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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생 묘비명과 정확히 일치한 태백일사의 기록 (8부)
천남생이 아닌 연남생으로 연개소문의 아들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5/23 [09:46]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는 연개소문에 대해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해 연개소문의 성은 연()씨이고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太祚)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游)라 하고, 증조부는 광()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를 지냈다. 영양제의 홍무(弘武) 14(603) 510일 태어났고,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다.”고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개소문의 성을 천()씨라 하고, 조상들의 이름도 적혀있지 않다. 개소문의 원래 성씨가 씨였음에도 씨로 적힌 이유는 피휘(避諱) 즉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과 같은 글자사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삼국사기>는 중화모화사대사상에 쩔은 사서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된 연개소문의 조상들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1921년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되었으니 바로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의 묘지명이었다.

 

거기에는 공의 성은 천()이며 휘는 남생(男生)이고 자는 원덕(元德)으로서,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다. (중략) 증조부는 자유(子遊)이며, 조부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를 역임했고, 아버지 개금은 태대대로였는데, 조부와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라는 문구가 있어 식민사학계에서 위서로 치부하던 <태백일사>의 기록이 옳다는 것이 유물로 입증되었다.

 

▲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당나라에 투항하고는 선봉에 서서 조국고구려를 치러 가는 연남생 부자     © 편집부

 

수나라를 세운 문왕 양견은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영주총관 위충을 요서(遼西)에 몰래 파견해 고구리의 관가를 부수고 읍락을 불 지르고 노략질했다. 이에 홍무 9(598)에 영양대제는 연개소문의 부친인 서부대인 연태조(淵太祚)를 보내 등주(登州)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잡아 죽이니 이에 산동지방이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해에 양견이 왕세적 등 30만 군사를 파견해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해 요택에도 미처 이르지 못했음에도 물난리를 만나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후의 수군은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선박 대부분이 깨지고 침몰되어 가을 9월에 수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는데 80~90%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연개소문의 부친은 바로 영주총관 위충을 죽인 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중국사서처럼 연개소문을 아주 흉폭하고 잔인한 인물로 묘사했는데, <태백일사>에는 그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의표웅위(儀表雄偉)하고 의기호일(意氣豪逸)하여 병사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해 복종하니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다.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며 권세 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快傑)이라 할 수 있으며,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이렇듯 모두 좋은 의미로만 적혀 있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와 중국사서에는 나쁘게만 적혀있을까

 

▲ SBS 드라마 연개소문의 포스터     © 편집부

 

청년시절 연개소문의 모습

 

고구리에서 일인독주체제를 구축한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기록은 현재 전하는 것이 별로 없고, 중국고대소설인 갓쉰동전이나 당나라 때 장열이 지었다는 규염객(虯髥客)’ 속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연국혜라는 재상이 나이 쉰 살이 되도록 슬하에 자녀가 없었는데, 하늘에 아들의 점지를 기도하는 제사를 올려 한 옥동자를 얻었기에 이름을 갓쉰동이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짧은 수명을 타고났기에 그 액을 면하기 위해서는 15년 동안 부모와 서로 상면해서는 안 된다고 하기에 등판에 먹실로 갓쉰동이라는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상태로 7살 때 내버려졌다. 소년에서 청년이 된 갓쉰동은 달딸국에 들어가 말도 배우고 풍속도 익힌 후 그 내정을 상세히 알기 위해 이름을 돌쇠라 고치고는 달딸국 왕의 종이 되었다.

  

돌쇠는 영리하게 행동해 달딸왕의 신임을 듬뿍 받았는데, 둘째 왕자가 영명해 사람을 잘 알아보았다. 그는 갓쉰동이 달딸의 종자도 아닐 뿐만 아니라 비상한 영걸임이 틀림없으므로 지금 죽여서 그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 철책 안에 가둬 굶어 죽이려고 했다. 갓쉰동이는 자기의 몸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별다른 뾰족한 계책이 없어 무척 답답해했다.  

 

마침 달딸 왕 부자가 사냥을 나가고 공주가 대신 돌쇠를 지키고 있을 때였다. 돌쇠가 새장을 부수고 그 안에 있던 매를 날려 보내자 공주가 돌쇠에게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물었다. 돌쇠는 나를 가두고 풀어주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고 있으면서, 내가 곁에 갇혀 있는 매를 날려 보내지 않는다면 매가 얼마나 나를 원망하겠느냐?”라고 설명했다.

  

▲ 2006년 방영 SBS드라마 연개소문에서, 중국에서 이화낭자와 결혼한 청년 갓쉰동     ©편집부

 

 공주는 측은히 여기면서 “둘째 오빠는 네가 달딸을 멸망시키려고 태어났다고 하던데, 어찌 달딸을 망치려고 하느냐?”라고 물었다. 돌쇠는 “하늘이 나로 하여금 달딸을 망치려고 했다면 네 오빠가 날 죽이려 해도 난 죽지 않을 것이고, 또 나를 죽일지라도 나 같은 사람이 또 나올 것이다. 네 오빠에게 이렇게 잡혀 죽게 된 몸이 어찌 달딸을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만일 공주가 날 풀어준다면 난 저 매와 같이 산으로 물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나무아미타불이나 읊으며 공주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할 뿐 다른 생각이 없소이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에 공주는 더욱 측은해지더니 “오냐, 내 아무리 무능한 여자지만 국왕의 딸이요 왕자의 동생인데 어찌 너 하나를 못살려주겠느냐? 잠시 후 아버지와 오빠가 돌아오시거든 너의 무죄함을 아뢰어 풀려나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돌쇠는 공주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니 “공주께서는 애쓰지 마시오. 이 한 몸 죽는 게 뭔 대수인가! 내가 듣기론 부처님은 사람을 구할 때 아버지와 오빠에게 아뢴 일이 없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공주가 그 말에 얼굴빛이 더욱 변하더니 내전 불당에 들어가 기도하고는 열쇠를 가져다가 철문을 열고 돌쇠를 풀어주었다.  

 

공주는 돌쇠의 손목을 부여잡고는 “오늘 처음 봤지만 내 마음도 널 따라간다. 네 몸은 비록 가더라도 네 마음은 내게 주고 가거라.”라고 말하자, 돌쇠는 “공주가 나를 잊을지언정 내가 어찌 공주를 잊을 수 있단 말이로?”라고 말하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쳐 풀뿌리를 캐먹으며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달딸의 국경을 벗어나 귀국했다. 달딸의 둘째 왕자가 돌아와 공주가 사사로이 돌쇠를 풀어준 것을 알고는 크게 노해 단칼에 여동생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수염이 긴 규염객이 바로 연개소문          © 편집부

 

당나라 장연은 규염객전에서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으로 중국에 와서 태원에 이르러 이정(李靖)과 서로 친교하며 이정의 아내 홍불지와도 남매의 정을 맺고 중국의 제왕 자리를 손에 넣고자 했다. 그러나 당공 이연의 아들 세민(훗날 당 태종)을 만나보고는 그 뛰어난 기상에 눌려 이정에게 ‘중국의 제왕이 되려는 뜻을 버렸다’고 말하고는 귀국해 난을 일으켜 부여의 왕이 되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부여국은 곧 고구려요, 규염객은 곧 연개소문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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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23 [09:46]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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