕에게 진언했으나 이로 인해 밀성(密城)에 유배되었다. 충목왕이 죽자 서자 저(㫝 : 뒤의 충정왕)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정방의 제조에 임명되는 한편,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가 하사되었으며, 그 뒤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에 올랐다.    

공민왕 초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으나 사직하고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제수되었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문하시중으로서 서북면도원수가 되었으나 얼마 뒤 겁이 많아 도원수로서 군사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으로 교체되었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에 쳐들어오자 왕을 따라 남행했고, 이듬해 3월 좌정승에서 사퇴했다. 1363년 왕이 피난할 때 호종한 공로로 1등 공신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가 하사되었다. 우왕 때 충정왕(忠定王)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행촌 이암 선생의 영정과 유적지     © 편집부

<단군세기>는 어떤 책인가? 

<단군세기>는 고려 후기에 이암(李嵒)이 저술한 사서로 47분의 단군이 통치했던 역년 2096년의 조선의 역대기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수록된 4종의 사서 중 하나로, 1세 단군 왕검(B.C 2333)부터 47세 단군까지의 2,096년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북부여 해모수(解慕漱)의 건국(B.C 239)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암은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저술한 이명(李茗)과 ≪북부여기(北夫餘記)≫의 찬자 범장(范樟) 등과 더불어 천보산(天寶山)에 올라갔다가 태소암(太素庵)에서 진기한 고서(古書)를 얻어 1363년(공민왕 12) 10월 3일 강도의 해운당(海雲堂)에서 <단군세기>를 편찬했다고 전한다. ≪태백진훈(太白眞訓)≫·≪농상집요(農桑集要)≫와 함께 ‘행촌삼서(杏村三書)’의 하나로 꼽힌다.

▲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연표 차이     © 편집부

                                                  서문(序文)
나라를 위하는 길에 사기(士氣)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사학(史學)을 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학이 밝지 아니하면 사기를 펼 수 없고, 사기를 펼 수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정사(政事)와 법령(法令)이 갈라진다. 무릇 사학의 법은 내칠 것은 뿌리치고, 좋은 일은 기리며, 사람과 사물을 저울질하고, 시대와 상황을 논하고 진단하는 것이니 만세의 표준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나라의 백성이 살아온 지도 오래되었도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 질서가 잡히고 또한 더하고 고치고 증명하여 왔다. 나라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며 사람은 정사(政事)와 더불어 갖춰지고 드러나는 것이니 모두가 자아(自我)에 우선해야하며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바이다.     

아아! 정치는 마치 기(器)와 같고, 사람은 도(道)와 같은 것인데 기가 도와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나라는 마치 형(形)과 같고 역사는 혼(魂)과 같은데 형이 혼을 잃어버리고 보존할 수 있겠는가?     

도와 기를 더불어 닦는 것은 나 자신이며 형과 혼을 더불어 갖추는 것도 나 자신이다. 그러한 까닭에 천하의 모든 일은 먼저 나 자신을 아는 데에 있다. 그러한 즉 나를 알고자 하면 스스로 어찌 시작해야 하겠는가?     

무릇 삼신(三神)의 도는 대원일(大圓一)의 뜻에 있다. 조화(造化)의 신이 내려 나의 성(性)을 이루고, 교화(敎化)의 신이 내려 나의 명(命)이 되며, 치화(治化)의 신이 내려 나의 정(精)이 된다.     

그러한 까닭에 오직 사람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고 가장 존엄한 것이다. 무릇 성(性)이라는 것은 신(神)의 뿌리다. 신이 성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만 성이 아직 신 자체는 아니다. 기(氣)가 밝게 빛나며 어둡지 않을 때에 진성(眞性)이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신(神)은 기(氣)를 떠날 수 없고, 기도 신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내 몸 안에 있는 신이 기와 더불어 합하여진 뒤에라야 내 몸 안의 성(性)과 더불어 명(命)을 볼 수 있다.성은 명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명도 성을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내 몸 안의 성과 명이 더불어 합하여진 뒤에라야 내 몸이 비롯되지 아니한 신의 성과 비롯되지 아니한 기의 명을 볼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성(性)의 영각(靈覺)은 천신(天神)과 더불어 그 근원(根源)을 같이 하는 것이며, 명(命)의 현생(現生)은 산천(山川)과 더불어 그 기(氣)를 같이 하는 것이며, 정(精)의 영속(永續)은 창생(蒼生)과 더불어 그 업(業)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를 잡으면 셋이 포함되어 있고(執一含三), 셋이 모이면 하나로 돌아간다(會三歸一)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정심(定心)하여 바뀌지 않을 때 이를 진아(眞我)라고 하며, 신통(神通)하여 모든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이를 일신(一神)이라고 하니, 진아(眞我)는 일신(一神)이 거처하는 궁(宮)이다.    

이러한 참된 근원을 알고 법에 의거하여 수행(修行)을 하면 길하고 상서로운 것이 저절로 이르며 광명이 항상 비추게 되는 것이니 이는 곧 하늘과 사람이 서로 더불어 어우러져 삼신(三神)의 계율(戒律)과 맹서(盟誓)를 묶어서 잡아야 비로소 능히 하나(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성(性), 명(命), 정(精)의 무기(無機)가 삼신일체(三神一體)의 하느님이며, 우주 만물과 더불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는 것이며, 심(心), 기(氣), 신(身)과 더불어 자취 없이 오래토록 존재하는 것이며, 감(感)식(息), 촉(觸)의 무기(無機)는 한인(桓因)의 주된 조상(祖上)이시니, 세계만방과 더불어 하나로 베풀고 동락(同樂)하여 천(天), 지(地), 인(人)과 더불어 무위(無爲)하여 스스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가르침을 세우고자 한다면(立敎) 모름지기 먼저 자아(自我)를 세우고(立自我), 형(形)을 바꾸려 한다면(革形) 모름지기 먼저 무형(無形)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니(革無形), 이것이 바로 나를 알고(知我) 홀로 하나의 도(道)를 구하는 것이다.(求獨之一道)    

오호라 슬프도다! 부여(夫餘)에 부여의 도(道)가 없어서 훗날 한(漢)나라 사람들이 부여에 쳐들어왔고, 고리(高麗)는 고리의 도가 없으니 후에 몽고(蒙古)가 고리에 쳐들어왔다. 만약 그때에 이보다 먼저 부여의 도가 있었다면 한나라 사람들은 자기의 한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며, 고리)에 고리의 도가 있었다면 몽고가 자기의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다.     

오호라 슬프도다! 전에 오잠(주1)이나 유청신(주2)과 같은 무리들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은 몰래 백귀(百鬼)와 더불어 밤에 돌아다니는 것과 같으며, 남생(男生,주3)이나 발기(發岐,주4)의 역심(逆心)은 서로 응하여 세력을 합한 것과 같으니, 나라를 위한다는 것은 어찌 스스로 도(道)와 기(器)를 다 잃고 형(形)과 혼(魂)을 모두 없어져버린 때를 당하고서 스스로 평안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다른 나라 사람들이 정사를 간섭함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임금 자리를 물려주고 다시 세우는 일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제멋대로 가지고 놀고 있는데 우리 대신(大臣)들은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하고만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라 안에 역사가 없고 형(形)이 혼(魂)을 잃었기 때문이다. 일개 대신(大臣)의 능력으로는 나라를 가히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나, 바로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다 스스로 나라를 구할 것을 다짐하고 그 할 바를 찾을 때에 나라를 구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나라를 구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나라에는 역사가 있고 형은 혼이 있어야만 한다. 신시개천(神市開天)은 스스로 그 정통(正統)이 있었고 나라가 정통에 의해 세워졌으며 백성들은 그 정통에 의해 흥하게 되는 것이니 사학(史學)이 어찌 중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단군세기의 서문을 쓰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노라.     

공민왕 12년(1363) 계묘년 10월 3일
홍행촌(紅杏村)의 늙은이가 강도(江都)의 해운당(海雲堂)에서 쓰다.


(주1) 오잠 : 고려 후기의 인물로 원나라의 간적이 되어 충렬왕·충선왕 부자를 모함하여 이간시켰고, 어진 신하들을 모함하고 살해하여 많은 원망을 샀다.  1321년 왕이 원나라에 갈 때 따라가 유청신(柳淸臣) 등과 함께 심양왕 고의 일당이 되어 왕을 모함했고, 1323년에는 원제(元帝)에게 고려에 행성을 설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의 직속령으로 할 것을 청하는 등 고려에 많은 해를 끼친 인물이다.

(주2) 유청신 :  『고려사』의 간신전(姦臣傳)에 수록된 인물이다. 1321년 충숙왕이 원나라로 소환되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그곳에서 심왕 고(瀋王 暠)와 결탁해 심왕옹립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원나라에 계속 머물면서 오잠과 함께 고려에 원나라의 행성(行省)을 두자고 했으며, 충숙왕을 무능하다고 무고하기도 하였다. 1325년에 충숙왕이 환국하자 처벌이 두려워 고려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

(주3) 남생 :  고구려말 연개소문의 장자로 32세에 개소문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가 되었다. 두 동생이 정변을 일으켜 도성을 장악하고 그의 가족을 참살하자 당나라에 투항해 고구려 원정군의 선봉에 서서 평양성을 함락시켜 조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다. 당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46세에 죽었다.  

(주4) 발기 :  신대왕의 아들로 고국천왕이 동생이자 산상왕의 형이다. 서출의 동생이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의 도움으로 산상왕으로 즉위하자 적출 소생인 자신이 왕이 되지 못했음에 불만을 품고 왕궁을 포위해 공격했다가 패퇴하자 요동의 공손씨에게 투항하고는 공손씨의 병력을 빌려 조국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패하자 자결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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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6/04 [15:00]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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