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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자 이병도는 동북공정의 일등공신 (3부)
만리장성을 황해도까지 끌어들인 식민사학자 이병도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8/15 [13:22]

강단사학계의 대부 이병도 박사는 고대 한중간의 경계인 갈석산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했다. 조선총독부의 지침에 의해 조선사편수회의 일제식민사학자들이 확정지은 평양 낙랑군설에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수안 갈석산설은 중국의 장성이 황해도 수안까지였다는 의미로 한반도북부는 중국 땅이었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태강지지(太康地志)>낙랑군 수성(遂成)현에 갈석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병도 박사의 황해도 수안 갈석산설은 애초에는 조선총독부를 위한 충정이었겠지만, 최근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중국은 처음에는 산해관장성을 장성의 기점이라고 했다가,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는 단동 호산장성까지라고 했으며, 현재 중국역사부도집에는 황해도까지 그려져 있는데, 이 지도는 이병도 박사가 비정한 황해도 수안 갈석산설을 그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 황해도까지 그려진 중국역사부도집의 진장성도     © 편집부

 

중국의 동북공정뿐만이 아니라, 20183월에 한성백제박물관 후원으로 열린 백제학회 31회 정기학술회의에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출신의 윤 모박사는 서기 3세기 중반까지도 백제, 신라, 가야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마한, 진한, 변한 등 촌락 수준의 작은 나라들의 집합체만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일제식민사학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보다도 더 심한 해석이었다.

 

그러면서 한사군인 낙랑군과 대방군은 우리나라 남부를 맡았고, 현도군 등 다른 군들은 북부지역 고구려를 맡았다.”고 하면서 대방군이 경기도 일대까지 내려와 있었다고 주장했다. 윤 박사의 이같은 주장의 배경에 바로 이병도의 항해도 갈석산설이 있는 것이다. 황해도 수안이 낙랑군 수성현 땅이었다면 대방군은 당연히 경기도까지 내려와야 한다. 이처럼 일제식민사학을 그대로 이 땅에 전수해준 이병도의 학설은 지금까지도 후학들에게 바이블처럼 되어있다.

 

▲ 식민사학자 이병도 학설대로 그려진 낙랑군 대방군 지도  © 

 

그런데 이병도의 이러한 식민사학의 학설들이 완전 엉터리라는 사실이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진시황, 한무제, 위무제(조조), 수양제, 당태종, 북위문성제, 북제문성제, 진선제 등 중국의 유명한 9명의 황제가 갈석산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같은 낙랑군에 속하는 고구려 평양성이 갈석산(수안)보다 북쪽이라는 이병도의 학설에 대입하면 희한한 결과가 나타난다.

 

수양제의 30만 선봉대가 평양성까지 왔다가 후퇴하면서 북쪽에 있는 살수(청천강)에서 전멸 당했고, 당 태종은 평양성에서 훨씬 북쪽에 있는 서만주 안시성에서 패해 후퇴했는데 어떻게 당시 수양제와 당태종이 평양성 남쪽에 있는 황해도 수안에 있는 갈석산에 오를 수 있었단 말인가! 당시 적진 뒤로 날아갈 수 있는 초고속헬리콥터라도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중국의 사서기록이 근본적으로 잘못 된 걸까?

 

갈석산에 오른 9명의 황제에 들어가는 위무제(조조)가 지은 東臨碣石以觀滄海로 시작되는 시 관창해(觀滄海)에 대한 <중국백과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관창해라는 제목은 후세사람이 붙인 것이고, 원래는 보출하문행의 제1장으로 혹은 롱서(隴西)이라고도 하며 한락부 중 상여가·금주곡에 속한다. 하문은 원래 낙양 북면 서쪽 머리의 성문이며, 한나라 때 하문으로 칭했으며 위·진 때는 대하문이라 칭했다. 조조의 이 작품을 송서·락지대곡에 넣어 제목을 갈석보출하문행(碣石步出夏門行)’이라 지었다. 이 시는 건안 12(207) 북쪽 오환(烏桓)을 정벌하고 승리를 얻어 돌아오는 도중에 지었다.”

 

조조가 낙양의 북문에서 걸어가 갈석산에 올라 관창해라는 시를 지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낙양에서 걸어갈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어야할 갈석산이 수천 리나 떨어진 황해도 수안에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낙양에서 황해도 수안까지 왔다가려면 최소 6~9개월 이상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이것만 봐도 한국 강단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박사의 황해도 수안 갈석산설은 완전 엉터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가짜 갈석산에 새겨져있는 조조의 시   © 편집부

 

갈석산에 대한 중국 기록들

 

이번에는 과연 이병도의 학설대로 황해도 수안에 갈석산이 있었는지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갈석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서우공(書禹貢)>‘(갈석산은) 우측 끝의 돌을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공전(孔傳)>에 전하기를 갈석은 해반산(海畔山)이다.’고 전하는데 그 장소가 하나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황하와 바다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 즉 중국사서에 황하는 로 많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한서무제기 주>문영이 말하길 갈석은 요서(遼西)군 루()현에 있다.” <수경주>에 전하기를 “(요서군의) 임유(臨楡) 남쪽 물 가운데 있다.” 또한 <수경주>‘유수주에 전하기를 유수(濡水)는 요서군 루현 갈석산까지 동남쪽으로 흐른다.”, <명일통지>에는 창려(昌黎) 서북 50리에 있다고 한다.

() <한서지리지> “우북평군 려성(驪城)현은 대게석산 서남에 있다.” <우공추지> “려성의 산을 대갈석산으로 칭했다는 것은 소갈석산이 필히 있단 말이다.”

() <후한서 군국지> “갈석산은 상산(常山)군 구문(九門)현에 있다.”

() <사기 정의> “갈석은 유()주 계()현 서쪽 35리에 있다.”

() <사기 색은> “태강지지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 <당서지리지> “()주 유성(柳城)현에 갈석산이 있다.”

() <수서지리지> “북평군 노룡(盧龍)현에 갈석이 있다.”

() <조역지> “산동성 해풍(海豐)현 마곡(馬谷)산이 대갈석이다.”

 

▲ 아트라스국사 지도에 그려진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낙랑군     © 편집부

 

갈석산은 ()요서군(루현), ()우북평군(려성현), ()상산군(구문현), ()낙랑군(수성현), ()북평군(노룡현) 등 여러 군에 걸쳐있는 큰 산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전남·북과 경남의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있는 우리나라 지리산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학자들이 위 기록과일치하는 산을 알지 못하다보니 갈석산이 시대별로 여기저기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병도 박사의 비정대로라면 황해도 수안에 있는 갈석산 부근에 중국의 기록대로 요서군 루현이 있어야 함에도, 식민사학은 요서군을 서만주에 있는 현재 요하의 서쪽이라고 비정했다. 그렇다면 갈석산이 황해도 수안에서 요하 서쪽까지 이르는 한반도보다 더 큰 크기의 산이라는 말인데, 이게 과연 이치에 맞는 논리일까?

 

또한 식민사학자 이병도 박사의 학설을 그대로 계승한 교원대 송호정 박사팀이 만든 아트라스국사 지도에는 낙랑군과 요서군 사이에 요동군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갈석산이 요서군 루현에 있다는 중국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도대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북평군을 북경이라 하고 있으며, 옛 노룡현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으로 비정하면서 창려현에 있는 695m 높이의 작은 산을 갈석산이라고 비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병도의 황해도 수안에 있는 갈석산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어느 산이 진짜이고 어느 산이 가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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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15 [13:22]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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