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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이동설의 패수는 어디인가? (7부)
1차 제수 --> 2차 당하 --> 3차 조백하
 
이찬구 (사)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 기사입력  2018/02/16 [22:13]

 

5. 결론에 대신하여-패수는 어디인가?

 

신채호는 평양과 패수는 조선 문명 상의 중요한 지방인데도 불구하고 지난 1천여 년 동안 그 본래의 위치를 상실하고 1천 여리나 이사하여 평안도의 한 작은 지방인 것처럼 일려졌다고 개탄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1915)에서 평남 대동강면 토성동(土城洞)를 낙랑군치소(조선현)라고 규정한 이래 이병도의 청천강 패수설은 낙랑군의 위치를 대동강변으로 고정하면서 한반도 안으로 고착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한국의 고대사는 남의 지배를 받아온 반도의 작은 나라로 치부되었다.

 

조선시대의 패수 논쟁은 전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정부는 세종실록·동국여지승람등 조선 전기 관찬사서에서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았다. 그러나 패수가 압록강이라는 전기 조선 정부의 통설은 영조대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에 패수가 요동의 어니하임을 밝힘으로써 조선정부의 패수에 대한 공식입장은 어니하로 바뀌었다. 이는 문헌비고에서 보듯이 조선후기와 대한제국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한국고대사에 대한 강역의 인식과 확대를 가져왔고 본질적으로 유교사관의 균열을 초래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공식적인 패수 위치설정은 사찬사서의 그것과 연동되어 두 가지의 상반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패수 국내설이고, 다른 하나는 패수 요동설이다. 그러나 필자는 패수 국내설이 요서설에 의해 부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패수 요서설에 더 많이 주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필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추가하여 보완하였다.

 

먼저 장안이 말한 ‘3조선 즉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외에 우리가 찾으려는 강은 패수(浿水)이다.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쟁점이 된 것이 바로 패수의 위치문제이다. 하지만 이 패수도 이 3수의 영역 안에서 찾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본다. 낙랑 조선현이나 위만조선이 이 3수의 이름에서 나왔다면, 낙랑군에 소속된 패수현도 이 부근에 있어야 하므로 여기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패수의 근거문헌은 사기에 있는데, 이를 다시 고찰하고자 한다.

 

    서한(西漢)이 일어났으나 그것이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요동의 옛 요새(遼東故塞)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아 연에 속하게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요동의 고새(故塞)에 관하여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서영수는 한()의 고새는 엄밀히 말하면 한의 것이 아니라, ()의 장새라고 보았으나 그 연의 장새의 위치를 대릉하 북쪽으로까지 확대하여 해석하고 있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진개(秦開)2천리 침입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한계가 있다.

 

조선열전에 패수 서군(西軍)을 상군(上軍)으로 삼았다(左將軍破浿水上軍)는 말은 패수는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준 것이다. 이는설문에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을 나와서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한 말과 일치하는 것이다. 난하는 남쪽으로 흐르고, 청천강이나 대동강은 서쪽으로 흐리기 때문에 논외로 할 수밖에 없다.

 

정의에는 패수가 요동새외(遼東塞外)에서 나와 서남쪽 낙랑현에 이르러 서쪽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서쪽 바다로 들어간다는 말은 변조된 의심이 있다.십삼주지(十三州志)패수현은 낙랑군의 동북에 있다”(浿水縣在樂浪東北)는 말에 의하면, 패수가 흐르는 현이 곧 패수현인데, 낙랑군은 패수현의 서남쪽에 있다는 뜻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패수는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고 보는데, 장안의 3수 영역 내에서 서에서 남으로, 다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구하(滱河, 현재의 당하)밖에 없다. 이 구하가 곧 장안의 3수 안에서는 열수에 해당하나, 열수가 두 번 겹치므로 이 열수는 패수의 오기(誤記)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장안이 열수를 두 번 쓴 것은 이 패수를 가리기 위한 꼼수로 본다. 현재 당하인 구하가 흐르는 곳은 연남장성과도 연관된다.

 

심백강의 지적처럼 낙랑군 수성(遂城)현의 이름이 오늘날 연남장성이 있는 하북성 서수현 수성진(遂城鎭)이라고 밝힌 것에서도 알 수 있으며,수성고성유지(遂城古城遺趾)’가 하북성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것에서도 연남장성이 애초에 고조선과 연, 한과 고조선의 경계선 역할을 한 것이 아닌지 의문을 가질 만하다. 특히 낭아산(狼牙山)()은 낙랑군(樂浪郡)의 낭()과 그 소리가 일치하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     © 편집부

 

 

그 다음으로 주목하는 근거는 이유립의 주장이다. 위만을 강도(强盜)로써 단군관경을 절거(窃據)한 자로 본 이유립은 사기조선열전사기』 「위로전(衛虜傳)으로 고쳐야한다고 주장했다.위로(衛虜)란 위만(衛滿)을 연의 떼도둑 무리의 한 사람[燕 流賊衛滿]으로 인식한 것을 의미한다. 지도에서는 위만조선 강역을 위씨절거지(衛氏窃據地)라고 혹평했고, 그 이름을 위로변강침략도라고 칭했다.이유립의 위로전(衛虜傳)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 일어남에 그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하여 다시 요동의 옛 장새(하북성 옥전현 소재)를 수리하고 패수(오늘의 白河, 일칭 遼水)에 이르러 경계를 삼아 연()에 소속시켰다. ~ 무리 천여 인을 모아 가지고 상투 짜고 조선옷 차림으로 동으로 내빼어 관새(오늘의 왕옥 소정)를 나와 패수(河東 湨水)를 건너서 진이 비어놓은 땅 위아래에 운장(낙랑 경내)에 거하면서 ~ 왕험성(灤河左岸 昌黎百里餘)에 도읍하였다.

 

이와 같이 이유립은 한과 본래의 고조선과 경계인 패수는 오늘의 백하로 보고, 그 백하(白河)를 또 요수(遼水)로 보았다. 백하를 패수로 본 것은 북부여기의 조하(潮河)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는 위만이 건너온 패수는 하남성의 격수(湨水, 하동 격수)로 구별하여 보았다. 격수는 낙양의 북쪽을 흐르는 오늘의 심하(沁河)부근이다. 이 심하는 심수(沁水), 계수(洎水) 등으로 불렸다. 그리고 관새는 오늘의 왕옥(王玉)으로 낙양의 북쪽 왕옥산 부근이다.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을 보면, “()나라가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고는 격수(湨水)를 조선과 연의 경계로 하였다고 했다. 이 격수(湨水)를 패수(浿水)의 오자로 보기도 하나, 단순한 오자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     © 편집부

 

 

또 이유립의 위씨절거지도에 의하면 패수는 오늘날의 조백하이며, 조선인 니계상(尼谿相) ()의 봉지가 산동 획청인 것에서 위만과 한사군은 이 산동성과 그 북쪽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조백하를 패수로 보면, 장안의 산수(汕水)와 겹치며, 우적도의 고수(沽水)와도 겹친다는 약점이 있다.

 

그런데 최동은 패수를 대릉하로 인식하였으나, 패수 자체를 왕도(王都)부근의 하천이거나 국경선의 관념으로서의 국천(國川)으로 보았다는 점은 참고할만하다.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왕도로서의 패수는 왕험성에 가까운 조백하가 합당할 수 있으나, 국경선으로서는 그렇지 못한 점이 있다.

 

특히 패수라는 이름이 사기(조선전)에 의해, 한초(漢初)시기에 위만조선과의 경계선(至浿水爲界)이라는 이유로 중요시 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패수는 한()과 위만조선과의 경계선이면서 위만조선이 고조선의 경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고조선과의 경계선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럴 경우 패수는 이유립이 말한 조백하가 아니라, 그 이남(以南)인 하북성 중남부 및 산동성 북부의 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장안의 3수와도 합치되는 것이다.

 

끝으로 현재의 조하(조백하)는 위만 초기는 요수(遼水)였다가, 위만 멸망한 후에 이 요수가 현재의 난하로 이동하고 난 후에 패수가 되었을 것이다. 이유립이 말한 패수(조백하)는 위만의 멸망 이후에 붙인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패수는 고조선의 이동에 따라 옮긴 것이지, 한나라에 의해 이동한 것이 아니다. 수경주에 패수의 설명이 불분명한 것이나, 지금 중국에 패수라는 하천이 없는 것에서도 패수는 고조선의 서부 국경선 이동에 따라 옮겨간 국천(國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한나라는 가는 곳마다 패수 이름을 지우고, 고조선은 그 이름을 안고 이동해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괄지지패구(浿丘)는 청주의 임치현 서북 25리에 있다는 말을 근거로 생각한다면, 산동성에 현재의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최초의 고조선의 패구가 있는 패수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인 니계상(尼谿相) ()의 봉지를 산동 획청에 둔 것도 이곳이 옛 조선 땅이었기 때문에 한나라가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 패수는 오늘날 제하(濟河, 濟水)로서 필자는 이를 1차 패수로 추정한다. 제수(濟水)의 상류를 저수(沮水)로 부르고 있는 것에서 패수의 잔흔을 추측할 수 있다.그 패수가 다시 북쪽으로 밀려 오늘의 당하(唐河, 대청하, 구하, 구수)가 위만조선 이전 또는 위만 초기에 패수(2차 패수)가 되었고, 다시 북으로 밀려 오늘의 조하(조백하, 산수, 고수)가 위만조선 패망 후에 패수(3차 패수)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말하는 3단계 패수 이동설이며, 이 중 마지막 3단계가 북부여기와 이유립이 말한 조하(조백하)=패수설이라고 본다

 

 

이것으로 이찬구 박사의 기고문을 마칩니다.

이찬구 박사는 2005년 대전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사)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으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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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2/16 [22:13]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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