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리.대진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백제 아신왕에게 연전연승하는 광개토태왕 (6부)
탐라는 제주도가 아닌 대만일 가능성 크다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10/14 [23:04]

 호태왕은 2년(392) 임진 7월에 친히 4만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12개의 성을 빼앗고, 군사를 돌려 9월에 거란을 정벌한 후 그곳에 억류되어 있던 유민들과 포로들을 데리고 개선했다. 이어 10월에는 또 다시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가서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주야로 20일을 쉴 새 없이 공격해 마침내 철옹성인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키고 만다.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험하며 해수(海水)로 둘러싸여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인지라 백제 진사왕은 절대로 함락되지 않으리라 여기고는 그의 처 가리와 함께 구원(狗原)에서 약 10일간이나 사냥하면서 호태왕이 철군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관미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놀라자빠지더니 끝내 그 충격으로 인해 일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려진 관미성     © 편집부

 

가리는 자신과 침류왕의 소생인 맏아들 아신(阿莘)을 왕위에 올린다. 아신이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날 적에 신기한 광채가 밤에 비쳤고, 장성해서는 지용이 비범해 매나 말을 좋아했다고 한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려 숙부인 진사왕이 왕위를 계승했다가 8년 만에 죽자 마침내 즉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과 9년 뒤인 394년 전지의 태자책봉과 405년경 전지와 설례의 왕위다툼을 보면, 진사왕이 즉위한 385년경에는 이미 아신에게 아들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런 아신태자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숙부 진사가 아신의 모친인 가리의 정부였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여하튼 고구리 광개토호태왕의 라이벌이 드디어 백제에 등장한 것이었다.

 

관미성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해수로 둘러싸였다는(海水環繞) 기록으로 보아 산서성과 섬서성 사이를 흐르는 황하에 있는 큰 섬으로 추정된다. 현재 한국사학계가 비정한 관미성의 위치는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비정한 경기도 강화군 교동도 설과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 지점인 교하의 오두산성으로 단정한 대동여지도를 그린 고산자 김정호의 설이 있는데 모두 반도사관에 입각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 김정호 비정 관미성(오두산성)은 4면이 바닷물이 아닌 산성     © 편집부

 

호태왕의 관미성 함락 기록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호태왕의 정복전쟁 중 가장 큰 전과로도 보이나, 정작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호태왕 공적비문에는 그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마 공적비에 넣기에는 작은 공적이라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호태왕비에 새겨진 다른 전쟁기록들도 <삼국사기>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은 조선왕조 때 고의로 그 기록을 지워버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호태왕은 이듬해 7월 거란을 쳐서 천서(川西)를 빼앗았다. 중국 인터넷자료에서는 천서를 사천성 서부지역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산서 남부지역 어딘가로 추정된다. 8월, 백제 아신왕이 고구리가 거란을 정벌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고구리의 내부방비가 비었을 것으로 판단해 진무로 하여금 석현성과 관미성을 공격하게 했다.

 

위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가을 8월, 백제가 남쪽 변방을 침범하기에 장수를 시켜 막게 했다.”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아신왕은 진무장군의 출전에 앞서 이르기를 “관미성은 우리의 북방요새였는데 지금은 고구리의 소유가 되어 있으니 그야말로 가슴이 아프고 애석한 일이로다. 그대는 아무쪼록 마음을 써서 부끄러움을 씻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진무는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리의 남변에 있는 석현성 등 5개의 성을 회복하기 위해 관미성을 포위했다. 진무는 화살처럼 날아오는 돌을 무릅쓰고 몸소 병사들의 진두에 서서 공격했으나, 고구리 병사들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는데다가 군량미가 이어지지 않자 결국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고 한다.

 

탐라는 제주도가 아닌 대만

 

탐라의 주 월손이 찾아와서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과연 이 탐라국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삼국사기 신라국본기> 문무왕 2년(662년)에 “탐라국주 좌평 도동움률이 와서 항복했다. 탐라가 백제의 무덕(武德) 이래 이제까지 백제에 신속되었기에 좌평의 관직을 쓰게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항복해 속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탐라국은 주로 백제의 부용국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주에 이르기를 “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수서  열전 백제전>에 “진(陳)나라를 평정할 때, 한 전선이 표류해 바다 동쪽의 담모라국에 도달했다. (백제에서) 남쪽 바다로 3개월이나 걸리는 먼 곳에 담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이 천여 리이고 동서가 수백 리에 이르고 그 땅에는 노루가 많고 백제에 부용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반도사관에 도취된 한국사학계에서는 탐라국을 제주도라고 말하고 있으나, 담모라국은 백제에서 남쪽바다로 3개월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는데다가 남북으로 길쭉한 지형이므로 잘못된 비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는 동서 75km에 남북 35km로 가로로 길쭉한 모양이고, 대만은 동서 144km 남북 386km로 세로로 길쭉한 모양의 섬인데다가 <수서> 기록과 크기도 비슷하다. 참고로 대만의 서안에 녹항(鹿港)이라는 항구가 있는데 주 거래품목이 사슴과 노루와 관련 있다고 한다.                           
                          

▲ <수서>에 기록된 담모라국은 세로로 길쭉한 섬이다.     © 편집부

 

  4년(394) 갑오 7월, 백제의 진무가 또 쳐들어왔는데, 호태왕이 기병 5천으로 수곡성 아래에서 매복했다가 맞싸워 거의 모두를 참살했다. 남은 무리들은 산골짜기에 숨었다가 야밤에 달아났다. 8월, 남쪽 변방의 일곱 성을 수리하게 했다. 백성들의 노고가 심했기에, 잠시 절과 선원을 짓는 공역을 쉬도록 했다.

 

  5년(395) 을미 8월, 호태왕이 비려를 정벌하고 있는 사이 백제의 진무가 또 빈틈을 노려 쳐들어오니, 호태왕은 기병 7천을 휘몰아가서 패수 북쪽에서 싸워 8천여 수급을 베었다 11월, 백제 아신왕은 패수에서의 치욕를 씻기 위해 7천의 병력으로 한수(漢水)를 건너 청목령에 이르렀다가, 큰 눈이 내려 많은 병사가 얼어 죽자 군사를 돌려 한성(漢城)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호태왕이 백제에게 거둔 승전은 집안에 있는 공적비에 새겨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비문에 새겨진 업적에 비해 작은 승리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호태왕이 친히 4만의 병력으로 함락시키자 백제 진사왕이 놀라 죽을 정도로 충격적인 관미성에서의 승리뿐만 아니라, 수곡성에서의 대승과 8천여 명의 목을 벤 패수에서의 압승도 공적비에 새겨지지 못할 정도로 작은 승전이었으니 호태왕은 가히 위대한 정복군주임에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다음 연재부터는 호태왕 공적비에 새겨진 위대한 업적에 대해 연재됩니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7/10/14 [23:04]  최종편집: ⓒ greatcorea.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