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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왕자의 난을 미리 예방한 당태종 (5부)
순수했기에 당태종에게 태자 낙점을 받은 9째 아들 이치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3/08 [14:28]

 

2013년 부패와 권력남용 등의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68세의 보시라이(薄熙來)가 간암 판정을 받고 가석방 되었다. 중국 8대 혁명원로인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의 아들로 당시 중국의 혁명원로나 고위인사의 자제들로 구성태자당의 선두주자였다. 다롄시장과 요녕성 성장을 거쳐 당시 충칭시 서기로 재임 중이었고 20121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발탁이 유력시됐던 인물로, 같은 태자당 출신인 당시 시진핑 국가 부주석의 강력한 정적이었다.

 

중국 국가안전부가 승승장구하던 보시라이의 측근인 왕리쥔 전 충칭시 공안국장의 망명사건을 조사하던 중, 보시라이가 영국인 닐 헤이우드를 독살한 아내의 범죄를 은폐하려고 했던 사실이 밝혀졌고, 아들의 초호화판 해외유학생활까지 폭로되었다. 결국 보시라이는 시진핑이 국가주석으로 취임하던 2013년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안 그래도 제거 대상 1호였는데, 보시라이 스스로 알아서 제 무덤을 판 격이었다.

 

중국의 국가주석이 된 시진핑은 집권과 함께 사회 곳곳에 창궐해 있는 부정부패와의 대대적인 전쟁을 선포해 자신의 정적 또는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해버렸다. 보시라이에게는 부정부패 혐의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또 다른 잠재적 경쟁자였던 저우융캉(周永康) 상무위원마저 부패 및 반역죄를 적용해 제거했다.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시 주석은 인사개혁을 단행해 전국 31개 성과 시에 측근들을 배치해 지방의 요직인사를 완전히 장악했다. 시진핑 이전의 후진타오 정부 때는 장쩌민의 상하이방 측근들이 전국에 배치되어 장쩌민이 후진타오를 섭정했다는 평가를 들어야 했으나, 지금 시진핑 주석의 친정체제는 임기 10년만이 아닌 20년 독재도 가능한 체제로 가고 있는 중이다.  

 

▲ 장쩌민과 후진타오까지 자르고 시황제의 길로 가려는 시진핑     © 편집부

 

왕자의 난을 일으킨 부전자전

 

당 태종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무자비하게 정적을 제거했다. 이세민은 현무문에서 형(건성)과 동생(원길)을 제거하면서 후환을 없앤다는 이유로 아무 죄 없는 9명의 조카를 죽이고 부왕 이연까지 쫓아내고는 왕위에 올랐다. 우리 용어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당 태종에게는 모두 14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다음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정비 장손(長孫)씨의 소생은 여덟 살 때 태자로 책봉된 장남 승건(承乾), 넷째 태(), 아홉째 치() 이렇게 셋이었다.

 

태자 승건은 다리병신이라 보행이 자유스럽지 못했고,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동성연애자이기도 했다. 엄청나게 큰 구리로 된 화로와 솥을 만들고는 도망친 노예들을 모집해 백성들의 소와 말을 훔쳐서 삶아먹었고, 돌궐의 변발을 하고 유목민처럼 양을 길러 양피로 된 옷을 입고 삶은 양고기를 칼로 잘라 먹는 등 자신이 마치 돌궐사람인양 행동했다.

 

또한 동성애에 빠져 악동(樂童) 칭심과 더불어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당 태종이 노해 칭심을 죽이자 태자는 칭심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궁녀들에게 제사까지 지내게 하고 자신도 그 앞에서 배회하며 눈물을 흘렸다. 또 궁궐 안에다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고 사사로이 관직을 추증했다. 이 정도 되면 태자의 폐립이 거론됨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당 태종은 넷째 왕자 태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학식과 재능이 뛰어나고 신체도 건강했으나 너무 뚱뚱해 걷기가 불편해 궁궐 내에서도 수레를 탈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승건이 이세민의 신임을 점점 잃게 되어 태자 폐립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자 반대로 태가 강한 의욕을 드러낸다. 태자가 이를 괘씸히 여겨 자객을 보내 동생을 암살하려고하는 등 형제간의 대립이 일어났다.

 

급기야 상황이 현무문 정변 직전과 거의 비슷해졌으니 당 태종 입장에서는 인과응보였던 셈이다. 태자 승건은 주변상황이 자신에게 점차 불리하게 돌아가자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와 형제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승건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고, 정변의 주범이었던 이세민의 동생 한왕 원창은 자결을 강요받았고 측근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태자가 낙마하자 제4 왕자 태가 매일 들어와서 아버지를 받들어 모시니 당 태종은 마음이 흔들려 처음에는 자신과 성격이 비슷한 태를 태자로 세우겠다고 허락했다가, 처남 장손무기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마침내 4자 태의 위선을 파악하게 되었고, 태자 승건의 마지막 충언을 받아들여 마침내 643년에 제9 왕자 치를 태자로 삼는다. 이가 바로 훗날 고종으로 재위 시 백제와 고구리를 망하게 한 인물이다.

 

당 태종의 아홉째 아들 치는 순수하다는 점 외에는 특이한 재능이 없는데다가 나약한 성격의 15살짜리 소년이었다. 이세민이 측근들에게 이태가 세워지면 이승건과 이치는 모두 온전하지 못할 것이고, 이치가 세워지면 이승건과 이태는 모두 걱정이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치가 왕이 되면 성격상 자신처럼 친형제들을 죽이는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만약 정비 문덕왕후가 살아 있었더라면 태자의 교체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건이 터졌으나 당 태종은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의논할 상대가 없었다. 왕후 자리는 비어 있었으나 채울 수가 없었다. 당 태종은 동생 원길의 정처인 양씨(楊氏)를 왕후로 삼으려 했으나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단념하고 말았다. 당 태종이 비록 자신이 죽인 동생의 부인 양씨를 맞아들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당나라는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 선비족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 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무측천 영화에서의 당나라 고종 이치     © 편집부

 

 당 태종과 조선 태종의 차이는?

 

조선왕조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데, 바로 친형제간의 권력다툼인 제2차 왕자의 난이다.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 방간은 왕권을 향한 야심과 호기(豪氣)는 있었으나, 모든 것이 동생 방원에게 미치지 못해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박포 역시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이 컸으나 논공행상에서 밀려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루는 방간이 박포에게 방원에 대해 불평하자, 방원에게 불만이 많았던 박포는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한다면서 방간에게 거병을 선동했다. 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했고, 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어져 결국 방원이 승리하고 두 사람은 체포되어 방간은 유배되었고 박포는 유배지에서 처형당했다. 1차 왕자의 난 때 이복동생들을 죽였던 방원에게 수하들은 반역을 도모한 방간을 죽이라고 간했으나 방원은 친형제는 죽일 수 없다면서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그런데 당 태종 이세민은 현무문 정변에서 친형과 친동생과 9명의 친조카를 죽이는 냉혹함과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점이 몹시 마음에 걸렸던지 당 태종 이세민은 이번에는 정변을 일으킨 장남 승건을 태자에서 끌어내리면서 비어있는 그 자리에 형제간에 피를 보지 않을 성격의 소유자인 아홉째 아들 치를 태자로 정했던 것이다. 당 태종은 유혈사태로까지 번질 수도 있는 제3차 왕자의 난을 미연에 예방했던 것이다.  

 

▲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의 박포(청갑옷)와 방간(흰갑옷)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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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3/08 [14:28]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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