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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본 조선과 한나라 국경선인 패수 위치 (2부)
漢 수군의 항해로와 동이제국과 중간에 위치한 조선의 위치
 
김종서 역사모 회장 기사입력  2018/03/27 [15:03]

 

3. 사마천이 본 조선과 한()나라 국경선인 패수 위치

 

1) 수천리 영토를 가진 조선과 한의 국경선 패수

 

‘2’절에서 보았듯이 사마천이 사기』「조선열전에서 위만은 군사의 힘과 재물의 위력으로 침략하여 그 나라 이웃의 소읍(작은 나라)들이 항복받자 진번, 임둔 등이 모두 복속하여 와서 그 영토가 수천리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사마천은 한나라와 조선의 갈등, 섭하가 조선 비왕 장을 암살하고, 섭하를 요동동부도위에 임명하자 조선이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죽이고, 한나라가 대병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고, 누선장군과 좌장군의 선봉장인 졸정 다가 참패하는 등 약 1년 동안 계속된 전쟁을 무제의 옆에서 지켜보고 기록한 역사가이고, 사관의 우두머리인 태사령이었다. 조선의 위치, 영토 크기, 국력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영토가 수천리가 된다는 사마천의 말은 역사적 사실을 말한 것이 틀림없다.

 

사기』「조선열전방 수 천리의 방()자는 모 방()’자로서 사방을 가리킨다. 따라서 방수천리는 동서의 길이가 수천리, 남북의 길이가 수천리라는 말이므로 위만조선(후조선)의 영역이 동서로도 수천리이고 남북으로도 수천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압록강(혹은 청천강) 남쪽은 동서 길이가 1,000여리 내외에 불과하기 때문에 후조선이 있을 수 없고, 압록강청천강대동강 등 또한 수천리 영토를 가진 조선의 국경선인 패수가 될 수 없다.

 

사방 수천리의 영토가 되려면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내몽고 동부 대부분을 포함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위만조선(후조선)의 직영지가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내몽고 동부 전체라는 의미가 아니다. 임둔, 진번 등의 많은 나라들이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자주권, 자치권을 가진 독립국가, 독립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면서 위만조선에 복속(선린우호관계)한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진번 등을 비롯한 이웃한 많은 나라들이 조선의 직접 통치하에 있었다면, 모든 만이의 나라들이 한나라 황제에게 서신을 올리려고 찾아뵈려 할 리 없고, 한나라에서 조선에 조선의 배후에 있는 만이의 나라 군장들이 한나라와 교통하는 길을 막지 말라고 회유하고, 위협하고, 전쟁을 벌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2) 나라 수군의 출발지와 항해한 바다로 본 패수의 위치

 

한나라 누선장군 양복이 이끄는 수군의 출발지, 도착지, 수군의 숫자, 왕험성의 위치 등에 관한 사마천의 증언으로서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인 패수의 위치를 알 수 있다. ‘2’절에서 보았듯이 사마천은 사기』「조선열전」에서

 

누선장군 양복이 5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제군(齊郡)으로부터 나아가서 발해에서 배를 띄웠는데, 선봉군인 제() 군사 7천명이 먼저 왕험성에 이르렀다가 대패하였다.’

라고 하였다.

 

한국 고대사, 특히 조선한사군의 위치를 논하는 학자들은 주류학자, 비주류학자를 막론하고, 모두 사기』「조선열전()’를 전국시대 ()’의 영토였던 산동반도(산동성) 전체를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논의를 전개하여 왔다.

 

▲ 중국의 발해ㆍ동해 위치도     © 편집부

 

그러나 진시황의 진나라가 서기전 221년 제나라를 멸망시켰고, 한나라가 건국된 후 옛 제나라 땅인, 산동반도(산동성)교동군, 동래군, 랑사군, 발해군, 북해군, 성양국, 제군, 제남군, 태산군, 평원군, 천승군 등의 군국(郡國)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태사령인 사마천이 이러한 상황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조선열전를 산동반도(산동성)로 확장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전국시대 제나라 영토였던 산동반도는 광활한 지역이다. 때문에 산동반도로부터 나아갔다(출발했다)고 하면 11개가 넘는 군국 중에서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알 수가 없다. 사마천이 이렇게 알 수 없는 기록을 남겼을 리 없다. 더욱이 사마천은 좌장군 순체가 요동군을 나아가 우거왕을 토벌하였다고 구체적으로 출발지 명칭을 적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기』「조선열전는 제군(齊郡)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사기편작(扁鵲)이라는 사람은 발해군 정() 사람이다.”신공(申功)은 제사람이다.”승상 광형(匡衡)이라는 사람은 동해 사람이다.”처럼 역사적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제나라 출신이라고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의 제나라가 있었던 땅에 설치된 발해군, 제군, 동해군 등의 군명을 소개하는 것으로서도 제군(齊郡)’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누선장군 양복의 수군 중에 선봉부대인 제군사 7천명은 산동반도(산동성) 전체에서 뽑은 군사가 아니라 제군의 수병이다. 한서』「지리지제군(齊郡)의 주택 수 154,826호에 인구 수 554,444명이다라고 하였다.인구 증가율을 감안 하더라도 제군의 젊은 사람들 중에서 7,000명의 징발은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라 누선장군 양복이 거느린 수군은 총 50,000명이다. 그런데 한나라가 육군과 수군(해군) 50,000 명을 보내어 조선을 공격하였다.고 잘못 이해한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사기』「조선열전의 기록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한나라의 조선 침략군이 육해군을 합하여 50,000명이라는 주장은 조선의 영토 크기, 인구 수, 국력, 군사력 등을 몇 배로 축소시킨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수십만이 한나라 육해군이 공격에 1년을 항전한 것과 5만의 육해군의 공격에 1년을 항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 수군 5만을 수군과 육군을 모두 합한 숫자로 축소한 주장은 중조선, 후조선을 한반도 안의 작은 나라로 왜곡한 연장선상에 있는 주장이다.

 

이러한 해석의 오류가 반복 되지 않도록 사기』「조선열전의 해당 기록을 쉽게 해석하여 보기로 한다.  

누선장군(樓船將軍)양복이(楊僕)제군으로부터()나아가서()발해에(渤海)배를 띄웠는데()군사가50,000인 이었다.좌장(左將軍)>순체가(荀彘)요동군으로부터(遼東)나아가서우거 왕을(右渠)>정벌하였다. 우거 왕이군사를일으켜서험한 지형에서(한나라 침공군을)방어하였다.

 

위 기록에서 병 오만인(兵五萬人)’누선장군 양복이 제군으로부터 나아가서 발해에 배를 띄웠는데 군사가 5만인 이었다.’의 문장에서 포함된 단어들이다. 병오만인은 좌장군 순체 즉 한나라 육군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이다. ‘병 오만인'을 좌장군 순체 이하 문장과 연결시키면 해석도 되지 않고 말도 되지 않는다. 사기』「조선열전에 좌장군 순체가 거느린 육군이 몇 명이었는지는 생략된 것이다.

 

누선장군이 왕험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배를 띄운 발해(渤海)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이은 발해해협의 북쪽서쪽에 있는 바다이다. 따라서 왕험성은 요동반도 서쪽 해안(발해 동북쪽)로부터 요하 하구로부터 천진에 이르는 해안(발해 북쪽)에 있었거나 이 해안에서 가까운 내륙에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와 중조선 말기후조선의 국경선이었던 패수는 요동반도 서쪽지역으로부터 천진 사이에 있었을 수밖에 없다.

 

사기』「조선열전부발해(浮渤海)’발해군에서 배를 띄웠는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발해는 발해의 서남쪽 모퉁이에 있던 군이었으니 한나라 수군이 항해할 바다는 발해이고, 도착지는 요동반도 서쪽 해안으로부터 천진 해안까지이다.

 

‘2’절에서 보았듯이 사마천은 사기』「조선열전에서 전쟁이 끝난 후 누선장군이 열구(洌口)에 이르러서 좌장군의 군사를 기다리지 않고 제 마음대로 먼저 공격함으로서 많은 군사를 잃었다는 죄로 목 베어 죽임을 당하였어야 했으나 속죄의 재물을 바치고 서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패수를 돌파하고 진격해 오는 좌장군의 군사를 열구에서 기다리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열구(洌口)는 패수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패수는 열구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열구를 열수(列水)의 하구(河口)로 인식하여 왔는데 이는 옳지 않다. ‘열구(洌口)’열구(列口)’는 열수(列水)와 관계없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누선장군 양복이 거느린 한()나라 수군의 출발지인 제군(齊郡)과 발해군, 한나라 수군이 항해한 바다인 발해(渤海)의 위치로 보았을 때 열구는 요동반도 서해안으로부터 요하 하구를 지나 천진 바닷가에 이르는 지역의 바닷가나 바닷가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었을 것이고, 패수는 그 열구보다 서쪽에 있었을 것이다.  

 

3) 동이 제국과 한의 교통로 상에 있던 조선의 국경선 패수

 

‘2’절에서 보았듯이 사마천이 사기』「조선열전에서 요동태수와 위만왕이 새외의 만이를 보호하고 변경에서 노략질을 못하게 하고, 모든 만이의 군장들이 천자를 만나러 들어오고자 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 맺은 약정, 조선에서 진번 등의 이웃의 많은 나라들이 서신을 올리고 천자를 뵈려고 하여도 (조선에서) 길을 막고 교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사마천은 한나라와 조선의 전쟁을 지켜본 사관의 우두머리인 태사령이었다. 때문에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 영토 크기, 국력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마천이 진번 등의 이웃 많은 나라들이 한나라 천자에게 서신을 올리고, 천자를 찾아뵙고자 하여도 조선이 길을 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 한반도 남부와 중국간 교통로     © 편집부

 

이러한 사마천의 기록은 한반도에 준왕의 중조선, 위만조선(후조선)과 진번, 진국 등의 동이(東夷)의 널리 많은 나라들이 있지 않았음을 증언하여 주는 기록이다. 만약 고조선 평양중심설’ ‘한사군 재한반도설논자들의 주장대로 진번이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에 있던 국가이고, 진국이 한강 남쪽에 있던 국가였고 이웃한 많은 나라들(방중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진번과 진국을 비롯한 이웃한 많은 나라들이 황해(서해)와 접해있게 된다. 따라서 조선이 평양평안도에서 길을 막는다 하여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한나라로 왕래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인천, 화성, 평택, 당진 등지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에 상륙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반도 남부 지방에 있던 국가들은 서해안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에 상륙한 후 장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육로로 장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가깝고 편리하다. 천에서 산동반도로 건너가는 직선 뱃길은 약 350km 내외의 직선거리이다. 반면 인천에서 한반도 북부인 평양과 청천강을 지나서 요녕성 심양을 통과하여 산해관에 이를 때까지 수평직선거리로 1,000km이다. 산을 오르고 내리고 계곡이나 호수 등을 돌아야하는 곡선도로이므로 실제 도로의 길이는 1,000km보다 2~3배 이상 더 멀었을 것이다.

 

혹 후조선이 바닷길마저 막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조선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력을 갖춘 요금나라도 고려가 바다를 통하여 송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고, (후금)도 명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후조선이 바닷길까지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후조선이 요금나라보다 인구나 군사력이 미약했을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진번과 진국에서 한나라에 국서 등을 보낼 수 없도록 조선이 길을 막았다고 한 사기한서의 기록은 진번진국을 비롯한 많은 만이(동이) 제국(諸國)들이 바다와 접해있지 않은 지역 즉, 한반도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진번, 진국, 만이 제국들이바다와 접하지 않은 내몽고 동부지방이나 하북성의 동부나 요녕성 중북부의 내륙 지방에 있던 국가였고, 후조선이 발해 북안에 접한 국가였기 때문에 진번진국 등의 만이 제국들이 한나라와 왕래하는 길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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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3/27 [15:03]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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