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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문 임나일본부설, 조작된 허구임이 밝혀졌다. (10부)
소위 임라일본부설 신묘년 기사는 병신년 병력출동의 원인 설명문구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2/21 [14:44]

일본은 호태왕 비문의 6(396) 병신년 기사의 앞부분인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到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만을 떼어내어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신묘년(391)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임나(가야신라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여 조선침략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

 

▲ 아직도 한국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외치는 일본 극우주의자들     © 편집부

 

정한론의 정당성을 합리화한 위 일본의 해석이 허구라는 사실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6(396) 병신년 기사를 해석해보면 알 수 있으며, 비문의 내용을 입증해주는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해석)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잔을 토벌해 승리했다. 군사들이 둥지(중심부)까지 진군해 먼저 일팔성 등을 빼앗았다. (이하 阿旦城 등 열거된 성 이름 생략) 그 도성의 적이 굴복하지 않고 감히 나와 백전을 불사하자 왕이 크게 노하여 아피수(압수=압록수)를 건너 군사를 성에 접근시켜 마구 공격하니 적이 급히 퇴각했다. 그 도성을 포위하니 백잔왕은 곤핍해져 남녀 1천인과 세포 1천 필을 내어 바치며, 왕에게 무릎을 꿇고 스스로 지금 이후로는 영원히 종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사면하여 동지()가 되기로 시작했고, 징록은 그 후에 따르는 성의를 보아 정하기로 했다. 58성과 700촌을 빼앗았고, 백잔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볼모로 데리고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개선했다.

 

(원문)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軍至窠首攻取壹八城(이하 열거된 성 이름 생략) 其國城賊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渡阿被水 遣剌迫城橫攻敵退急 圍其國城百殘王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始逑之徵錄其後順之誠 於是拔五十八城村七百 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위 병신년 기사의 해석에서 보다시피, 만일 일본의 해석대로라면 호태왕이 종주국()을 공격해야지 왜의 속국인 백제를 토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또 왜의 신민인 백잔이 호태왕의 공격을 받는데도 종주국인 왜가 백제를 구원하지 않고 왜 가만히 있었는지 그 이유도 이상하지 않은가? 호태왕이 백제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왜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는 것은 백제토벌과 왜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병신년 기사는 왜가 백잔·신라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임나일본부설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태왕 비문에 왜가 등장하는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영락 9(399) 신라에 왜가 쳐들어오자 신라가 호태왕에게 구원을 청하고, 다음해 호태왕이 5만 기병을 보내 왜를 완전 섬멸하면서부터이다. 일제에 의해 깨어져 없어져버린 비문에는 그 과정이 상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따라서 왜가 바다를 건너온 목적도 백잔·신라를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전쟁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앞부분에 백잔·신라의 조공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므로 김덕중씨의 해석처럼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이므로 조공을 바쳐왔고, 왜는 신묘년부터 해마다 바다를 건너 조공을 가지고 왔다가 옳은 것이다. 신묘년은 호태왕 원년이기 때문에 호태왕 즉위 이래로라고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백제 아신왕이 광개토태왕에게 항복하는 장면     © 편집부

 

이러한 내용을 입증해주는 사서기록이 있다. <고구리사초략>“6(396) 병신 3, 황상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대방과 백제를 토벌하여, 10여성을 함락시키고 그 동생을 인질로 잡아 돌아왔다. 5월 왜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과 미녀 5명을 바치고서 선록(禪錄)을 달라고 했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왜는 고구리와 백제와의 전쟁과 상관없이 사신을 보내 호태왕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서적을 달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리사초략>은 호태왕이 6(396) 병신년에 백제를 토벌한 것과 왜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으며, 또한 호태왕이 정벌한 위치까지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당시 백제는 대방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방 위치는 http://greatcorea.kr/sub_read.html?uid=666&section=sc3&section2=  참조)

 

여러 학자들의 해석 중 이유립의 호태왕이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렸다는 해석은 맞지 않지만, 그 다음 구절인 백잔이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하므로는 호태왕의 백잔 토벌의 이유가 될 수 있다. 필자는 破百殘􀀀􀀀新羅以爲臣民􀀀􀀀는 이유립의 해석처럼 聯侵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즉 백잔이 왜와 연합해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으려고 하므로 호태왕이 토벌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종합해 호태왕 비문의 병신년 기사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중국의 여러 기록에 나오는 는 바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황하와 같이 큰 강이나 발해와 같은 큰 내륙호수 또는 대평원과 같이 넓은 들을 라고 한 경우가 더 많다. 여기서의 는 국가별 위치로 볼 때 황하로 읽혀진다.

 

백잔(백제)과 신라는 촉민(고구리를 따르던 백성)이라 예로부터 조공을 바쳐왔고, 왜는 (호태왕이 즉위한) 신묘년 이래로 (조공을 바치러) 를 건너왔다. 백잔이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으려고 하므로 이를 깨기 위해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해 승리했다.” (이하 해석은 위 해석문 참조)

 

이러한 해석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사료가 있었으니 역시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이다. “영락대제 12(402) 임인 9월에 동명대제를 거행할 때 왜신라()()()백제가야의 여덟 나라 여인들이 춤사위를 올리고 곡을 불어 바쳤다. 황상이 왜의 사자에게 이르길 너희 나라는 멀리 물 가운데 떨어져있으면서도, 성심으로 공물을 가져오기를 백년이 지났음에도 한 점 변함이 없으니 충성스럽다 할 것이다.오늘 춤사위를 밟는 것으로 보아, 너희나라의 풍속을 알 만하다. 돌아가거든 너희 왕에게 일러서 후궁의 딸을 바치고 아들을 보내와서 학문하게 하며, 영원한 신민이 되어 너희나라에 두루두루 짐의 교화가 미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 뉴스에서 “일본 자위대가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다.”를 생략했다     © 편집부

 

과연 고구리와 왜 둘 중 도대체 누가 신민이고 누가 종주국이란 말인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비문의 일부분만을 떼어내어 제멋대로 해석하여 어불성설의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해서는 결국 이를 근거로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탄한 일본이다. 이러한 일본의 잘못된 해석이 아직도 성행하고 있으며, 일본정부는 임나일본부설을 아직도 신봉하면서 군사대국의 길로 가고 있다. 그 피해는 가장 먼저 누가 보겠는가? 바로 얼빠진 우리나라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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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2/21 [14:4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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