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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이 건넌 패수와 온조가 건넌 패수는 같은 강 (5부)
 
황순종 고대사연구가 기사입력  2018/07/16 [22:54]

4. 후일의 패수도 같은 강

 

위만이 건너온 요동의 패수는 낙랑군이 설치된 서기 전 108년 이후 요동과 낙랑을 흐르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후 서기 전 18년에 온조왕이 백제를 세울 때 패수와 대수의 두 강을 건너 남쪽으로 왔는데 그곳이 북한 지역이 될 수 없음을 제1항에서 보았다. 여기서는 온조왕이 건넌 패수가 낙랑의 패수와 같은 강이었음을 논하겠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앞에서 본 대로 고구려가 북경 북쪽의 백하·조하 상류에 있었으므로 온조왕이 남쪽으로 패수·대수를 건널 때 한나라의 요동군이나 낙랑군을 지나 올 수는 없으므로 두 군의 사이에 있는 구간으로 건너온 것이다.

 

▲     ©편집부

 

이렇게 요동·현도군과 낙랑군이 떨어져 있게 된 것은 한 무제가 요동·현도와 낙랑 사이에 연접하여 둔 진번·임둔군이 26년만인 서기 전 82년에 <지도 1>처럼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병도는 없어진 진번·임둔의 절반씩은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고 하여, “낙랑군은 구 진번군의 반(7)과 구 임둔군의 반(7)을 합한, 광역을 가진 대낙랑군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무릉서를 근거로 이병도 자신의 생각을 더한 것이지만 믿기 어렵다.

 

무릉서는 한 무제 때 사마상여의 저술로 전해오지만, 사마상여(서기 전 179~118?)는 진번·임둔군이 설치되기 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누가 지었는지도 불분명한 책이다. 내용에 있어서도 진번·임둔의 위치가 후한서에 기록된 현도·낙랑과 비교할 때 너무 떨어져 있어 믿기 어려운데, 따라서 후대의 기록들에 무릉서를 인용하지 않았다. 설혹 이병도의 말이 맞다 하더라도 진번·임둔의 절반은 없어지고 우리 민족의 땅이 된 것이니 그쪽으로 온조왕이 지날 수 있었던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렇게 대륙에서 건국된 백제는 낙랑군의 서쪽에 위치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온조왕 13년 조에 왕이 신하들에게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말했다. 만약 한반도에서라면 백제가 낙랑의 서쪽인 바닷 속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 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니, 낙랑이나 백제나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이 명백한 잘못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병도는 온조왕이 동쪽에 낙랑,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말한 것은, ‘동쪽에 말갈, 북쪽에 낙랑인데 방향이 서로 바뀐 잘못이라 설명했다.온조왕을 이웃 나라들의 위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군주로 몰고 말았는데, 필자는 이러한 이병도의 허황한 주장을 학계에서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후 고이왕은 246년에 낙랑의 변경을 쳤으며, 분서왕도 304년에 낙랑의 서쪽 현을 공취했다. 이때는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이 있을 시기로,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북쪽으로 대방군을 거치지 않고는 낙랑을 직접 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설령 북쪽으로 대방을 지나 낙랑을 친다 해도 그곳은 낙랑의 서쪽이 아니라 남쪽이어야 맞다.

 

끝으로 신라의 경우로 하대의 패수에 대한 기록을 보기로 하겠다. 삼국사기성덕왕 34(735) 2월 조에, “사신 의충이 돌아올 때 (당 현종이) 패강 이남의 땅을 우리나라에 주었다.”는 구절이 있다. 패강은 패수로 인정되고 있는데 패강 이남은 고구려의 옛 땅으로, 당나라에서 차지하고 있었으나 신라에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땅을 그냥 줄 리는 없고, 신라가 그 지역을 이미 실력으로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신라의 9주에 고구려의 남쪽 지경(地境)에 둔 3주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서쪽의 한주에 대해 삼국사기』「지리 2조에 이렇게 썼다한주는 본래 고구려의 한산군을 신라가 빼앗고 ··· 황무현은 고구려의 남천현을 신라가 아우르고 진흥왕이 주로 만들어 ··· ”

 

이와 같은 사실은 진흥왕 때부터 당나라에서 신라왕에게 낙랑군공이란 호칭을 쓴 것에서 알 수 있는데, 진흥왕이 이미 빼앗은 고구려의 땅이 발해 연안의 낙랑군 지역이라는 뜻이다. 또 위 패강이 북한 지역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당나라 재상 장구령의 장구령집』「여 신라왕 김흥광칙에 보인다.(김흥광은 성덕왕의 휘). ()이 패강에 군영을 설치하려는 것을 알았소. 그곳은 발해에 대응할 요충이고 또 녹산과도 서로 마주보고 있소.”

 

 

패강과 녹산(祿山)이 마주본다고 했는데 이 녹산에 대해서는 자치통감』「진기(晉紀)영화 2조에, “처음 부여는 녹산에 있었으나 백제의 침략을 받아 ··· ”라고 했다. 백제가 대륙에 있었기에 녹산의 부여를 친 것이므로, 앞에서 본 패수와 마주보게 되는 것이다.

 

5. 결론

 

패수와 열수는 한반도에 있던 강이 결코 아니며 요동군·낙랑군(지금의 북경·천진)을 지나 발해로 들어가는 같은 강이었다. 이것은 학계의 고대사 지리 체계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반도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중국의 동북 군현이나 갈석산 및 장성 등에 대해서도 별도의 연구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 글에서 단편적으로 언급한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지와 도읍 등 주요 지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활성화되어, 대륙에서의 웅대했던 역사를 하루 빨리 복원해내야 한다. 더욱 근본적인 과제는 거의 방기되고 있는 고조선 2천 년의 대륙에서의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는 연구들이 절실하고 시급하게 요청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앞으로 학계의 깊은 반성과 함께 자유로운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특히 재야학자들과의 토론이 심도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부족한 이 글에 대해서도 비판과 질정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이상으로 황순종 고대사연구가의 패수에 관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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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16 [22:5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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