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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최전성기의 문치를 꽃피운 춘태자 (5부)
역사서를 새로 쓰고, 법령을 제정하고, 호태왕의 비문을 쓴 석학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6/17 [14:47]

 고구리의 최전성기는 영락태왕 ~ 장수대제 ~ 명치(문자)대제로 이어지는 약 130년간이었다. 그 전성기 초기에 고구리가 찬란한 문치를 뿌리내리고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춘태자라는 뛰어난 대학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태왕의 永樂 연호를 정하고, 역사서를 새로 쓰고, 법령을 제정하고, 호태왕의 비문까지 쓴 춘태자가 얼마나 학식이 높았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호태왕 동상과 비석의 비문을 쓴 춘태자     © 편집부

 

장수태왕이 춘태자와 주변국들에 대해 논의하며 후연, 남연, 후량, 남량은 모두 음란하고 방종하다가 망했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춘태자는 음란하면 방종하게 되고, 방종하면 빈틈이 있게 되며, 빈틈이 있으면 적의 기습을 불러들이게 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에 장수태왕이 크게 기뻐하며 춘태자의 부인 천을에게 채단 50필과 황금 100량을 하사했다.

 

그리고는 짐이 동궁시절부터 지켜본바 경(천을)은 정결하시기가 선왕(仙王=춘태자)의 왕비로 합당하시었습니다. 나라의 흥망은 종실의 여인들의 마음이 정결한지 않은지에 달려있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천을은 신첩은 젊을 적부터 남편이신 왕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삿된 마음은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비 제도를 주청하며 솔선수범한 춘태자

 

어느 날 장수태왕이 춘태자에게 선제께서 제게 훈계하시기를 평생 황후를 둘만 두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미 그것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과연 천자(天子)의 궁중도리란 어떠한 것인지요?”라고 물으니, 춘태자는 천자는 신하나 백성과 달리 널리 후사를 두고 기운을 돋우며 만민을 신하나 첩으로 둘 수 있습니다. 옛 성인들이 시중을 들 여인들을 뽑은 것을 헤아려보니 3천이나 되었는데, 밤일은 짧게 했습니다. 주상이 과로하면 조종이 해를 입기 때문입니다. 궁중의 법도는 바른 것 하나 뿐이 아니라서 후 이하로는 많으면 칠팔십이었고 아무리 적어도 삼십 명은 되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태왕이 만일 하나도 두지 않으면 큰 잘못인가요?”라고 반문하니, 춘태자는 특정한 여인에게만 가는 것은 지나치기에 보조하는 여인들을 두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태왕이 동명(주몽)께서는 3후를, 광명(유리)께서는 7후를, 대무께서는 5후를 두셨습니다. 짐도 이들 숫자 중에서 택하려 하는데 어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또 보조는 얼마까지 둘 수 있나요?”라고 물으니, 춘태자는 “5·7·16빈으로 하시어서 도합 28궁을 두시면 하늘의 움직임에 맞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장수태왕이 나라의 법도에 용골은 용골과 교접해야하며 잡색은 취하지 않는다고는 하나, 근자에 다른 의견들도 많은데 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니, 춘태자는 태호복희는 누이 여와를 후로 삼아 자식을 스물이나 두었으며, 제환공과 진문공 모두 자매고모질녀와 통했습니다. 이미 이 점은 성인들에게 통상 법도가 되어버렸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태왕이 옳거니! 짐 또한 골육을 귀하게 할 것입니다. 5후는 용골(龍骨)로 하고, 7비는 4용골과 3선골(仙骨)로 하며, 16빈을 잡색으로 했으면 합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니, 춘태자는 훌륭하신 생각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제환공과 진문공의 경우에서 보듯이, 성리학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중국에서도 근친결혼을 했었다. <고구리사초략>에는 신라와 백제에서는 누나나 여동생 또는 딸과 고모나 이모를 처로 삼기도 했으며, 색두와 숙신에서는 어미와 자식이 치붙고, 자몽과 개마 역시 이런 풍조가 많았다. 대략 서쪽이 심하고 동쪽이 심하지 않아서 물이 흐르는 형세였다라는 북방기마민족의 혼인풍습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실제로 중천태왕과 광개토태왕은 자신의 모친에게서 자신의 혈육을 얻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삼국사기> 내물이사금조에 신라의 경우는 같은 성씨를 취할 뿐 아니라 친사촌이나 고종사촌·이종사촌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으니, 비록 외국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중국의 예법으로 따지면 크게 어긋난 일이다. 저 흉노의 풍속에 어미도 간음하고, 자식도 간음하는 행동은 또 이보다 더 심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나쁘게 평한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는 조선왕조 유학자에 의해 각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들끼리만 이동하며 살아가는 유목민족에게 근친상간은 생활 그 자체였다>     © 편집부

 

또한 태왕이 나라에서는 순장을 금하고, 나이가 작은 여자는 다시 이어 총애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인간의 정리로야 당연하다 하겠으나 법도로서는 결함이 있어 보이는데, 어찌 생각하십니까?”라 물으니, 춘태자는 성스러운 임금이라면 살리실 겁니다. 천자는 모친도 따지지 않는 것이거늘 하물며 그 나머지야 어찌 하겠습니까?”라고 답하니, 장수태왕이 잠시 말없이 있다가 5·7비 제도로 정하겠다고 했다.

 

태왕은 중외대부에게 절차를 만들게 하고, 경총대부에게는 후비로 합당한 종실의 여인들을 선발하게 하고, 림총대부에게는 외척들 중에서 비빈으로 적합한 여인들을 천거하라고 명했다. 이윽고 태왕이 경총대부와 림총대부가 천거한 여인들 중에서 후궁 30명을 손수 골라 전각과 방을 정해주고 소속관료도 정해주었다. 주상이 직접 골랐는데 착하고 후덕하며 훤칠하고 고상해 보이는 빈들이 많았고, 요염하고 예쁜이는 적었다.

 

태왕이 춘태자에게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극기(克己)라고 합니다. 짐의 나이 이제 막 장년(壮年)이 된지라 쉽게 용기만을 믿으려 할 것이니, 나라의 큰일을 스스로 통제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오로지 숙부 세 분만을 믿을 것이니 짐이 잘못을 범하거든 기탄없이 직간해주셔야 합니다.”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장수태왕이 부인 천을에게 마음이 있음을 느낀 춘태자는 신은 폐하의 오른팔과 같은 신하이온데, 어찌 감히 바치지 않겠습니까? 실제 솔선수범이옵니다.”라고 말하니, 태왕은 그 말을 가상히 여겨 춘태자비를 후로 삼았다. 나중에 태왕은 천을에게 명해 춘태자에게 술을 권하게 하고는 제 딸들이 모두 어리기에 누이동생 두()를 경에게 처로 드렸습니다. 천을보다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더니,

 

춘태자는 을후는 비록 아름답긴 하나 약간 밝히는 정도였으며, 는 부인의 도리는 잘 지키지만 전혀 밝히지를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이에 천을이 나서며 내가 당신의 젊은 시절 처였을 때는 당연히 당신에게 교태를 부렸지요. 지금의 당신이 이미 늙으셨음에도 두가 힘들여 당신을 확실하게 섬기는 것은 주상의 명이 무서워서이지, 어찌 당신에게 교태를 부릴 마음이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 소리에 태왕과 춘태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를 파했다.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이 이렇듯 고구리 최전성기의 군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춘태자라는 대학자가 뒤에 있었기 때문이며, 그에게 일일이 하나씩 물어가며 국정을 처리해나갔기 때문이다. 사실상 고구리 최전성기를 이룩해낸 인물은 바로 춘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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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6/17 [14:47]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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